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술 안 한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그리고 주절주절

01
어찌된 조화인지 4시간 전에 퇴고한 글을 퇴고했더니, 고칠 부분이 와르르 쏟아지더군요. 크릉. 이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4시간 전의 퇴고는 날림이었을까요? 아님 그만큼 고칠 부분이 많은 글이란 의미일까요? 아무려나 퇴고할 부분이 많다는 건, 좋은 겁니다. 아무렴요. (우헹 … 울면서 달려간다.;;;)

이제까지 글을 쓰고 나면 항상 혼자 검토한 후 발송했는데요, 이번엔 누군가에게 미리 논평을 받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일단 청탁한 곳에 파일을 보낸 후 몇 사람에게 원고를 줘서 논평을 받고 수정한 후 다시 보내는 거죠. 하하. 청탁한 곳에선 일단 원고가 들어오면 안심을 하니, 완성도가 좀 떨어져도 보내는 거죠. 그러고 나서 최종 마감일을 확인한 후 그 며칠 전에 다시 보내고요. 근데 논평을 받고 싶은 이들이 모두 바쁘다는 것! 흑흑. 뻔뻔하게 괴롭힐 것인지 그냥 자숙할 것인지 며칠 더 고민한 후 결정할까 봅니다.

02
블로그 검색유입을 확인할  때마다 깨닫지만 제가 쓴 글은 “나를 증명할 길은 수술뿐인가”(http://bit.ly/6kW9U)뿐인 거 같아요. 으흑. 나름 글을 많이 썼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검색하는 글은 저것. 그래서 꼭 제가 저 글만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죠. 흐흐.

사실 저 글은 다른 어떤 글보다 많은 독자를 가진 매체에 실렸고, 읽기 수업의 교재(무려시중에 판매한다는;;)에 재수록 되기로 했으니 그런 거라고 믿고 싶어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 글이 유일하게 읽을 만한 글인지도 몰라요. 끄아악. ㅠ_ㅠ 뭐, 어쨌든 한 편이라도 읽을 만한, 사람들이 찾는 글을 썼다는 것 자체로 만족해야 할까요? 아무려나 찾아 주는 분들에겐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매체에 발표한 글이 유일하게 찾는 글이라는 건, 왠지 쓸쓸하기도 합니다. 이건 성장에 강박적인 저 자신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으니까요. 반성해야죠.

03
그나저나 이번 글쓰기는 나름 재밌는 부분이 있어 좋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으면 다른 사람들에겐 별로일 가능성이 높지만요. 으흑. 전체 분량 중 후반부는 앞으로 특강 갈 때 꽤나 유용하게 사용할 부분이기도 하고요.

참, (예전에 한 번 언급했듯)지난 주에 특강을 했었는데요. 제게 특강 기회를 꾸준히 챙겨주는 선생님의 수업이었습니다. 그 분과도 꽤나 죽이 맞는 편이라 종종 재밌는 상황을 연출하곤 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제 이성애혈연가족을 제외하면 커밍아웃이건 아웃팅이건 개의치 않는데요. 사실 ‘아웃팅’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특강을 할 때면 종종 눈치를 챌 수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대부분은 못 알아듣고요. 하지만 특강이 끝난다고 끝은 아니죠. 그 다음 시간에 선생님이 저를 트랜스젠더라고 소개합니다. 그럼 수강생들은 난리가 나죠. 정말 몰랐다고,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하하.

이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가 소비되는 방식과 관련 있죠. 더구나 어떤 의료적 조치도 취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는 상상하지 않으니까 더 그렇죠. 그래서 저를 한 번 보고 난 후, 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한다고 합니다. 이건 제가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고요. 그 선생님이 나중에 들려주는 부분이죠. 저를 한 번 본 후, 나중에 제가 트랜스젠더란 걸 알고 났을 때 달라지는 트랜스젠더 이미지. 그래서 전 이걸 선생님과 협의해서 전략적으로 사용하면 어떨까, 상상하고 있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그렇게 트랜스젠더 이미지를 달리한 사람들에겐 부작용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트랜스를 알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드무니까요. 그래서 수술 안 한 트랜스도 있다고 말하면 주변에선 “에이 설마?”라고 반응하니까요. 뭐, 어쨌든 그건 제가 감당할 몫은 아니고요. 😛

이번에 쓴 글은 바로 이런 부분과 관련 있습니다.

