루인이라면, “그래, 생물학은 운명이다. 그런데 네가 말하는 생물학과 운명은 어떤 의미냐?”고 묻겠다. 루인의 입장에서도 “생물학은 운명이다.” 루인에게, 운명이란 고정되고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생물학도 그렇다. 과학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내용이 바뀐다. 머리의 크기가 지능을 결정한다, 뇌의 크기가 결정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연금술로 황금을 만들 수 있다 등등 어떤 시절엔 모두 과학적 사실이었다.
“무엇은 무엇이다”, 란 식의 언설에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란 식으로 대답하는 걸 들으면 참 재미없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는 있지만, 상대방의 전제를 고스란히 인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생물학은 운명이다”란 말이나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다”란 말이나 둘 다, 생물학과 운명에 대한 내용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식의 논의는 재미가 없다. 에로틱한 자극이 없으니까.
[#M_ +.. | -.. | 문답이어받기를 하며 15번 대답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좀더 자극적이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좀더 에로틱하면 좋겠다, 였다. 힛._M#]
02. “채식주의자들은 중산층의 계급적인 특권 문제가 있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채식을 선택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이 말에 어쩌지 못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채식을 접하고 있으면 돈이 없으면 채식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였다. 루인이 범한 착각은, “채식주의자들은 계급적 특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나 정말 계급적 특권을 가져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과 루인의 계급을 무심결에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채식에 모종의 반감을 드러내며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학교수 등의 중산층 계급이었다.) 쳇, 루인은 중산층이라서 옥탑방에서 생활하고 한 달 생활비를 50원 단위로 계산한단 말이냐.
채식을 중산층의 특권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자발이든 비자발이든) 지구 상 인구의 70%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언설이다. 당연히 이런 통계자료는 채식 내부의 계급, 젠더 등의 다양한 차이를 비가시화한다는 문제를 가진다. 하고 싶은 말은, 소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웰빙 채식과 젠더차별로서의 채식, 관계를 고민하는 지점에서의 채식, 동물권을 말하는 이들의 채식 등 채식과 채식주의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지우고 화자의 편견으로 채식을 획일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전제하고 있는 채식이 도대체 어떤 건데?”라고 되물었어야 했다. (아, 억울해. 으으으, 너무너무 화나!!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 바보바보바보.) 혹시 [슈퍼 사이즈 미]에서처럼, 젠더화된 채식과 이성애주의로 점철된 그런 채식을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채식을 하는 ‘여자’친구가 주인공 ‘남자’를 챙겨주는 식으로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