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의 문이 한 번에 열리는 시간: 나방, 고종석, 교장, 글쓰는 공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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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생님께서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죠. 술자리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성폭력을 빈번하게 행하면서도 진보연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행동하는대로 혹은 몸 가는대로 생각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워서 생각대로 행동하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몸 가는대로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을 놓아보내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차마 몸 가는대로 할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또 알고 있죠. 결국 몸 가는대로 간다는 걸. 결국 삶이란 불을 너무 사랑하여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같은 것일까요? 제 몸이 까맣게 타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날아드는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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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씨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장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엔 불편한 구절이 적잖아요. 뭐, 어차피 문장을 읽으려고 책을 샀지, 내용을 읽으려고 산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잠들기 위해 누워선 몇 쪽을 읽는데 문장이 너무 좋아 잠드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하루에 세 꼭지 정도만 읽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의 문장을 읽고 나면 저의 문장이 너무 비루하여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는 거죠.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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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고등학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워 이슈가 되었죠. 교장은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주려고 했다나 어쨌다나. 요즘 전 그 교장이 특이할 것 없는, 매우 흔한 모습이라고 중얼거립니다. 학생 성적이 학교 평균에 안 좋은 영향을 주니 전학 가라는 교장, 두발이 교칙에 맞지 않다고 학생에게 욕을 하는 교장, 학교 발전 기금이란 명목의 돈을 안 냈다고 학생을 괴롭히는 교장  …. 따지고 보면 제가 경험한 교장들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내세운 교장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교장이 그렇진 않습니다. 일제교사 대신 체험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을 허가해줬다고 처벌을 받았지만 계속해서 체험학습을 허가하겠다는 교장도 있으니까요. 교장은 모두 나쁘다는 식의 일반론을 펼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언론을 타는 부정적인 교장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겠죠. 제 글에서 결론이 생뚱맞은 것 역시 특이할 것 없다는 거 아시죠? ;;;

04
가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상하죠? 여타의 인쇄매체나 출판물보다 이곳, [Run To 루인]이란 블로그가 제게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합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죠. 제가 직접 꾸려가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선 하기 힘든 말, 상당히 조심하는 말을 다른 매체에 기고하는 글에선 거리낌 없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매체 대부분은 이곳을 찾는 분의 수보다 더 많은 이들이 구독하는 매체인데도 그렇습니다. 이곳이 제겐 애증인 공간일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아, 애증의 공간은 맞아요. 하지만 이곳에선 종종 구체적인 표현을 할 수 없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글을 쓰는 공간이 이곳만이 아니란 점이죠. 네, 제가 글을 쓸 곳이 이곳 뿐이었다면 제 삶의 일부는 흔적을 남기지 못 하고, 제 몸 깊은 곳에 침잠하고 용해하여 형태를 못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특정 시간에 기록해야만 의미가 있는 형태를 못 가져 예기치 않은 순간에 엉뚱한 모습으로 튀어나왔겠죠. 다행입니다. 이곳이 제가 흔적을 남길 유일한 공간이 아니어서.

아무려나 제 몸은, 제 몸의 일부는 여러 공간으로 흩어지고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상태로 부유합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몸엔 꿰맨 자리와 땜질한 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쳐 꿰매지 못 한, 땜질하지 못 한 제 흔적들이, 제 몸의 일부들이 언제나 제 방에 둥실둥실, 저 허공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풍경. 아름다운 풍경.

05
하나의 일이 끝나고 있는 시간입니다. 전 결국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팔자도, 쉴 수 있는 팔자도 아니란 걸 깨닫고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인복이 많다는 걸,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애쓰면 결국 저와 같은 혹은 비슷한 일을 하고 싶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시간입니다.

쓰지 않거나 혹은 지우는 행위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 리뷰를 쓰며 18년간 한국에서 미등록거주자로 살았지만 결국 ‘추방’된 미누 씨 이야기를 조금 썼습니다. 펜으로 쓴 초고 포함 총 5개의 교정본에선 남겼지만, 6번째 교정본에선 지웠습니다. 콜린스의 책과 매우 밀접한 이슈지만 제 글의 전체 주제와는 밀접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요.

며칠 전 콜린스 관련 글에서, 책엔 트랜스젠더란 단어가 몇 번 나오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분석하진 않고 그저 단어만 몇 번 나올 뿐이란 지적을 했습니다.
사실 이건 바이/양성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바이/양성애의 부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언급하면 어떤 식으로건 효과는 있겠죠. 하지만 전 그걸 ‘나 양성애/바이 이슈에도 관심있어서 이렇게 언급한다~’란 태도로 느낍니다. 적어도 저 자신에겐 이렇게 판단합니다. 9월에 쓴 이태원 관련 글에서도 바이/양성애를 언급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내용은 트랜스젠더 범주로 분류할 수도 있는 이들에 관한 것인데 딱 한 곳에서 양성애/바이를 잠깐(한 줄 분량으로) 언급한다는 건, 마치 ‘나 바이도 언급했다~’란 쇼 같았죠. 제대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분석범주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언급하는 건 “언급하지 않았으니 은폐했다”는 식의 비난을 피하려는 과잉방어일 뿐이니까요. 단 한 번 언급하여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어설픔이죠. 그리고 지금은, 한두 번 어설프게 언급하는 게 더 문제란 걸 배웠으니까요. 어설프게 한두 번 언급하는 건 말 그대로 타인을 자신의 지식 자랑, 정치적 올바름 자랑을 위한 악세사리로 동원하는 짓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미누 씨 이슈를 지웠습니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에요. 현재 한국사회의 이슈에서 콜린스의 책과 미누 씨 이슈는 상당히 시의적절하게 연결되니까요. 그리고 제 글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미누 씨를 기대하거나 떠올릴 테니까요. 하지만 그저 서너 줄 정도, 전체에선 서너 번 정도 언급할 바엔 언급하지 않는 게 낫죠. 이런 언급은 ‘타자’를 ‘타자’로 확증하는 일이니까요.