04
다음 달 말이면 다시 수입원이 하나인 알바 인생이 됩니다. 아슬아슬한 인생이 도래하네요. 현재로선 나름 투잡 인생이거든요. 으하하. 사실 제 직업은 매우 많지만, 고정 수입이 들어오는 직업은 비정규직 하나, 알바 하나죠. 그래서 가끔은 이 둘이 제 직업 같기도 해요. 에헤헤. 그 중 비정규직은 다음 달로 끝. 문제는 알바인데, 이게 부동산 경기와 관련 있다고 합니다. 나 이사도 가야 하는데! 어찌하여 부동산 경기는 제 알바와 이사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거냐고!!
 
암튼 12월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군요. 꽤나 위태롭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위태로우니까요. 🙂

불안한 현재를 담보로 판매하는 미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기

카페에 있으면 이어폰을 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유난히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마련인데. 지금 바로 앞에서 보험설계사가 고객과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다. ㅡ_ㅡ;; 카페에 지금 나와 보험설계사 일행 밖에 없어 설계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잘 들리기도 하고. 암튼 그 얘길 듣기 싫어 이어폰을 끼긴 했는데.
(문득 카페 같은 곳에서 설계사의 목소리는 큰 편이 좋을 거 같다. 설계사의 입장에서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대상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고객만이 아니라 카페에서 우연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들도 포함하니까. 그러니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 설계사의 입장에선 어쨌거나 성공이다.)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하면서, 요즘 들어 좀 안정된 직종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계기는 간단하다. 학회일은 11월로 끝나고 저녁 알바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두 가지 일을 해야 생계 유지가 가능하기에 어느 하나만 끝나도 위기가 온다. 그래서일까? 아직 끝나지도 않은 11월을 대비해서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늘만 쳐다보는 꼴인가? 큭큭.

암튼 이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좀 안정된 직장이나 돈벌이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생계를 유지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면 충분하니까 수익 많은 직종은 바라지도 않고! 근데 이런 바람과는 별개로 난 정규직에 취직하고 싶은 바람은 없다. 으하하. (정규직으로 뽑히긴 할 것이냐는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하자. ㅜ_ㅜ) 그리고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싶지 않은 바람의 상당 부분은 국민연금에 가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좀 웃기겠지만 정말이다. ;;;

어렸을 땐 국민연금이 좋은 건 줄 알았다. 정년퇴임할 때까지 국민연금을 내면 은퇴한 후 월급의 80% 수준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유럽 식의 국민연금은 꽤나 괜찮았다. 실상은 몰라도, 표면적으론 그럴 듯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한다고 했을 때 좋게만 느꼈다. 그럼 요즘은? 국가 공권력을 이용한 갈취로 파악하고 있다. 뚜렷한 이유는 없지만, 자동가입에 가까운 제도와 원천징수는 내게 갈취 이상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울러 최초 약속만큼 돌려 주지도 않는다면 이건 사기잖아. 기업과 소비자로 치면 기업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약관을 일방적으로 바꿔선 소비자에게 통보하는 것과 같다. 이건 불공정거래다.

물론 반드시 이런 이유만으로 정규직이 싫은 건 아닐 테다. (어떤 의미에서 난 학생–학교에 다니진 않아도 학생이다–과  활동가란 측면에서 정규직이기도 하다. 수입이 없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규직이긴 하다;;;) 사실 정확하게 무슨 이유로 정규직이 싫은 건지는 나도 모른다. 프리터를 무척 매력적인 노동 방식으로 느끼는 이유 역시 알 수 없다. 반드시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난 이게 “책임감”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느낀다.)

암튼 보험설계사가 열심히 상품을 판매하는 얘길 잠시 듣다가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좀 안정된 미래를 바라는 욕심과 보험이나 연금 같은 건 결코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의 공존이 그것이다. 보험이란 게 불안정한 미래를 인질 삼아 현재의 수익을 담보하는 거 아닌가?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함으로 바꾸고 그 불안을 가중해서 상품을 판매하는 희망장사. 혹은 절망장사. 그러니 좀 안정된 수입을 바라는 나의 욕망과 보험상품을 구매(근데 이걸 왜 “가입”이라고 말하는 걸까?)하는 행위는 유사한 것이 아닐는지. 11월 말 학회일이 끝날 즈음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게 미래인데, 안정된 수입을 바라는 욕망은 보험을 구매하려는 욕망과 얼마나 다를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 시대는 현재를 불안이란 용어로, 미래를 꿈과 희망이란 허황된 용어로 포장하여 잘도 판매하는구나 싶다. 이것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겠지.

통장에 잔고가 없어도 평생을 놀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