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정치, 박원순 시장의 쿨한 인권

*휘리릭 쓰느라 글이 거친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어제 박원순 시장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 합법화가]“한국이 첫 번째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구절과 함께 미국에서 했던 인터뷰를 소개한 허핑튼포스트 기사를 읽었다. 이 말은 별로 신뢰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 다음 구절 때문이었다.

<인용>
박 시장은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기독교의 힘이 매우 강하다. 정치인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다. 동성애를 포함시키도록 보편적 인권 개념의 범주를 넓히는 일은 활동가(activist)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이 대중을 설득하고 나면 정치인들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지금 그런 과정에 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10월12일)
http://www.huffingtonpost.kr/2014/10/13/story_n_5974946.html
</인용>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다소 화가 났기도 하고, 당연하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지난 6월 퀴어문화축제를 서울시청광장에서 개최하려고 했을 때, 지방선거를 이유로 서울시(박원순 시장)는 장소 승인을 거절했었다(이것은 다소 부정확한 표현일 수 있지만 내용은 부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퀴어이슈나 LGBT 이슈, 동성결혼 이슈로 어떻게든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의도였다. 위 인용 구절에서 “보편적 인권 개념의 범주를 넓히는 일은 활동가(activist)들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이 대중을 설득하고 나면 정치인들도 따라가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박원순 자신은 이런 일이 결코 적극 나서지 않을 것이란 표현을 에두른 것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허핑튼포스트가 소개한 이 기사는 다소 ‘모순’이었다. ‘내’가 ‘동성애 인권’을 위해 무언가를 적극 나서서 하지는 않겠다는 식의 언설과 “한국이 첫 번째가 되면 좋겠다”는 언설은 공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존할 수 있다면 이는 더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발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한겨레를 통해 박 시장의 취지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밝혔다.

<인용>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국이 아시아에서 첫번째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고 보도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최근 기사에 대해 박 시장 쪽은 13일 발언 취지를 잘못 전달한 것이라고 밝혔다.
<중략>
박 시장 쪽은 기사가 인터뷰 내용을 와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이날 설명자료를 내어 “박 시장이 직접적으로 동성결혼에 대한 합법화를 추진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성소수자의 인권보호, 종교계와의 갈등 문제, 국회에서의 논의과정에 대한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아시아에서 첫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한 것이지 시장 본인의 의지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박 시장은 인터뷰에서 ‘아마도 한국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번째 국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원한다(hope)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박 시장은 한국 상황을 설명한 것이지, 동성결혼 합법화 추진에 나서겠다는 취지의 발언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박 시장이 기사를 본 뒤 “아, 이거까지는 아닌데”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9655.html
</인용>

허핑튼포스트의 전달 기사가 정확하다면, 나는 박원순 시장의 진심은 “정치인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다”에 있다고 판단한다. 쿨하게 보편적 인권이란 측면에서 동성애자[적어도 기사엔 동성애만 언급하지 LGBT나 퀴어를 언급하진 않으며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다]의 인권을 지지하지만, 그 이상 내게 뭘 요구하지 말라는 태도다.

그리고 이런 논란이라면 논란이고 그냥 가벼운 기사라면 기사에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따로 있다. 동성결혼을 LGBT/퀴어 이슈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과 사안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LGBT/퀴어의 삶은 매우 다종다양함에도 ‘동성애’란 용어가 이 모두를 대표하는 것은 무척 화가 난다. 어떤 이슈가 더 중요하고 어떤 이슈가 차후 문제라는 식의 결정은 논쟁적이지만, 적어도 동성결혼이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논쟁적 이슈처럼 이야기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정말 이건 아니다.

LGBT/퀴어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드는 것(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노숙하는 청소년의 절반 정도가 LGBT라고 한다, 한국의 트랜스젠더가 집을 나왔을 때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결혼 제도 자체를 해체하는 것, 성별 이분법이란 규범과 제도 자체를 흔드는 작업 등이 더 중요한 이슈 아닌가? 적어도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매우 지난한 작업이라고 해도, 지난함을 밀어붙이는 것이 퀴어정치고 트랜스정치라고 믿는다.

