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부부 클리닉 – 사랑과 전쟁] 제 378 화 “내 남편에게는 비밀이 있다
방송 2007년 4월 6일 금요일 밤 11 : 15
극본 김 효 은
연출 박 효 규
출연 남편 (유석) : 이 석 우 , 아내 (선미) : 최 정 원 , 태준: 양 동 재

지난 서울여성영화제 기간이었다.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던(했던?) 한 활동가가 이 프로그램을 얘기했다. 한 번 보라고. 봐야지, 하면서도 벌써 몇 주일을 미루고 있다가 며칠 전에야 봤다. 뭔가 일이 밀려 있으니, 이런 식으로 도망간다고 할까. (프로그램 제목에 링크했음. 로그인만 하면 무료로 볼 수 있음.)

미리 말하면, 이 프로그램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자꾸만 창을 닫고 싶다는 충동. 한 장면 한 장면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뻔한 구성임인데도 아슬아슬하고 들키는 그 과정을 참기 어려웠다. 등장의 누군가와 이입하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내용 소개를 그대로 퍼 와서 내용설명을 생략하려니, 별 도움이 안 될 법해서, 간단하게 요약하면, 주말부부 유석과 선미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지만, 사이가 무난한 편. 근데 대전지역에서 일하는 남편이 서울로 다시 발령을 내려도 거절하고 계속 대전에서 지내길 원해서, 아내가 뒷조사를 하니, 남편은 호르몬 투여 등의 성전환을 바라는 트랜스여성이라는 설정. 그리고 뻔한데, 아내는 이혼을 거부하고 남편은 정말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자신의 몸이 끔찍하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루인은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수시로 이입과 밀려남을 반복했다.

내용을 설명하며 “뻔한데”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런 상황이 상당히 많다는 의미에서기도 하고,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는데 있어 언론에서 요구하는 방식(소위 “이야기가 된다”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전에 전해들은 한 얘기에서, 누군가는 트랜스젠더를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죽을 만큼 싫은데, 너무도 끔찍해서 절단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느냐”고.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몇 가지 방식 중의 하나인 이런 언설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고 말하고, 그리하여 이런 식으로 말해야만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승인”하는 구조. 그리고 이런 말들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죽을 만큼 싫다는 이들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굳이 수술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구조들.

이 프로그램의 구조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거울을 통해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말에야 비로소 아내는 어느 정도 체념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진성 트랜스젠더임”을 증명해야 만 비로소 수술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구조. 어떤 사람은 이 프로그램 속의 남편처럼 수술이 아니면 죽을 것 같고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괴롭다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이란 식으로만 나누지 않으면 별 상관이 없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고통을 전시하고, 고통을 통해 호소해야만 비로소 “진성”으로 받아들이는 그 맥락을, 이 프로그램은 얘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단 한 번 얘기하지 않지만(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맥락으로 사용함),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는, 동성애금기다. 동성혼 자체를 얘기하지 않음으로서 동성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그 구조가 너무 분명해서, “동성혼은 절대로 안 되니까,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건가, 하고 중얼거렸다. 며칠 전 커밍아웃과 관련한 글을 적으며 모든 트랜스젠더를 “이성애자”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하는 것의 의미를 살짝 언급하며 지나갔다. 어떤 자리에서 루인이 트랜스라고 커밍아웃을 하면 사람들은 루인을 당연히 mtf/트랜스여성이라고 간주하며(왜 사람들은 루인이 ftm/트랜스남성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은 걸까? 물론 이 이유를 짐작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부터 사용하는 수사는 “예쁘다”거나 “남자친구 있느냐”이다. 꾸엑!!! 이럴 때 루인의 커밍아웃은 무엇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에 존재하는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임을 커밍아웃한 걸까? 이런 이유로 루인에게 커밍아웃은 지금까지의 관계 방식을 지속하면서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얘기하자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모든 트랜스젠더가 “이성애자”는 아니고, “이성애”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음을 계속 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 얘기가 옆으로 세어 나갔는데, 어쨌거나 이 프로그램은 “동성애는 절대 안 돼!!”라는 부르짖음 같았다. 아직은 수술을 할 의향이 없는 레즈비언 트랜스여성과 “이성애”여성의 결혼이 불가능한 건 아닌데. 수술을 할 의향은 있지만, 여전히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할 수도 있고, 아버지가 반드시 “남성”이어야 하고 어머니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 건 아닌데. 공중파 방송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에 따라 구성한 내용이겠거니 하면서도, 아쉬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브로크백 마운틴, 유동적인 성정체성

※모든 리뷰는 스포일러를 가질 수밖에 없지요.

[브로크백 마운틴]을 즐긴 후, 정희진 선생님의 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산 [씨네21] 542호를 뒤적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관련 기사(안시환, 보편적인 인간들의 좌절에 대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가 있어 조금은 망설이면서도 읽었다. 후반부 즈음을 읽다가 당황했다.

