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트랜스혐오/비하 발언 + [성명서]

시민논객 질문: 노회찬 대표님께 질문. 지난 13일에 이명박과 황석영씨가 동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일에 대해서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을 많이 비판을 하고 있는데, 제가 볼때는 비판할 것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사회 통합적인 문제로 봤을때, 비판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 면도 있다고 본다. 생각은?

노회찬: 황석영선생은 노벨문학상 후보 거론될 정도로 한국 대표 지성이다. 이런분이 말년에 정치적 입장이 국민이 납득하기 힘든 빠른 시일 내에 쉽게 바뀌는 것 바로 진중권교수가 지적했지만 반엠비 연합을 외치고 구 여당 후보 지지했던 사람이 그런 사실이 포멧이 된것같고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것을 보면서, 일관성을 결여한 모습에서 대표적인 지성이 상당히 우리 국민들이 혼란을 느끼고 심적 타격을 받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부분 때문에, 우리 사회 미친 손실이 크다고 본다. 다만 그분이 이야기 한 것 중에, 부분부분은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다. 민주노동당 뿐 아니라 진보신당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되는데, 거대 노조 앞에서 발을 못붙인 것이나 민주당에 대한 지적도 예리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에 대해서는 상당히 슬프다고 생각된다.

시민논객: 제 생각에는 황석영씨 같은 분들이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가고 또 보수였던 분들이 진보로 넘어가게 된다면, 이런것을 서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모습들 속에서 보수와 진보가 서로 균형을 이루는 작업들을 하게 된다면 보수와 진보가 맨날 갈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노회찬: 저는 국회 법사위 있을 때도,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제가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체 웃음)

녹취: 캔디.D

위의 내용은 2009년 5월 15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이 한 말이다. 백분토론엔 관심이 없어 그날은 몰랐다가 오늘에야 알았다. 이 글을 읽고 정말 많은 고민이 교차했다. 6~7가지의 고민이 동시에 들었지만, 그냥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더 이상 나 하나의 개인으로 읽히지 않는 상황에선 말을 덧붙이는 게 부담스럽다. 더욱이 말이 어떻게 유통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선 더 그렇다.
(얼마 전엔 나도 모르는 일을 내가 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났다는 걸 전해 듣기도 했다.)

그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이제까지 ‘걔네들’이 불쌍해서 시혜를 베푼거냐”라고 중얼거렸다는 건 기록하자.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회찬이 이런 말을 했다는 데 놀라지도 않았고 실망 혹은 그와 비슷한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는 것도
기록하자.

그냥 지렁이에서 발표한 성명서만 덧붙이기도 하자.

<성명서>
 

노회찬은 100분 토론에서의 성전환자 왜곡 발언을 사과하라!

 
지난 2009년 5월 15일 문화방송에서 방영된 《MBC 100분 토론》에서 한 시민 논객이 “진보에서 보수로 넘어가고 또 보수였던 분들이 진보로 넘어가게 된다면, 이런 것을 서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모습들 속에서 보수와 진보가 서로 균형을 이루는 작업들을 하게 된다면 보수와 진보가 맨날 갈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라는 질문을 하였고, 이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저는 국회 법사위 있을 때도, 성전환 하는 분들, 소수자들의 권리를 제가 옹호해온 사람인데, 국민 다수가 그렇게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는 답변을 하였다.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이하 지렁이)는 노회찬 대표의 적절치 못한 비유와 성전환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곡해할 수 있는 답변에 깊은 우려를 감출 수가 없다. 노회찬 대표는 답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17대 국회 의정활동 당시 성전환자성별변경관련법제정을 위한 공동연대(이하 공동연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성전환자성별변경관련 특별법안을 발의하는 등, 활발한 친성소수자 입장을 수차례 표명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긴 시간동안의 연대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날 토론에서 노회찬 대표가 발언한 내용은 성소수자, 특히 성전환자에 대하여 그 동안 그가 정당의 정치적 입장 표명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현실적 상황에서 성전환자들의 삶에 대해 얼마만큼의 감수성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인의 입장, 혹은 진보신당의 입장과는 별개로, 이러한 ‘국민 다수가 성전환 하는 것은 곤란’이라는 것은, 성전환/자를 희화화의 대상으로 사용한 것이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사용하였음이 너무도 명백하다.

