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월.
저녁에 확인하니 밥을 거의 안 먹었다. 조금 깨작거리다가 말고 깨작거리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땐 그냥 하루 정도 입맛이 없나보다 했다. 고양이는 하루 정도 밥을 안 먹을 때가 있다고 어디선가 읽었다. 하루 정도 굶는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별 일 없다고 믿었다.
10월 19일 수.
밥을 거의 안 먹었다. 계속해서 몇 알 먹고 마는 수준이었다. 하루에 열 알은 먹을까? 아침에 새로 밥을 주면 다음 날 아침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맛동산도 평소에 비해 현격하게 줄었다. 평소 1/3 수준? 혹은 그보다 더 적은지도 몰랐다.
뱃살과 볼살도 줄었다. 잡아 당기기 좋은 뱃살과 볼살이 줄어 잡아 당기는 맛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더럭, 겁이 났다. 그냥 하루 정도 밥을 안 먹는 수준이 아니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리카를 통해 배우지 않았나…
10월 20일 목.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밥을 먹은 흔적이 없었다. 아니, 몇 알 정도는 먹었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밥을 먹었다고 하기 힘들다. 아예 굶은 것인가? 캔사료라도 사먹일까,라는 고민을 했다.
리카가 비쩍 굶은 상태로 떠난 모습이 떠올랐다. 리카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렇게 좋아한 아미캣을 넉넉하게 줄 걸,하는 후회를 했다. 이렇게 일찍, 비쩍 마른 상태로 떠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고기라도 한 번 정도 줄 걸,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리카에겐 육식의 기억이 있었다. 출산 후 콩단백을 줬을 때 무척 잘 먹는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곡기를 끊기 시작할 때 뭐라도 억지로 먹일 걸,하는 아쉬움… 그래서 바람에게 캔사료라도 먹여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캔사료는 어지간하면 고양이가 다 좋아한다니까… 이런 속설을 믿기로 했다.
리카가 떠난 후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 공포일 줄 몰랐다. 나도 내가 이런 일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반응을 할 줄 몰랐다. 바람이 밥을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이지만, 매우 적은 양이지만 깨작거리긴 했다. 하지만 리카가 밥을 안 먹기 시작할 때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첨엔 조금씩 먹었다. 조금은 먹었다. 그러다 밥을 아예 끊었다. 아니,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바람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 캔사료를 구매했다. 혹시나 하여 콩단백도 구매했다. 집에 와서 콩단백에 익혀 줬더니 조금 먹었다. 아니 입에 조금 대는 수준이었다. 약간 뜯어 먹더니 관뒀다. 난 조급했고 캔사료를 땄다. 캔사료와 아미캣을 잘 비벼 바람에게 줬다. 캔사료를 딸 때 냄새가 진동했다. 바람이 달려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둘을 섞어 줬을 때 바람이 열심히 먹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바람은 외면했다. 난 아미캣을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융과 바람은 다른 사료를 먹고 있다. 바람에겐 아미캣만 줘서 바람이 화가 난 것일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래서 캔사료만 줬다. 먹길 희망했다. 바람은 냄새를 킁킁 맡은 후 외면했다. 바람은 캔사료를 먹으려 들지 않았다.
캔사료와 아미캣을 비빈 사료를 놓아두고, 밤 사이 먹길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더디 왔다. 더딘 시간, 난 최악의 상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걱정을 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일이, 멀리 있는 일이 아니기에 뭔가를 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모든 상황이 갑자기 무섭고 낯설었다.
10월 21일 금.
아침에 일어나 사료를 확인했다. 잠들기 전과 같았다. 입을 안 댄 상태였다. 마지막 수단이란 심정으로 R님이 준 사료를 조금 줬다. 바람은 냄새를 맡더니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사료를 까드득, 아그작 먹는 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났다. R님께도 고마웠다.
알바를 하는 동안 온갖 상상을 다 했다. 하지만 병원에 곧장 데려가길 망설였다. 입원 트라우마때문이다. 병원에 데려가는 것이 정말 잘 하는 일일까? 망설였다. 바람을 병원에 데려가서 진단 했을 때, 건강하다는 진단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입원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을 때 난 입원에 동의할 수 있을까? 리카가 입원했을 때를 떠올리며 망설이거나 집에서 치료할 수 있길 바라겠지. 리카가 입원한 병원은 분명 괜찮은 곳이지만, 입원한 다음날 리카가 쓰러져 있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것이 입원 탓은 아니지만, 집에 있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두 발로 서지도 못 하고 쓰러져 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입원실의 오래되고 역한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 입원을 통해 리카가 겪은 트라우마와 내가 겪은 트라우마를 다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입원을 시키면 나을 가능성이 높지만 집에서 치료하면 그 가능성이 애매하다고 할 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입원을 결정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우선 전화로 문의했다. 의사가 아니라 직원과 상담했다. 직원이 말하길, 밥을 깨작거려도 설사를 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없다면 일시적으로 입맛이 떨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 더 지켜보라고 했다. 그러며 간식 같은 것을 주라고 했다. 전화를 끊으며 기분이 복잡했다. 직원에게 할 얘기는 아니지만 리카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리카는 마지막까지 대변을 볼 때 맛동산을 생산했다. 아울러 내게 고양이가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앞둔 행동이다. 바람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회의가 있어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여는데 거실에 무슨 흔적이 있었다. 직감했다. 아미캣을 토한 흔적이란 것을. 순간,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토한지 얼마 안 지난 형태였다. 뭔가를 먹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하며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밥그릇을 확인했다. R님이 준 사료와 아미캣을 같이 뒀는데, 아미캣을 더 많이 먹었다.
잠들려고 누웠을 때, 바람은 뭔가를 먹기 시작했다. 까드득, 까드득.
10월 22일 토.
아침에 밥그릇을 확인했다. 아미캣만 많이 비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사료를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밥을 먹겠다는 의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일.
종일 수시로 밥을 먹었다. 많이 먹지는 않지만 조금씩, 수시로. 난 바람이 밥을 먹을 때마다 꼼짝 않고 있었다. 행여나 내가 움직여 바람이 밥을 안 먹을까봐…
+
딴소리지만, 일전에 누군가 내게 질문했다. 동거묘에게 육식사료를 준 적도 없으면서 채식사료만 먹이는 것은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 아니냐고. 그것은 묘권 침해이지 않느냐고. 농반진반이었지만, 난 그때 별다른 대꾸를 안 했다. 딱히 할 답변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대답할 수 있다. 바람은 채식사료를 더 선호한다고. 뭐, 더 정확하게는 아미캣을 더 선호하는 것 뿐이지만. 흐흐. 바람은 채식주의 고양이가 아니라 아미캣주의 고양이입니다. ;;
아미캣에 마약 탄 게 확실합니다. -_-;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