에니스가 잭에게, 자신의 어릴 적 얘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아마 잭이 에니스에게 같이 목장을 경영하자고 말하는 장면에서라고 몸에 남아있다. 에니스는 어릴 적, 자신이 살던 곳에 ‘남자’ 둘이서 목장을 경영하던 곳이 있다고 했다. 누구도 진실은 몰랐지만 둘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실은 누구도 몰랐지만 소문은 있었다. 어느 날, 에니스의 아버지는 에니스와 에니스의 형을 데리고 목장 경영자 중 한 명이, 성기가 뽑힌 채로 죽어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아버지의 짓이고.

한겨레 기사는 이 장면을, ‘동성애’자로 소문이 난 사람을 죽인 건 에니스지만 아버지의 짓이라고 잭에게도 거짓말을 했다고 적었다. 바로 이 지점이 당혹스러웠다. 단순히 당시의 에니스의 나이가 10살도 안 된, 그래서 그렇게 살인을 하기엔 너무 어렸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루인은 에니스가 그 기억을 고통스럽게 상기하는 건, 그 기억이 자신의 동성애 욕망에 대한 강력한 금기로 각인되었기 때문으로 느꼈다. 즉, 에니스의 아버지가 두 형제를 데리고 간 건, 그 전부터 에니스가 이반queer임을 알았기에 그랬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행위는 에니스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고 그래서 이후 에니스는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산 것이다. 잭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엔 자기 안에 있는 강력한 금기가 너무 큰 것이다.

이 장면 때문에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루인의 기억이 정확한지 기자의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상관은 없다. 에니스가 죽였다면, 그건 더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에니스의 살인은 바로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 그 사람에게 투사한 결과니까. 과도한 혐오는 사랑하지만 바로 그 감정이 두려워 생긴 감정이니까. (이반/트랜스 혐오가 심할수록 그 만큼 갈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때 에니스의 아버지의 행동은 에니스의 행위에 대한 무언의 질책인지도 모른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 눈으로 봐라.”)

이렇듯, 금기를 가진 에니스와는 달리 잭은 영화 시작부터 너무 티가 났다. 그래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특히,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하는 방목 일을 맡기 위해 사무실에 온 잭이 차에서 내려, 에니스를 보곤, 차에 기대어 에니스를 유혹하려는 행동은 유치찬란하고 귀엽다고나 할까. 크크크. 그 모습을 ‘이성애’ 연애에서 상대를 유혹하는 모습처럼 느끼는 루인 때문에, 또 한 번 (비)웃었다. 이런 느낌은 마치 ‘동성애’/비’이성애’/이반/트랜스들의 연애는 뭔가 다른 코드가 있을 거란, 이른바 “동성애 코드”, “퀴어 코드”란 것이 있을 거란 환상에서 비롯한다. 이런 환상은 타자화와 대상화를 동반하는 폭력이며, 별나라의 외계인 취급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메종 드 히미코]를 즐기며 “너(사오리)가 아니라 ○○(페인트 회사 사장인데 이름을 잊어서;;;)가 부러워”란 말을 듣고 엉엉, 울었던 이유와 동일하다.)
(사실, 에니스도 그렇지만 잭 역시 처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의 시작부터 이런 모습이 너무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의 ‘이성애’결혼은 에니스의 ‘이성애’결혼과 더 이상 에니스를 만날 수 없음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한 행동으로 다가왔다.)

잭과 에니스가 태어날 때부터 이반이다 아니다, 의 논쟁은 상당히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이런 논쟁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지만 루인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와 같은 성애들은 이분법으로 나뉘는 젠더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하는데 타고난다거나 이다/아니다, 란 논쟁은 별로 유의미 하지 않다. 정체성이란 것이 확고하고 고정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으론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면서도 ‘이성’과만 연애를 하는 사람의 경험을 설명하지 못하며 대 여섯 살부터 이반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성애’결혼을 하고 손녀/손자까지 있는 육, 칠십대의 “노인”이 이반임을 깨닫고 비’이성애’ 동거 관계에 들어가는 걸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자체를 배제하는 경향도 있다.)

잭과 에니스는 처음부터 이반이었는데 둘의 만남을 계기로 그것을 각성했다거나, 처음엔 이성애자였는데 둘의 만남과 첫 관계를 가진 후에야 깨달았다거나 하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둘 다, 서로를 만나기 전부터 이반이란 느낌이 강하지만.) 이반/트랜스가 ‘이성애’-젠더 강제적인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제제기가 이반/트랜스는 ‘이성애’자와는 달라, (‘이성애’-젠더 억압으로 인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가 아니라)뭔가 독특한 코드가 있어, 라는 식의 언설이나 이런 식의 기대 모두 타자화하는 시선의 문제가 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이다.

※뭔가 결론이 이상하다-_-;;

[왕의 남자] ([황산벌]과 함께): 권력과 이성애적 ‘동성애’

부끄럽게도, 파일 공유가 가능할 때 까지 기다려서야 원하는 영화를 접하는 루인으로서는 드물게, 개봉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왕의 남자]를 접했다. 아침 9시 상영을 선택할까 했지만, 어제가 일요일인지라 내일 [청연]을 9시로 계획하고, 느긋하게 준비해서 오전 11시 35분을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간, 중간 찔끔찔끔 울다가 마지막엔 훌쩍거리며 울었다.

