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에 걸쳐 박제(에 실패)한 여성의 시간

수업에 쓴 쪽글입니다… 🙂
===
2013.11.05.화. 15:00- 크리스테바.
긴 시간에 걸쳐 박제(에 실패)한 여성의 시간
-루인
여성에게 혹은 사회적 타자에게 시간은 있는가? 이 질문은 ‘있다’ 혹은 ‘없다’란 답을 염두에 둔 물음이 아니다. 여성 혹은 사회적 타자의 시간은 어떻게 구성되고, 시간(성) 개념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를 탐문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식으로 변형한다면, 타자는 어떻게 초역사적 존재로 역사화되고(“Stabat Mater”), 페미니즘의 각 물결은 여성의 시간을 어떻게 달리 사유하고 또 구조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가(“Women’s Time”)로 재구성할 수 있다.
흔히 여성적 글쓰기라고 불리는 형식을 취한 크리스테바의 글 “눈물 흘리는 성모Stabat Mater”를 독해하는 방법은 다양할 테다. 그 중 하나로, 나는 이 글을 모성 혹은 여성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무역사적/초역사적 성질로 구성되(었)는가를 탐문하는 작업으로 이해(오독)했다. 즉 “눈물 흘리는 성모”는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여성에게 부여된 사회문화적 의미를 추적하는 계보학이기도 하다. 크리스테바는 마리아의 위상이 역사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술한다. 만약 예수가 원죄 없는 신성한 ‘무엇’이라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역시 원죄 없는 존재여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위상 변화와 예수의 신성화 작업이 밀접한 관계란 점을 암시한다(어떤 점에서 마리아와 예수는 쌍생아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마리아/여성을 박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성모인 마리아는 인간에게 오염되지 않은 상태, 원죄를 품지 않은 상태, 즉 무염 시태여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도록 한다. 혹은 마리아는 어머니 없는 존재여야 한다. 이처럼 역사적, 시대적 정황에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성모로, 승천한 존재로, 예수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로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성화되었다.
마리아의 의미 변화는 당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한/요구한 여성성의 의미를 투사/재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매 시대마다 지배적 여성 젠더 규범과 여성을 통치하는 기술이 마리아에게 투사되었다. 2,00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친 이 작업은 여성성을 초역사적 성격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기원전에 태어난 존재(적어도 예수보다는 빨리 태어난 존재)인 마리아를 향한 ‘팬질’ 혹은 ‘집착’,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한 여성적 속성은 그 속성이 마치 기원전부터 존재한 여성 고유의 속성이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지금 시간에 마리아에게 부여된 속성은 마리아에게서 파생한, 마리아에게 내재한 속성이( 된)다. 이렇게 마리아를 무염 시태로 머물게 하는 역사적 작업, 즉 여성성을 구성하는 시간적 작업은 여성에게 존재하는 시간성을 박제하고, 여성을 언제나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찰나에 시간은 엇갈린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기원전 존재에게 투사되고, 지금 시간은 기원전 시간이 된다. 그리하여 지금 시간은 현재의 시간인 동시에 기원전의 시간이다. 즉 여성, 여성성, 그리고 모성을 규정하고 또 고착시키려는 일련의 작업은 그 의도가 무엇이건 단선적 시간을 비틀어버린다. 물론 이런 시간 개념은 시간을 흐르지 않는 것, 영원히 정박된 것으로 이해하는 관념의 반영일 수도 있다. 구원 혹은 승천 이전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 개념으로 얘기해서 2,000년 전이건 2,000년 후건 ‘그냥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는 인식으로 접근한다면, 마리아와 여성성을 고착하려는 작업은 시간을 직선이 아니라 ‘이상하게 꼬이고’, ‘기묘하게 접붙는다.’
여성을 고착하려는 기획으로 인해 시간과 시간성이 엉키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여성과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크리스테바의 또 다른 글 “여성의 시간Women’s Time”이 갖는 상당한 매력 중 하나는 제1 단계와 제2 단계, 혹은 제1 물결과 제2 물결로 구분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설명하고 구별하는 방식이다. 흔히 이 역사는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적 지향성, 운동의 방식 등으로 특징 짓고 구분한다. 크리스테바는 이것에 더해 시간과 시간성을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으로 두 시기를 구분한다. 제1 물결/단계가 남성과의 동등, 동질을 주장하며 선형적 시간 관념에서 여성의 자리를 찾는다면, 제2 물결/단계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 및 여성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순환적 시간과 관계 맺는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 두 운동은 각각의 문제가 있다. 제1 물결/단계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획득할 때, 흔히 말하는 남성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제2 물결은 성차를 강조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강하게 부각하면서 다른 다양한 차이를 은폐한다. 여성의 다양성, 복잡성을 강조하는 크리스테바는 제3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또 그것이 진행 중이라고 얘기한다. 크리스테바에게 새로운 가능성은 이항대립을 중재하고, 선형적 시간과 순환적 시간을 대립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동시적 작동으로 해석한다.
크리스테바가 제안하는 제3의 단계/물결은 시간 개념을 나선형 시간(성)으로 바꾸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순환적 시간과 단선적 시간이 반드시 대립이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단선적 시간이 반드시 직선의 시간일 이유도 없다. 당시 맥락에서 시간/시대/세대를 달리 사유하려는 크리스테바의 작업은 “눈물 흘리는 성모”와 공명한다. 비록 “눈물 흘리는 성모”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크리스테바는 성모의 몸에 복잡한 시간 혹은 나선형 시간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시간성, 혹은 여성의 사회적/상징적 삶은 기존 질서가 사유하고 규정한 틀 내에서 혹은 그 ‘바깥outside’에서 사유될 수 없다. ‘여성’의 삶이 권력의 외부에 존재할 수 없고 배제의 원리에서조차 버려진 것은 아니라면 여성 혹은 타자의 시간을 다른 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다른 사유 체계를 상상하면서, 배제의 원리에서도 인식되지 않은 삶과 그 시간성을 사유할 가능성(상상력, 방법, 인식론)을 모색해야 한다.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라즈 온 에어Raz on Air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인천인권영화제의 상영작 <라즈 온 에어>를 설명하는 원고를 썼습니다. 좀 급하게 써서 부끄럽지만…
해설서가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하는데, 상영기간에 보내 줄 여력이 없을 테니 나중에 오겠지요.. 책을 받으면 영화제 홍보와 함께 올리려고 했는데.. 이건 안 될 듯하여 소개글 먼저 올립니다. writing 메뉴엔 나중에 책자를 받으면 그때 추가하지요..
===
2013 제18회 인천인권영화제, <라즈 온 에어> 인권해설 원고.
외로움과 슬픔의 네트워크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 )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라즈의 팬은 말했다. 라즈는 당신도 당당하게 살라고 맞받아쳤다. 일상에서 비슷한 일화는 수두룩하다. 나는 특강을 간 자리에서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어쨌거나 행복하기에 행복하다고 답할 때가 있다. 청중은 감동하고 때때로 박수를 친다. 젠장.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 모두 칭찬이 아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범주의 범위/한계를 확인하는 언설이자 트랜스젠더는 당당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는 지배 규범을 환기하는 언설이다. 트랜스젠더의 고통과 불행은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에게 요구하는 규범적 삶의 양식이자 미디어와 ‘대중’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상상력이다. 트랜스젠더가 다양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이 트랜스젠더의 유일한 경험으로 강요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 행복하냐는 질문은 모두 존재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하는 언설이며, 감정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심문하는 언설이다.
이옥섭 감독의 다큐멘터리 <라즈 온 에어>(2012)는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엔 정말 멋진 존재를 알아 기뻤다. 두 번째 봤을 땐 어떤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살며 겪는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과의 공명이기도 하다. 몇 번 반복해서 보며 이 작품에 흐르는 정서가 경쾌함과 슬픔, 외로움의 동시적 공존이라고 느꼈다. 즉 <라즈 온 에어>는 트랜스젠더 라즈의 감정과 정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연예인이나 성판매 업소가 아닌 직업군에서도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특강 후기를 받은 적 있다. 라즈와 라즈의 부모님 역시 이런 상상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네가 갈 데는 그런 데[트랜스젠더 업소] 밖에 없다”는 부모의 말은 이 사회가 공유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업소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 선택이다. 하지만 업소 선택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트랜스젠더에게 다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는 현재의 삶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 위치하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징표다. 트랜스젠더가 갈 곳이 제한된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제한된 곳에 가두려는 것이 이 사회의 규범이자 상상력이다. 다른 말로 이 사회는 트랜스젠더를 사유하기보다 소비하기만을 원한다. 사유해야 할 수많은 트랜스젠더 이슈가 소비된다. 이런 한계가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외롭고 또 슬프게 만든다. 이토록 빈약하고 빈곤한 상상력이 트랜스젠더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다른 말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이 사회가 문제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나는 라즈가 아프리카 TV건 다른 방송이건 방송 진행자로 성공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트랜스젠더가 우리 자신의 삶을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타인이 우리/트랜스젠더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다.