아, 리뷰에 미누 씨 이야기를 뺏다는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한 글을 쓰려고 계획했지만 항상 미루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오늘 다시 떠올라 쓰는 겁니다. 굳이 이번 리뷰가 아니어도, 미누 씨가 아니어도 이와 관련해서 쓸까 하다가 쓰지 않은 이슈는 상당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렇게 지우는 행위의 정치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글쓰기 방법도 배우네요.

『흑인 페미니즘 사상』 리뷰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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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책 『흑인 페미니즘 사상』(박미선, 주해연 옮김. 서울: 여이연, 2009)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애초 협의한 날짜는 이미 지났지만 원고를 청탁하신 분의 말을 믿고 다음 주 중에 발송하려고요.

이 책의 리뷰는 매우 간단하게, 단 한 줄로 쓸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제까지 읽은 페미니즘관련 책에서 당신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거나 아쉬움이 남았다면 이 책을 읽으세요.”

미리 얘기하자면 이 책의 교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Run To 루인]에 이 책 관련 글을 쓰는 게 겸연쩍기도 해요. 하지만 이런 이유로 더 애정이 가기도 합니다. 책 자체가 좋기도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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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형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른 리뷰들을 뒤적이기도 합니다. 책이 논하는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런 맥락에서 해당 책의 위치를 설명하고, 이 책이 현재 어떻게 유용한지를 밝히고. 이건 리뷰나 독후감의 기본 형식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책의 맥락을 설명해주고 책과 리뷰를 쓰는 사람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식이죠. 그러니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쓴다면 미국에서 흑인여성의 상황, 페미니즘에서 인종 논의, 젠더와 인종을 논한 이론 개괄, 흑인 페미니즘의 현재 등이 리뷰에 들어가겠지요. 하지만 이런 관습적인 방식의 글을 쓰기에 저는 적절한 글쓴이가 아니죠. 해당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이런 내용을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은 되니까요. 제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리뷰를 쓰면서 미국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역사적인 맥락을 훑는다면, 적어도 저에겐 코미디입니다. 벨 훅스 조금 읽었을 뿐이고, 오드리 로드 글 몇 편 읽었을 뿐인 걸요. 사실 상 아는 것이 없죠.

이런 고민은 조금 나중에 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전공자, 미국현대문학전공자, 미국흑인문학전공자, 미국 사회학 전공자, 이주와 인종 이슈 전공자들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도 굳이 저에게 이 책의 리뷰를 청탁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먼저 고민했습니다.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전공자들이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이 아닌 다른 어떤 리뷰를 바란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사회학자나 미국문학전공자가 쓸 수 있는, 쓸 거라 예상하는 글을 바랐다면 애당초 저에게 리뷰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죠. 즉, 트랜스 활동가의 맥락에서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를 바랐던 거겠죠. (아…,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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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혹은 퀴어 활동의 맥락에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쉬운 일이 아닌 건, 제 블로그 [Run To 루인]에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을 싣는 매체의 성격과 형식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 계획은, 리뷰를 쓰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인식론과 방법론를 밑절미 삼아, 콜린스가 한국어판 서문에도 밝혔듯, 이 책이 “배타적으로 흑인여성의 소유물로만 그치지 않”(7)고 “사람들과 대화를 촉진하는 논의”(8)로 활용하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문제가 있더군요. 이렇게 쓸 경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은 사람은 왜 이런 리뷰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사람들로선 황당하겠죠. “리뷰라는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단 한 번도 언급을 안 해? 도대체 이 리뷰와 책은 무슨 상관이지?”라는 식으로.

저의 욕심은 간단했습니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무관할 것만 같은 이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 고민을 풀어가는 데 있어 매우 소중한 조언이 될 것이란 것. 어쩌면 활동을 하고 공부를 하는데 등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 이런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봉합사 삼아 글을 풀어가기로 했습니다. 최근 제 고민들, 활동들을 엮고 꿰매는 봉합사로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리뷰하기. 한 가지 다행인 건 그 매체가 형식 자체를 따지진 않는다는 거죠. 글쓴이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거죠. 그래서 좀 편하게 쓰고 있습니다. 수필도 아닌 것이 논문도 아닌 것이 리뷰도 아닌 것이 일기도 아닌 것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형식으로.

그래도 걱정인 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나름 소심해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이고선 나중에 벌벌 떠는 타입이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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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옮긴이들에게 미리 변명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흐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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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쓴 관련 글
『흑인 페미니즘 사상』: 매우 짧은 리뷰
인용: 『흑인 페미니즘 사상』 + 이종태 기자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