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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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딴소리.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방문자가 늘었습니다. 변방의 무명 블로그, [Run To 루인]에 평소엔 스무 분 가량 씩이나 들리셨는데(고맙습니다!) 어쩐 일인지 어젠 서른 분 가량 씩이나 들리셨습니다! 오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르는 게 속편하지요. 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요.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검색로봇의 방문이 증가했거나(해킹 연습용이라면 트래픽 초과로 접속을 할 수 없었을 테니  해킹 연습용은 아닐 테고요) 텍스트큐브의 방문자 기록에 문제가 있거나겠지요. 텍스트큐브 자체의 방문자 기록과 구글 애날리틱스 방문자 기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도 고민이긴 하죠.
아무려나 방문자의 앞자리 숫자가 달라져서 신기했다는… 후후.
(2005년부터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런 일이 신기한 속물 블로거 루인입니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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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의 공개 시간을 기준으로 한 시간 이내에 오셨다면 좀 다른 글을 읽으셨을 듯합니다. 네, 서두에 쓴 글 일부를 들어냈습니다. 지금 공개하기엔 좀 더 정리해야겠다 싶어서요. 말줄임표는 글 일부를 덜어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표시입니다. 문단 연결이 어색한 상태라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평소엔 잘 쓴 글을 공개했냐면 그것도 아니라 새삼 무슨 사과냐 싶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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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에 적어야지 하고 못 적었는데요. 제 글이 ‘모완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문제야’라는 식으로 독해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럴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모완이 오래오래 연재되었으면 합니다. 82화의 트랜스젠더 이슈는 논쟁적이지만, ’80화 청소년 구독불가’나 ’69화 어쩌면'(엄마의 여고시절을 다시 해석하려고 했던 내용)은 정말 좋으니까요. 초기의 모완과 지금의 모완은 다르고 앞으로의 모완도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 82화에 비해 83화는 또 느낌이 다르고요.
아울러 82화가 비록 제겐 어떤 불편을 야기했다고 해도 네이버 웹툰을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는 점에선 고맙기도 합니다. 일전에 경향신문 기사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문제를 야기할 거면 차라리 쓰지 않은 것이 좋다고 하겠지만, 모완은 좀 다른 맥락이니까요. 더 좋은 만화를 그려주길 바라는 애정이지 ‘역시 별로야, 이제 볼 필요도 없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논평을 하지도 않았겠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전 아니다 싶으면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논평이라는 것 자체가 애정 없인 불가능한 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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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모완의 82화는 무지를 드러냄으로써 무지를 환기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합니다. 작품에도 나와 있듯 작가는 자신이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알기 위해 참새 씨를 만나고 얘기를 나눴고요. 작품 속에도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라고 해서 서로를 잘 아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요. 이런 무지를 드러내는 방법 중엔, ‘나도 잘 모르지만 너희도 잘 모르지?’라고 쓰며 무언가를 알려주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지만, 무지로 작품을 구성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전 모완이 후자의 전략을 취한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모완의 지금까지 작품이 ‘너희들이 뭐라고 해도 내 갈 길을 가겠다’는 느낌이라는데서 가능성이 없진 않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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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은 연구소 태그를 붙였기에 연구소 입장일 수도 있지만(연구원 중 한 분의 지지의견이 있었습니다만) 더 정확하게는 저의 입장에 불과합니다. 어제 쓴 글은 저의 맥락에서 제가 느낀 감정을 쓴 글에 불과합니다. 모든 트랜스젠더의 감정은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만약 제가 쓴 글을 모든 트랜스젠더의 입장으로 혹은 어떤 일반적/보편적 트랜스젠더의 비평으로 읽으신다면 그건 제가 가장 바라지 않은 방법입니다(‘… 읽으신다면 이곳을 폭파시켜야죠’라고 적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읽으셔도 이곳을 유지할 거라..;;; 크). 보편적/일반적 비트랜스젠더의 입장과 논평이 없듯 보편적/일반적 트랜스젠더의 입장과 논평도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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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와 관련해서, 양성애와 관련해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과 삶의 경험이 있듯, 모완이란 만화도 다양한 입장의 하나로 이해되면 좋겠습니다. 모완이 어떻게 모든 퀴어의 삶을 대변할 수 있겠어요. 퀴어 이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완을 읽고 동성애를, 양성애를, 트랜스젠더를 모완에 나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 ‘제대로’ 그려줬으면 한다는 바람은 비퀴어가 퀴어를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이것은 모완의 잘못이 아니라 비이성애자-트랜스젠더를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초점을 맞추 이 지점을 비판해야겠죠. 규범적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 한 편 읽고 모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는 그 만화와 같다라고 하진 않잖아요. 모완의 내용 중 문제적인 부분은 비판해야겠지만, 그 비판은 많은 퀴어 만화 중 한 편으로 위치짓는 방식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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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랜 만에 댓글을 읽고 든 감상입니다. 신문기사의 댓글은 하앍하앍.. 아, 아니, 그냥 진중하게.. 아, 아니, 아무려나 읽고 캡쳐하는데;; 네이버 웹툰의 댓글은 평소에 안 읽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충 훑다보니 이런 고민이 들더라고요. 물론 댓글을 쓰신 분이 제 블로그에 들릴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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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어떤 아쉬움이 있으시다면, 모 님께서 준비 중인 레즈비언 만화를 기대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우연한 기회는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라고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크) 현재 준비 중인 만화의 시놉시스를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소재에 모완과는 다른 입장에서 레즈비언의 삶을 다룰 듯합니다. 본격 공개되면 다시 소개할게요. 🙂
모 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힘내시라고 쓴 글입니다!