우리는 노회찬 대표에게 다음의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왜 국민 다수가 성전환을 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지렁이는 성전환의 수가 다수인지 소수인지에 따라 옳고 그름의 평가 기준을 달리하는 다수주의를 경계한다. 또한 지렁이는 사회의 경직된 사고가 사회적 다수 집단에서 배제된 소수를 비정상 혹은 문제적인 존재들로 낙인찍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 노회찬 대표가 곤란하다고 본 지점이 어떤 ‘다수’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떠한 의미였다 하더라도 그의 발언은 성전환자를 억압하는 가치관과 유사하여 ‘곤란’하다.

  둘째, 진보/보수의 논쟁과 성전환자의 전환과정은 서로 비유가 될 수 없는 매우 다른 문제 이다. 성전환 과정은 정치적 이념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는 개인의 젠더 정체성과 관련 있는 문제이며, 또한 개인의 몸의 변화, 사회적 인정, 차별, 배제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성전환을 정치적 이념과 비유하여 사용한 것에 대하여 지렁이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오는 5월 30은 제 10회 퀴어문화축제이다. 노회찬 대표는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지지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때의 지지발언을 하던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길 바라며, 지렁이는 15일의 발언과 관련하여 진보신당과 노회찬 대표 개인의 성전환자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표명하고, 사과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2009년 5월 17일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

[다큐] 레오 N이란 사람

01
예전에 활동정리 글을 쓰면서 인권영화제(자세한 건 여기)에 상영할 영화 한 편과 관련한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그땐 전화만 한 통 받았기에 자세히 적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루인도 미처 깨닫기 전에 일은 진행 중이었고, 어느 새 루인이 한다고 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막 감수와 소개하는 글 쓰기.

지난 월요일인가, 영어 자막을 받았고, 수요일 영화 DVD 사본을 받았고, 어제 한글 번역 자막을 받았다. 아무튼 루인이 담당할 영화는 [레오 N이라는 사람 The Person de Leo N](당연히 제목에 주소 링크했음). 5월 20일 일요일 오후 6시 40분과 5월 23일 수요일 오후 1시, 이렇게 두 번 상영한다고 한다. 홈페이지에서 상영일정표를 확인하면 알 수 있듯, 일요일 상영시간에 감독과의 대화가 있다고 나와 있는데, 감독과의 대화가 아니라, 영화 및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대화”의 시간을 루인이 담당하기로 했다. (시간 괜찮은 분은 많이많이 오세요. 🙂)
※방금 확인한 건데, 입장이 무료라고 한다!!! 당연히 선착순 입장이고;;;

02
자막 감수라고 해봐야, 특별할 것은 없었다. 영어로 얼추 읽었기 때문에, 영어와 한글을 대조하면서 검토하는 작업 정도. 번역하신 분이 꼼꼼하고 맥락을 잘 짚으면서도 가독성 있는 문장으로 쓰셔서, 그저 읽기만 해도 될 정도였다. 그저 몇 가지 단어가 걸려서 수정을 요구한 정도.

사실, 몇 가지 갈등 지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영어 자막엔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나오는 걸, 한글로는 성전환 혹은 성전환자로 번역한 것. 루인의 입장에선 트랜스섹슈얼과 성전환/성전환자는 상당히 다른 의미라서 이런 식으로 번역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다시 트랜스섹슈얼로 바꿀 수도 없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면, 그래서 두 용어들을 번역어 관계로 사용하기 힘들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니라면, 어느 쪽이 좋을까를 갈등했다. 동시에 성전환/성전환자란 단어는 주로 의학계나 법조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고,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선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보다는 트랜스젠더 혹은 TG/티지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그냥 성전환자로 가기로 했다. 이유는? 없다. -_-;;; 케케. 이 다큐는 이탈리아에서 찍은 건데, 이탈리아에서의 용어를 둘러싼 논의를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뭐라고 쉽게 넘겨짚기가 힘들고, 성전환자란 용어를 의학이나 법학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른 식으로 사용하고픈 고민이 있어서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다.

