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B. 앤써니란 이름을 통해 여권신장운동을 다시 떠올리다

수잔 B. 앤써니(Susan B Anthony). 기억을 믿을 수 있다면, 미국 초기 여권신장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만화로 쓴 페미니즘 역사책에서 이 이름을 읽었다. 무슨 역할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책의 저자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기록했다. 물론 그 책을 읽은 이후, 기존의 미국 페미니즘 역사가 백인 중심의 역사란 사실을 배웠다. 앤써니보다는, 혹은 앤써니의 역할만큼이나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배웠다. 실제 트루스의 글, “나는 여성이 아닌가”는 매우 감동적이다. (무리하면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좀 재밌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지식, 모두 몇 년 전의 일이다. 여성학/페미니즘이 나의 주요 전공 중 하나지만 트랜스젠더 이론과 좀 더 밀접한 글이나 책을 주로 읽는다. 트랜스젠더나 퀴어와 관련이 적은 글은 덜 읽는 편이다. 그래서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미국 구금시설의 역사 관련 글을 읽는데, 수잔 B. 앤써니가 등장했다. (이 이름을 읽으며 놀란 점. 내가 아직도 이 이름을 기억하다니!! 후훗. ;;;) 다시 등장한 앤써니는 유쾌한 모습이 아니었다. 1900년대 초, 노동계층 십대여성의 행동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하는데 앞장섰다는 내용이었다. 여권신장운동 초기에(소위 제 1의 물결이라고 불리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백인)여권운동가의 행동은 대체로 앤써니와 비슷했다. 그것은 정화운동이라고 부를만한 태도였다. 백인 중산층의 규범을 기준으로 다른 인종과 계급을 판단하고 처단했다. 십대여성이 ‘정숙’하지 않거나 성관계를 맺는다면 구금시설에 가두고 행동을 교정했다. 바느질하는 방법, 요리 등 가사노동 혹은 소위 ‘여성의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노동계급/비백인 십대여성을 관리했다.
여권신장운동 초기, 백인 여권론자의 활약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 분명 긍정적 역할도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의 일정 부분은 백인 중산층 계급의 이해에 맞아 떨어졌다. 흑인 여성 노예의 성적 ‘유혹’에서 백인 남성을 보호하기 위해 흑인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여권론자가 있었듯, 여권신장운동의 일정 부분은 특정 계급과 인종의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제한적 운동이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인종혐오, 계급혐오, 다른 말로 특정 인종과 계급의 이해에서 여권신장운동을 진행했으면서 그것을 유일한 여성운동으로 재현한 것이 문제다. 백인 중산층 여성이 아닌 여성운동가가 없었다는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문제다. 페미니스트가 순도 100%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일 수 없다. 아니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란 표현 자체가 허황되다. 그러니 여권신장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혐오발화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을 수 없다. 문제는 그 발화를 어떻게 기록하는가다.
아무려나… 이렇게 과거에 알았던 이름을 다시 만나면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확실히 즐겁다. 나의 배움이 매우 느려 몇 년에 한 번 업데이트된다고 해도, 예전 지식에 머물지 않았다고 자족할 수 있어 다행이고. ;;; 올해 안에 꼭 쓸 예정인데(공동으로) 구금시설의 역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관리하고 통제한 역사다. 그래서 재밌다.

트위터

고양이와 살고 있지만 그 흔한 고양이 관련 카페엔 가입하지 않았다. 카페에 가입하지 않는 건, 포털서비스의 카페에 가입하는 게 내키지 않고, 로그인에 바탕을 둔 카페 기능의 접근성 문제로 거부감이 있어서다. 고양이 관련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고양이 관련 카페에 가입하지 않는 건, 바로 그 정보가 싫어서다. 그 정보가 비록 훌륭하고 고양이와 동거할 때 상당히 유용하겠지만, 난 싫었다. 이른바 정보의 과잉에 허우적거릴 것만 같아서.

내가 고양이와 관련해서 얻는 정보는 종이책으로 출판한 책이 전부. 고양이 관련 정보를 다룬 책과 고양이와 생활하며 겪는 일을 그린 만화책. 종이로 출판한 책의 정보는 늘 두루뭉실하고 철지난 정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나의 고양이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정보들도 상당하다. 카페에서 얻는 정보가 훨씬 유용하리라. 그 유용한 정보가 싫었다. 귀얇은 나는 그 유용한 정보 하나하나에 괴로워하리라.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배울 수 있겠지만, 이게 싫었다.

난 그냥 나의 고양이와 살며 천천히 배우고 싶을 뿐이다. 너무 늦게 깨달을 수도 있지만 깨달음이란 언제나 철지난 정보니까, 괜찮다. 좀 모르고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것도 고양이와 동거할 때 나쁘지 않은 자세라, 그냥 천천히 알아가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트위터를 중단하기로 했다. 한동안 트위터를 즐겨 사용했다. 매우 많은 정보를 얻었고, 다른 곳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앎을 트위터에서 배웠다. 하지만 정보가 넘쳐난다. 버겁다. 몰라도 되는 정보는 없겠지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다. 트위터에 신경 쓰면서, 이곳 [Run to 루인]이 방치되는 것도 좀 속상한 일이고. 그래서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까 했다. 글을 쓸 땐 매우 중요한 트윗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계정 자체를 없앨까 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계정을 삭제하여 흔적을 모두 없애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쓸데 없는 내용도 많지만 아카이브(퀴어락)에서 함께 일하며, 이런 작은 기록들이 모두 중요하단 걸 배웠으니까. 너무 많은 웹기록들이 그냥 사라진 걸 확인하며 안타까웠으니까. 나의 트윗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느냐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없애진 않기로 했다. 그냥 지금 상태로 방치하기로 했다. 아주 가끔, 심심하면 로그인은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나는 늘 웹에 거주하고, 내가 신뢰하는 정보의 상당수는 블로거들이 생산하지만, 내게 편한 정보는 종이에 쓴 것들이다.

기록-기억: 2009년 7월 22일을 기억하는 한 방법

대여섯 살 무렵 살던 집에선 석유풍로로 음식을 했다. 풍로를 사용할 때마다, 석유를 채울 때마다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서일까? “휘발하다”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석유풍로가 같이 떠오른다. 아마, 석유와 휘발유를 헷갈렸기 때문이겠지. 정유소의 냄새는 싫지만 “휘발하다”란 단어는 좋다.
(비슷한 이유로, 사실 “풍로”보단 “곤로”란 말을 더 좋아한다.)

“기억이 휘발하다”라고 쓴다면 명백한 잘못이겠지. 하지만 이 표현을 좋아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를 바꿔가는 기억의 속성과 “액체에서 기체로 변하는 작용”이란 휘발의 정의가 닮았기 때문이다. 기억은 ‘왜곡’하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갈 뿐이다. ‘왜곡’이란 원본, 절대적인 진실을 가정하는데, 도대체 누구의 기억을 원본으로, 절대적인 진실로 말할 수 있을까? 모두가 “기억”한다는 점에서 “왜곡”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기억이자 기억의 시작이다.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변화때문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억 간의 간극을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기억이 어떤 식으로 휘발했는지 어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몇 가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사사오입보다 더 한 방식으로 미디어관련법이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이 와중에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금산분리정책 완화 법안도 통과되었음을 기록하자.
경찰이 시위를 진압한다고 테이져건을 쏘아 사람이 맞았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부산에서 폭우로 난리였을 때, 구의회 의원들은 해외관광을 떠났다는 사건도 기록하자.

이 외에도 기록할 일은 무수하다. 시발점으로서, 최소한 이 정도는 선별해서 기록-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