아울러 김비 님의 자서전과 소설, 줄리 앤 피터스가 쓰고 정소연 님이 옮긴 <루나> 같은 작품을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모완을 통해 트랜스젠더 이슈가 논쟁이 되었다면 그냥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관련 글을 읽어보는 것도 좋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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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즈음 추가.
83화에서 또 다른 히트 구절이 몇 개 나왔지요.. 이를 테면 “누가 봐도 남자인 참새씨를” “그때는 누가 봐도 여자인 참새씨를”…
전 이런 표현이 딱 모완 작가의 맥락[수준이라고 적을까 하다가 ‘수준’이란 단어의 뉘앙스가 애매해서 ‘맥락’으로 바꿨습니다]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일일이 논평할 정도의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며칠 지나 키워의 본성이 튀어나와 다다다다다 글을 쓸지도 모릅니다만…
최근 자료를 검색하다가 찾은 어느 책(2010년에 나왔음)에서 “동성연애자를 차별하는 표현”이라는 목차가 있더라고요. 83화는 딱 이 목차 같아요. 부연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그 설명이 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랄까요.
일단 수업 준비를 하면서 논평을 더할지 말지 고민해보려고요.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

웹툰 확인하기: http://goo.gl/2CDgg
아래의 비판이 적절한지는 고민입니다. <모두에게 완자가>(모완)라는 작품의 흐름 속에서 이번 화를 구절구절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모완의 연재 역사에서 필요한 비판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무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이번 화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려고 쓴 글이란 판단 때문입니다. 82화에도 드러나는 빈번한 문제(혹은 아쉬움) 중 하나는 …
mtf와 ftm을 구분해서 표기해야 하는 지점에서 구분하지 않는 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분할 경우, 자기 자신을 mtf 트랜스여성, ftm 트랜스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 이들이 누락된다는 점에서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다음은 몇 구절을 논평한 내용입니다.
# “참새씨는 남자의 몸을 가졌지만 여자인, ‘트렌스젠더’다.”
-‘남자의 몸’ 아닙니다. 여성 몸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입니다. 일단, 저는 제가 남자의 몸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의 몸으로 인식할 때가 가장 많고, 때때로 여성/여자 몸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라고 인식하거나 설명합니다. 저처럼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도(각자 다 다르게 인식하기 마련이니까요), ‘남자의’ 몸이 아니라 mtf/트랜스여성의 몸 혹은 여성의 몸인데 그저 특정 신체 부위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 형태를 해석하는 방식(내가 해석하는 방식과 나 외에 다른 사람이 해석하는 방식, 내가 해석하고 싶은 방식과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식 등)이 달라서 갈등이 발생하고요.
-‘가졌지만’.. 가지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은 가질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 형식일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 다양한 사람의 성형수술이 이토록 논쟁일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물이라면 그리고 몸을 소유했기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주체가 따로 있다면 몸을 변형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물이 아니라 몸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성전환수술, 성형수술 등에서 논쟁이 발생합니다. 몸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연애 파트너가 mtf/ftm/트랜스젠더로 자기 설명 방식을 바꾸거나 트랜스젠더일 때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거고요.
