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저녁 7시. 서울여성영화제[Wffis]의 부대행사인, 섹션포럼 “퀴어 레인보우: 성 정치학, 그 사이에서“에 참석했다. 이 포럼에 가려고 다른 영화 일정을 모두 조정했을 정도. 기대했던 건, 발제문에 대한 궁금함이 아니라(발제문은 이미 예전에 받았으니까) 토론자들의 논평과 플로어 토론이었다. 뭐, 결과적으론, 의도하지 않게 내부자 토론이 되고 말았지만;;; (루인의 만행이었음 -_-;; )
아무튼 포럼이 끝나고 나오는 자리에서, 예전에 한겨레21에 쓴 글을 읽었다며 말을 걸어온 분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초면이고 어떤 의미에선 초면이 아닌데,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분의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 비록 매개해서 알게 된 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초면도 아니면서 구면도 아닌 분과의 만남. 소개를 하고 잠깐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반지를 선물 받았다. 그날 루인이 그 자리에 참석할지의 여부를 몰랐을 테니, 그저 순간적인 판단이었을 듯.
반지를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지난 2월 달이었나. 다른 때보다 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 반지를 하나 사야겠다고 했었다. 그러며 몇 곳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서 관뒀던 흔적이 몸에 있다. 반지를 사야겠다고 한 건, 일종의 봉인이자 자기 다짐의 표시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엔 그런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믿을 수 없는 인터넷 운세에 흔들릴 정도로 취약했던 그 시기에, 반지를 맞춰서 몸의 어떤 상태를 봉인해버리고 싶었다. 결국 마땅한 반지를 못 구했고 부산에 내려가고 하다보니 어물쩡 지나갔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반지를 선물 받았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손가락에 끼웠다.
사실은 그땐 몰랐는데, 왜냐면 반지 사이즈가 딱 네 번째 손가락에 맞았기에 그랬는데,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는 약속의 의미라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우울증적 대상을 향한 약속일 수도 있고 우울증적인 자신을 봉인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결국 자기 약속이면서 동시에 자기 봉인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금에 와서 무엇을 약속하려는 것이며, 무엇을 봉인하려는 것인지 의아하다. 약속이나 봉인이나 결국 같은 말이고, 굳이 봉인을 하지 않아도 몸은 어떤 의미에서 봉인된/한 상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