※당연히 스포일러 많아요!!!
[왕의 남자] 감독이 [황산벌] 감독이라고 해서 여러 날 전에 [황산벌]을 먼저 접했었다.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지만 흥미로운 영화라는 게 현재 남아있는 느낌이다. [#M_ 황산벌 계속 읽기.. | 황산벌은 접기.. | 흥미로운 점은, 알다시피 언어와 소통의 문제. 단일민족이란 환상을 가뿐하게 날려버리고 한국어란 환상도 깬다. “신라 말 정말 어렵다”는 대사나 “거시기” 뭔지 몰라 모든 한자를 다 조합하면서 해독하려고 하고, “거시기”를 알 때까지 공격 하지 못하는 상황은 코미디가 아니라 현실이다. 비서울지역 언어의 다름 때문에 생기는 오해와 “희화화”는 너무도 많다. 경상도 “사투리”의 억샌 말투로 인해 시비 거는 느낌이라고 말하거나 서울 “사투리”를 사용하는 ‘남자’를 “사내자식이 말투가 그게 뭐냐”며 재수 없게 여기는 반응은 루인에게 익숙하다. 오래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가가가가가”(그 아이의 성이 가씨냐)란 말을 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전라도 사투리는 언제나 조폭의 언어로 등장하고 [웰컴 투 동막골]을 통해 강원도 “사투리”는 2005년의 유행이 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내 편이란 공감대를 형성함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표준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만들고 그런 기준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말살하는 것이 근대국민 만들기임을 폭로한다.

[황산벌]을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느낀 건, 이 영화가 전쟁영화라서가 아니다. 전쟁 영화라도 성찰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다. (비록 전투 장면은 없지만 [용서 받지 못한 자]는 이런 성찰성과 윤리를 잘 드러낸다.) 루인은 성폭력으로 받아들였기에 차마 쓰고 싶지 않은 한 장면에선 싸움을 성애화한다. 이 영화가 비윤리적이란 감정으로 남게 했던 또 다른 장면은 김유신이 계백과 장기를 두는 장면. 공터에 장기판의 좌표를 그리고 실제 사람들을 세워둔다. 김유신과 계백이 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데 그들이 말을 움직이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도 같이 움직이고 말을 잡으면 마당의 사람 또한 이동하면서 상대를 정말 죽인다. 바로 이 장면. 장기 놀이를 통해 실제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은 너무 충격적이었는데,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게임에 중독 되어 실제 상황에서도 총기 난사로 몇 십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는 “해외토픽”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_M#]

이런 이유로 [왕의 남자]에 대한 기대는 복잡했다. 개봉하기 전부터 동성애와 관련 있단 입소문이 자자했고 감독은 권력에 관한 영화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작을 확인하고 싶어서 접했고, 그로 인해 동성애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가졌던 기대는 얼마간의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김태웅의 희곡집 [이爾]를 읽었다.

먼저, 녹수. 영화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녹수와 접하며, 이 영화는 ‘이성애’가 개입한 4각 관계 영화가 아니라 ‘동성애’ 3각 관계구나 했다-_-;; 녹수의 연산을 향한 “애정”은 연산을 향한 것이 아니라 연산으로 나타나는 권력을 향한 애정이다. 당시의 유교, 신분제, 젠더차별, 성차별 등등의 각종 억압이 난무한 상황에서 권력욕을 가진 녹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연산에게 “간택”되어 아이를 가지는 것. 그렇기에 녹수는 요부가 아니라 협상력을 가진 인물이다(이런 의미에서 [신돈]의 기황후 만큼이나 멋지다). 녹수가 공길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연산의 사랑이 공길에게로 이동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자신의 권력 기반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으로 읽었다.

공길, 장생, 연산 이렇게 셋의 관계를 적는 건 너무 진부할 것 같다. 실은 진부해서가 아니라 한 번은 더 접해야만 쓸 수 있을 것 같다. 일테면 연산의 권력을 가지고 싶음과 권력에서 벗어나고 싶음의 욕망은 편견으로서의 SM을 떠올리게 한다(그러니까 머리 벗겨지고 배나온 회장님, 정치인들이 마조히즘적 쾌락을 좋아한다는 그런..). 공길과 장생의 애정관계와는 달리 연산의 공길을 향한 애정은 좀 더 복잡하다. 연산의 왕이라는 계급과 공길의 광대라는 더 이상 낮아질 것도 없는 계급 사이의 거리. 공길의 놀이판을 따라하며 공길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연산의 욕망(녹수에게선 위로 받고 싶어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젠더로 읽을 때의 핵심적인 차이다)과 공길의 빗나간 화살에 놀란 후 입 맞추는 장면. 연산이 쓰고 공길, 장생 등이 연기한 중국의 경극을 통해, 그리고 공길에게 보여준 첫 그림자 연극을 통해 공길에게서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찾고 싶어 하는 욕망. 이런 복잡한 요소들로 인해 연산에게서 ‘동성애’적 욕망과 이성애적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 다시 접하고 싶고 그러고 나서야 셋의 관계를 좀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