가장 당황했던 단어는 meta-sexuality. 당연히 사전에는 안 나오고, 구글에서도 몇 페이지 검색이 안 되는 단어. 영어자막만 받았을 땐, 어떻게 번역할까 고심하다가, 그냥 메타-섹슈얼리티로 메모했는데, 한글 번역 자막엔 “성초월”로 적혀 있었다. 성초월? meta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성초월이 적절한가로 갈등했지만(성변화, 성너머 등을 고민했는데), “성초월”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그 단어를 읽었을 때, 어쨌거나 의미를 가장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론 만족스러운 번역은 아니지만 마땅한 언어가 없는 셈이다.

03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담당자는 [레오 N이란 사람]과 [Un/going Home] 두 작품 중에서 고민하다가, 이 작품을 골랐다고 했다. [Un/going Home]의 경우,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 그 분인 것 같아, 인디포럼으로 상영하는 일요일에 보러 갈 예정인데, 어쨌거나 두 가지 작품을 모두 볼 수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인권영화제 홈페이지엔 이 영화 소개를,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어머니를 찾아간다고만 나와 있는데, 영화를 읽고 나면, 이 정도 소개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중얼거렸다. 뭐, 어차피 볼 사람만 볼 테고, 볼 사람은 볼 테니까 상관없겠지만;;;

다큐를 읽으며 꽤나 흥미롭다고 느꼈던 건, 세 가지 측면에서였다. 우선 데 레오 니콜은 연극배우이기도 하다(연극의 연출자가 “성초월”이란 말을 사용한다).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렇게 만난 누군가가, 젠더를 옷을 골라 입듯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이 다큐는 성전환을 일종의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 계속해서 연극 무대에서 연습하고 옷을 바꿔 입고 가발을 바꿔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이런 식으로만 구성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건, 이런 과정을 성전환수술을 준비하고 수술 하는 장면과 교차 편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연극을 상연하며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주인공은 “남성”역과 “여성”역을 모두 담당한다) 성기재구성수술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순간, 젠더를 선택해서 무대 위에서 상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에 균열을 일으킨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과 연극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교차하며, 젠더를 단순히 무대에서 상연하고 선택하는 것이란 식으로 말할 수는 없는 어떤 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레짐작 하고 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아무래도 성전환수술을 한 후 엄마를 찾아 가는 장면. 전화상으론 항상 싸우고, 엄마는 레오가 찾아오는 걸 두려워 하지만, 정작 찾아 갔을 때의 반응은 다르다. 이 부분의 편집이 꽤나 재미있다. 아, 엄마에게 가는 장면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트랜스젠더의 성전환을 얘기하며 흔히 말하는 이주서사로서의 의미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 및 그 관계들과 소통하는 것으로 다가왔다.

04
하지만, 어제 밤, 이 다큐를 봤을 땐 자막도 없는 영상으로만 봤다는 거-_-;; 내용이야 얼추 다 알고 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재생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 건지, 영어 자막조차 안 나와서, 맥락 따라가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니 몇 번 더 봐야 할 듯. 그러고 나면, 정작 “감독과의 대화” 시간엔 이 영화를 비판할 지도 모른다는 거 ;;;; 케케.

아무려나, 많은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아메리카]가 꽤나 괜찮은 영화라면, 이 다큐는 [트랜스아메리카]보다 좀 더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다시 확인해야 하고, 나중에 어떻게 말을 바꿀지 알 수 없지만. 🙂

책이 나오긴 나오려나

작년 말부터, 아니 작년 가을부터 책 나온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말이 쏘옥 들어갔다. 책을 기획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바쁘고 그러다보니 책을 위한 글쓰기를 비롯해서 여러 작업의 진행 속도가 더뎠다. 그러다 최근 다시 모임을 가졌고, 책에 들어갈 글 몇 편의 초고들이 편집장에게 넘겨졌다. 기획팀은 서울여성영화제 때 책을 출판하고 싶어 하지만 편집장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며 대신 그 시기에 홍보 팜플렛을 뿌리자는 제안을 해왔다.