티셔츠로 하는 퀴어 실천

책을 보던 E가 이미지를 하나 보여줬다. 아마도 퀴어를 혐오하는 듯한, LGBT를 혐오하는 듯한 가족이 피켓을 들고 있는 장면이었다. 피켓엔 “It’s not Diversity. It’s Perversity.”(다양성이 아니다. [성]도착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E와 나는 둘다 이 문구를 보며 좋아했다. 바로 이거야! 사진 속 비장한 표정의 이 가족은 it(그것)으로 표현한 그 무언가를 혐오하는 듯했지만, 이 문구는 퀴어정치학의 지향점(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느꼈다. 정말 바로 이것이다. 퀴어정치학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착성을 이야기한다. 비규범적 삶을 이야기하고, 규범성의 문제적 작동을 이야기한다.
때마침 긴팔용 티셔츠를 제작하려고 했던 나는 E와 신나게 떠들며, 이 문구를 사용하기로 했다.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라고. 나는 이것 자체로 무척 좋다고 판단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E는 이 구절을 읽은 어떤 ‘퀴어’는 이 구절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I’m Queer.”란 구절을 덧붙이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구절을 이용해서 티셔츠를 만들었다. 가을에서 겨울을 지나 내년 봄까지 입을 옷이다.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 [퀴어는 다양성이 아니다. 퀴어는 도착이다.]라고 적었다. e가 번데기처럼 보이는 건 그냥 넘어가기로… 디자인을 할 땐 글꼴이 괜찮았는데 출력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네… 같은 문구에 글꼴을 바꾸고 색깔 등도 바꿔서 한 번 더 제작할 수도?

Queer Is Not Diversity. Queer Is Perversity. I’m Queer. [퀴어는 다양성이 아니다. 퀴어는 도착이다. 나는 퀴어다.]라고 적었다. E의 의견을 반영한 것. 디자인할 때 글꼴이 얇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가장 잘 나왔다. 가독성도 좋아서 이 글꼴을 애용할 듯.

마지막 구절을 I’m Genderqueer.[나는 젠더퀴어다.]라고 쓴 것도 있다. 나는 퀴어며, 트랜스젠더 역시 퀴어 범주에 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이 퀴어를 성적지향만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젠더퀴어라고 적었다. 종종 나를 젠더퀴어로 설명하기도 하고.

I am Transgender. Look at YOU through Me! [나는 트랜스젠더다. 날 통해 널 봐라!]라고 적었다. 글꼴이 걱정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느낌표가 애매하게 나왔다. 그래도 괜찮아.
그나저나 얇은 긴팔 티셔츠겠거니 했는데 두껍고 따뜻한 티셔츠다. 그리고 꽤나 예뻐서 스키니진과 입으니 잘 어울린다. 우후후. 매우 만족.
+”나도 이런 거 원해!”라는 분은 안 계시겠지? 흐흐흐.
++한국어로 디자인한 티셔츠도 있는데 제작은 않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글꼴이 안 예쁘다. 영어 철자는 다양한 글꼴이 예쁘게 적용되는데, 한글은 글꼴을 바꿔도 크기만 조금씩 변할 뿐이다. 그래서 주문제작을 포기했다. 외국사이트를 이용하니 이런 문제가 있네. 퓨우…
+++근데 이런 거 만들어 입고 다녀봐야, 안전하다. 정말 안전하다. 한국어로 제작하면 좀 알아보려나… 영어와 한국어의 문제일까, ‘남의 티셔츠에 적혀 있는 문구 따위’일까. 결국 티셔츠로 하는 퀴어 실천 따위, 그냥 깨작거리는 행동일 뿐이다. 그저 나를 위로하는 행동일 뿐이다.

시스젠더 의미, 메모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역사적 개념입니다. 한 사람의 현재 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오며 몸과 젠더의 관계를 어떻게 겪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죠. 만약 시스젠더를 자신이 인식하는 젠더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신체적 섹스가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면 저는 시스젠더입니다. 왜냐면 저는 mtf 트랜스젠더고 제 몸 역시 트랜스젠더의 몸, 트랜스여성의 몸, 그리고 여성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얘기하지만 제 턱에 난 수염 흔적은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트랜스젠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단지 현재의 몸 상태만 얘기한다면 저는 시스젠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논리 장난을 치면, 저는 저를 트랜스젠더로 인식하고 제 몸은 트랜스젠더 몸이란 점에서 저는 시스젠더입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한 개인이 살아가며 몸과 젠더가 겪는 다양한 경합을 설명하는 용어란 점에서 저는 자랑스럽게 트랜스젠더입니다. 아울러 시스젠더란 용어는 단지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와 신체적 섹스가 일치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에 대응하는 용어의 필요에서 등장한 용어입니다. 트랜스젠더와 일반인이라고 말한다면 트랜스젠더만이 특이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규범으로 작동하는 이원 젠더를 자연화하지요. 그래서 비트랜스젠더와는 다른 어떤 용어가 필요했고 이를 시스젠더란 용어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놓친다면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를 분리된, 별개의 존재로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와는 다른 젠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비트랜스젠더를 자연화하지 않기 위한 용어입니다. 몸과 젠더를 어떻게 경험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용어란 점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이 지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제가 시스젠더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