-‘트렌스젠더’… 아놔… 트‘렌’스젠더 아니고요. 트‘랜’스젠더입니다! 이런 기본적 단어는 틀리지 마시라고요. 그저 한 곳에 틀린 것이 아니라 제목부터 일관되게 틀리고 있습니다(‘트랜스섹슈얼’은 트’랜’스섹슈얼로 적은 것이 신기할 정도). 여담인데, 어떤 분이 트’렌’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이고 트’랜’스젠더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구분하더라고요.. 한국에서만 가능한 해석이긴 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태원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트렌스젠더’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요즘은 거의 다 트랜스젠더로 바꿨습니다.
# “참새씨는 보통 남자들과 ‘성별정체성’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건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까요?
우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알 듯합니다. 아마도 참새 씨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성으로’ 운운하셨을 듯합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 트랜스젠더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설명 방식이기도 하고 트랜스젠더 자신이 종종 사용하는 서사기도 합니다. 아울러 동성애/양성애는 성적지향 이슈고 트랜스젠더는 성별정체성 이슈라고 둘을 구분할 필요도 있지요(만화에도 나와 있듯이요). 이 두 가지가 작가에게서 뒤엉킨 것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추정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뒤엉킨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뒤에 나오는 구절 “성별을 바꾸는 수술” 때문입니다. 학제에서 흔히 얘기하는 섹스-젠더 구분공식이라는 설명 방식이 작가에게 없기에(섹스-젠더 구분공식을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기에 모르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섹스와 젠더(성별)를 뒤섞어 사용한 듯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하지만 매우 문제가 많은 방법)인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설명을 반복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즉 ‘성별정체성’ 대신 ‘정신적 성’이라고 적었다면 작가가 의도했던 내용이지 않을까 합니다.
(섹스-젠더 개념을 구분하는 논쟁이 있던 초기에, 물론 지금도 여전하지만, 젠더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적 성’으로 표현을 바꾼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장을 수습하려고 고민하다가, 수습이 안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작가가 ‘성별정체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학제에서 규정한 ‘성별정체성’이 정확한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학제에서 나온 논문이라면 기본 개념도 모른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모완은 학제 논문이 아니니까요. ‘성별정체성’ 개념의 옳고 그른 사용 방식을 규정하기에 앞서, 이 용어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연구가 앞서야 합니다. 학제에선 이러이러하게 쓰고 있으니 학제가 아닌 곳에서도 이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건, 지식을 누가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작가는 성별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고 비판하기보다, 성별 개념이 어떻게 유통되고 쓰이는지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가 더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보통 남자들’이란 표현도 문제인데요. 전 이 구절이 작가의 표현이 아니라 앞서 적었듯 참새 씨의 말에서 인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보통 남자들과 다르다’라고 말했을 때의 뉘앙스를 포착 못 하고 그냥 인용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요. 어쨌거나 이 문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제가 가진 관념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여쭤보고 싶어요. 이 문장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냐고.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성애는 보통이고 동성애나 양성애는 특수’란 설명 방식에 작가가 동의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왜 트랜스젠더 이슈에선 이런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까요? 역시나 ‘트랜스젠더란 낯선 이슈’를 다루면서 너무 얼었던 걸까요?
# “성별을 바꾸는 수술”
-이 구절에서 ‘성별’이 소위 ‘육체적 성’ ‘생물학적 성’을 지칭한다면, 즉 섹스를 지칭한다면 대중 미디어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성’을 지칭한다면… 흠… 그렇진 않다고 믿겠습니다. 그냥 ‘성전환수술’이라고 적었다면 가장 무난하게 넘어갔을 텐데 왜 이랬을까 싶으면서도, 성별이란 용어가 어떻게 쓰이는가를 우선 확인해야 할 부분이니까요.
-성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확인해야 하지만, 작가가 성별을 사회문화적 성인 젠더와 생물학적 성인 섹스를 혼용하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작가가 표현한 방식이 야기한 당혹감과는 별개로, 섹스와 젠더가 정말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던가요?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전공자와 일부에게만 의미 있는 논쟁 아니었나요? ‘일반 대중’은 이런 개념을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우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지 않는데 왜 트랜스젠더에게만은 유독 이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적용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일상에서 ‘여자와 남자는 달라’라고 말할 때 섹스와 젠더는 구분되지 않고 상당히 뒤섞여 있습니다. 늘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데 트랜스젠더 이슈에서만은 둘을 구분하면서 생물학적 섹스를 본질로 삼는다면, 바로 그 방식을 파고 들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달라’란 언설이 섹스-젠더의 단선적 생애서사 운운하면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 서사를 내파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 “신체적 성과 정신적인 성이 다른 사람을 전부 트렌스 젠더라고”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는 저는 트랜스젠더가 아닌가요?
