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관계를 이야기하기: 나와 리카 고양이

어떤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는 건, 내가 이 생명과 혹은 이 존재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이제까지 무엇을 함께 하겠다고 하면서도 미뤘는지, 우리의 관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 사회에서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인식되거나 명명되는지를 깨닫는 시간이다. 특히 특정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해당 국가의 구성원으로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도가 특정 관계에 규정한 어떤 제약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행복할 때, 소위 건강하다고 말할 땐 알 수 없다. 아플 때 그리고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그랬다.
어떤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겪는다는 건, 애정의 고단함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함께 무언가를 적극 나눌 수 있을 땐 상대가 아파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상대와 어딘가를 함께 가고 싶은데 상대는 그럴 수 없을 때… 그리고 상대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긴장감, 그런데도 어떻게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울 수밖에 없다. 피곤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존재를 돌볼 수 있다는 건 내가 어떤 경제적 상황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병원비건 간병비건 뭘 해도 돈이 든다. 모든 게 돈이다. 사랑하니까 감수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해도 감당하기 힘든 문제다.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돈이 있어도 앞서 말한 괴로움과 피곤함은 남는다. 바로 이 순간 내가 상대와 어떤 삶을 나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와 상대는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있다.
눈치챘겠지만 나의 고양이 리카 이야기다. 리카가 조금씩 삶의 끈을 놓는 시간, 나는 참 멀리 있었다.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지 못 했다는 사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가 납득이 안 된다. 이게 문제다. 그때 상황을 내가 납득해야 하는데 나는 그 당시 내 행동을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때 있던 일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그때 꼭 그래야 했을까, 그때 나는 좀 다르게 행동할 수 없을까? 그때 나는 도망치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을 할 순 없었을까? 그런데 지금이라면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사랑한다고 믿지만 나는 정말 리카를 사랑했을까? 우리는 아니 내게 리카는 어떤 존재였을까? 우리는 어떤 관계였을까?
그래서 관계와 관련한 얘기는, 죽어가는 생명을 두고서 ‘이렇게 살려둬도 괜찮은지, 안락사를 시도함이 옳은 건 아닐까’를 갈등하는 찰나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삶을 나눌 땐 뭐든 좋을 수 있다. 죽어가는 시간, 아픈 시간은 관계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여기에 이 사회에서 사람과 고양이가 맺는 관계의 의미도 드러난다. 너무도 멀었던 화장장부터(고양이 화장장이라 멀었다기보다 죽음 자체가 삶의 영역에서 너무 먼곳에 위치한다), 사람이 죽었다면 며칠 알바를 쉴 수 있었겠지만 고양이여서 그러지 못 했던 상황까지. 삶의 곳곳에 배치된 죽음의 위계를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의 위계는 관계의 위계며 생명의 위계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죽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만나서 죽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죽음에서 만남의 시간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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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떤 일과 관련한 고민 메모입니다. 혹은 답장은 아니지만 답장과 비슷한 성격의 글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살기

종종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 서론에 나온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누군가가 정희진 선생님께, 너는 할 말을 다 하고 살지 않느냐고 했다는 에피소드. 이 사회의 비규범적 존재의 발화는, 두어 마디여도 규범적 사회는 시끄럽다고 느낀다. 참, 말 많다고, 할 말 다 하고 산다고.
블로그를 운영하는 나는 꽤나 많은 말을 떠드는 편이다. 정말 수다스러울 정도로, 때때로 트윗 하나 분량이면 충분할 얘기를 블로그 포스팅 하나 분량으로 쓰니까. 어떤 날은 할 말이 없는데 블로깅은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참 많은 말을 한다 싶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열 개 중 하나, 아니 백 개 중 하나도 못 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많은 얘기가, 내 안에 작동하는 많은 검열로 인해 그냥 묻힌다. 혹은 내가 너무 많이 떠들어서 남들이 얘기할 기회를 앗는 것은 아닐까라는 어쭙잖은 염려로 말을 삼가기도 한다.
이렇게 말을 망설이는 무수한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엔 늘 그때그때 말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주로 개별 관계 맥락에서 더 자주 작동한다. 특히 안 좋은 얘기보다 좋은 얘기일 땐 더 그렇다.
이를테면… 나는 나와 처음으로 산 고양이, 리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까워 한다. 정말 좋아했는데, 그래서 만날 “아웅, 예쁘다. 우리 오래오래 함께 하자”라는 말은 했지만, 정작 사랑한다는 말은 못 했다. 정말 사랑했는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못 했다. 무엇이 부끄럽다고.. 그냥 말 하면 되는 것을… 리카는 갑자기 아팠고, 나는 안타까워만 했다. 그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 그 순간에도..
혹은, 이곳에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는 간단한 생일 축하 인사였다. 그냥 어색한 말투로 생신을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원래 그날은 부산에 가서 같이 밥을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난 바쁘다는 이유로 부산에 가지 않았다. 그냥 전화만 했다. 명절에 볼 텐데라며 말을 아꼈다. 그냥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얼추 열흘 뒤,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말을 할 기회 자체가 사라지는 찰나. 어떤 감정의 관계였건 상관없이 뭔가 나눌 얘기가 있었을 텐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지는 않는다. 다 하고 살 수도 없다. 그럼에도 어떤 관계에선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물론 잘 못 한다. 아직도 많은 관계에서 좋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 못 한다. 그냥 간단하게만 말할 때도 많다. 그러지 말하야 하는데.. 적어도 블로그에 떠드는 만큼이라도 직접 전할 수 있어야 할텐데…

안녕, 리카

그리고 우리 만난지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우리 만나 함께 한 시간보다 너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길다. 아니, 우리 만나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아 그리워 하는 시간이 금방 더 많아지는 게 애통할 뿐이다.
리카, 안녕.
그곳에선 나 같이 어리석은 집사 없이 행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