그 책엔 두 편의 글을 실기로 했다. “번호이동 혹은 성전환”과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

“번호이동 혹은 성전환”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에서 주민등록제도의 의미를 질문하는 글이다. 주민등록제도 당시에 왜 하고 많은 방식 중에서 성별이분법을 핵심적인 기준의 하나로 설정했는지와 같은 질문의 대답은 후속작업으로 돌렸지만-_-;; 트랜스젠더에게 신분증이라는 것이 신분을 증명하는 제도가 아니라, 신분을 배신하거나 부인하는 제도라는 것을 말하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변경이 단순하게 기존의 국가체제에 편입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음을 얘기를 하고 있다. 당연히 아직도 글은 미숙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하지만, 이 말의 의미는 그 정도면 무난하지 않겠느냐, 기획 의도는 살리고 있지 않으냐란 의미이지 잘 썼다는 의미는 아님을 알고 있다.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는 게이, 크로스드레서 그리고 mtf 트랜스젠더 사이의 긴장 관계를 다루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글이다. (책에는 부치와 ftm/트랜스남성 사이의 긴장을 다루는 글도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인터뷰와 루인의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긴장관계가 있다 없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정체성을 명명한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규범적인 틀을 만들고 그리하여 게이는 이러이러하고 크로스드레서는 이러이러하고… 라는 식의 획일적인 모습을 만드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 동시에 게이나 크로스드레서였던 mtf 트랜스젠더의 경험이나, 게이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는 존재할 수 없는 부재로 만들어 버림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의는 조금도 새롭지 않지만(Jacob Hale을 비롯해서 몇몇 관련 논의들이 쉽게 떠오를 수도 있다) 새롭거나 재밌게 여기는 맥락이 루인의 주변엔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루인의 이런 설명이 자칫 “이성애” 트랜스젠더보다는 퀴어 트랜스젠더를 더욱더 선호하는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1998년도에 나온 루빈(Henry Rubin)이나 2000년에 나온 나마스테(Vivian Namaste)와 같은 몇몇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들은 트랜스젠더 이론이 퀴어 이론이 수용할 수 있거나 선호하는 방식으로 발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은데, 기묘하게도, 트랜스젠더 이론을 다루는 책 한 권 발간되지 않았고 관련 논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임에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퀴어라는 어떤 범주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트랜스젠더를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트랜스젠더를 끊임없이 젠더 이분법에 문제제기하는 존재로 여기고 싶어 하고. [따로 쓸 내용이지만, 트랜스젠더는 젠더를 초월한다는 말이나 젠더를 강화한다는 말이나 사실은 같은 내용이다.] 사실, 루인 역시 퀴어와 트랜스젠더가 겹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이런 식의 설명은 퀴어와 트랜스젠더는 어쨌든 따로 구분해서 존재한다는 걸 전제한다는 점에서 모순어법이지만, 이는 루인은 언제나, 기존의 언어체계에서 모순어법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모든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라는 식의 인식이 팽배하기에, 이 글의 내용을 끊임없이 주장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이런 분위기들 때문에 마냥 편하지는 않다.

다른 한편 이 책에 실릴 글의 저자들을 따졌을 때, 이른바 “당사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7명 중 두 명이다. 이런 구분이 상당히 코미디처럼 작동하고 있다.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라는 글의 초고를 처음 가져가서 들었던 논평 중엔 “루인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란 내용도 있었다. 이 말은 의도하건 하지 않건 루인이 트랜스임을 상기한다. 물론 루인의 글을 읽다보면 루인이 트랜스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긴 하다. 경험해석에서 출발하는 걸 좋아하는 루인은, “○○○”라는 글에서 어떤 경험을 해석했다면, 얼마 뒤에 쓴 “☆☆☆”라는 글에선 같은 경험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이렇게 경험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일테면, 루인이 낯선 사람과의 자리에서 조용한 것은 어쨌거나 “남성”으로 자랐기에 “과묵”한 것일까, “여성”이기에 “차분”하고 “다소곳”한(웩!) 것일까?] 젠더를 둘러싼 해석 역시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당사자”라는 건, 종종 비판을 불가능하게 하는 아주 불편한 것이기도 하다. (“당사자”라는 식의 표현 자체가 코미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점이 문제이다. 기획팀이 이런 문제에 과도하게 반응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런 지점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없다. 다른 한 편으론 루인 역시 이런 지점을 이용하는 측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어쨌거나 책이 나오기는 나오려나 보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는 바라지 않고 나오기 직전까지 충분히 퇴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출판 직후에 쓰는 새 글은, 책에 실은 글을 비판하는 그런 글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