이번 모완을 읽으면서, 전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르다’를 비판하기에 앞서 이 언설의 의미를 틀어버릴 수사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언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설명하면 곤란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큰 효과가 없다면, 기존 언설을 틀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병행해야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트렌스 젠더’가 아니고 ‘트랜스젠더’! 도대체 띄어쓰기는 무슨 이유로 한 건가요?
-인용한 문장은 수술여부와 상관없다고 얘기하면서 나온 내용입니다. 트랜스젠더를 수술 여부와 무관하게 설명한 건 좋아요. 🙂
# 작가는 얼었고 농담은 실패했고.
앞에서 저는 작가가 얼어버린 것 같다고 썼는데요. 평소 작가의 개그 감각이 실패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황새가 아이를 물어 주는 장면은 작가의 전형적 농담인데요. 그 장면이 매우 어설프게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모완이라는 작품의 맥락에선 그 농담을 더 밀고 나갔어야 오히려 좋았을 텐데요. 하지만 작가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면서 낯설어했고 얼었고 농담은 정말 어정쩡한 상태로 끝났고…
# 댓글에서 “문득 드는생각에 트렌스젠더인데 동성애자라면 정말 대박이겠네요 이런 사람도 있을까요?”
전 대박입니다. *^^*
네이버도 다음처럼 댓글 추천제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관련글 추가입니다: https://www.runtoruin.com/2139
관련글 또 하나 추가: https://www.runtoruin.com/2146

범주 용어의 역사, 메모

“게이가 호모고 트랜스젠더가 게이던 시절..”이란 표현은 어느 시기까지로 유효한 것일까? 일테면 1990년대 초반엔 확실히 이런 식으로 구분한 듯하다. 그 시기 나온 (일전에 언급하기도 한)기록물엔 mtf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며 게이로, 남성동성애자(바이남성은 어떤 위치일까?)를 지칭하며 호모를 사용하고 있다. mtf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며 게이로 지칭한 시집도 나왔다. 조금 더 추적할 때 1986년에 원고를 쓰고 1987년에 나온 어느 책에서도 mtf 트랜스젠더를 게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1985년 즈음이나 그 직전에 쓴 기록물에선 분명하지 않다. 그 즈음 글에서 호모는 오늘날의 게이와 mtf 트랜스젠더를 모두 지칭한다. 둘을 아예 구분하지 않는다. mtf 트랜스젠더를 여장한 남자로 이해하며, 게이와 mtf 모두 태어날 때 남자로 지정받았지만 여성성을 실천하는 존재로 묶는다. 그래서 호모와 게이란 용어 역시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진 않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할 순 없고, 그저 내가 찾은 몇 편의 기록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록물이 늘어날 수록 과거는 더 흥미롭고 또 복잡하다. 그래서 좋다.
레즈비언과 관련한 용어는 최소한 1980년대 초반부터 분명하게 쓰인다. 여성 간의 성애적 실천(두 동성애자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두 바이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여성과 바이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여성과 이성애자여성의 관계일 수도 있고 등등)은 레즈비언으로 표현한다. 1970년대 명동 문화에서도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했다고 하고 신문기사에도 1970년대 초반부터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레즈비언의 용어 역사를 살피고 그 의미가 미묘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살피는 작업도 꽤나 흥미로우리라.
가장 어려운 건 바이/양성애란 용어 사용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일텐데 ‘양성애’로는 신문기록이 별로 없어서 의외다 싶다. 대신 ‘양성’(ex. 국력양성)이나 ‘바이’(ex. 알리바이, 케이스-바이-케이스)는 관련 없는 기록도 같이 검색되기에 걸러내는 것부터 일이다. 무엇보다 바이를 레즈비언과 호모/게이로 묶어서 일괄 설명했을 가능성가 상당하기 때문에(가능성 97%에 한 표) 이 지점을 섬세하게 가르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이건 단순히 기록물을 발굴하는 것 이상의 어떤 작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바이로 설명할 수 있는 mtf 트랜스여성의 흔적이 있다는 점에서 재밌는 기록물이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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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네이션(동성연애국민)”
1992년 기사에서…
읽고 빵 터졌다.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