이것저것: 선생님, 시간성과 위계

01

아…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다.
안부를 물을 겸 겸사겸사 메일을 쓰는데, 내가 정말 석사과정을 공부한 학교와는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못 만나는 관계도 아니고, 먼 거리도 아닌데 이 복잡한 감정은 뭔지…
02
십대 이반에게 한때의 감정이라고 말하는 일군의 반응에 통상의 대응은 ‘그렇지 않다’, ‘그럼 이성애는 한때의 감정 아니냐’로 요약할 수 있으려나. 비이성애는 한때의 감정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애를 규범으로 삼는 인식 자체를 문제삼거나.
근데 문득, 십대의 동성애가 한때의 감정이라고 쳐도 그것이 무의미한 감정인가란 의문이 들었다. 더 정확하게는 어떤 감정이 일시적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여러 논쟁과 별도로, 일시적 감정은 무의미하니 연구할 가치가 없거나 고민할 가치가 없는 것일까란 고민이다. 일시적이어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면 우리가 연구할 주제는 무엇이지? 경제학 개념으로 ‘장기’는 우리가 죽고 난 다음의 시간이다. 그럼 일시적이지 않은 것, 즉 영구불변의 것만 연구하자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그리하여 무엇을 ‘일시적’이란 수식어로 폄하하는지, 시간성은 어떤 식으로 위계를 가지는지, 규범적 가치와 시간성은 어떻게 위계적 가치를 재생산하는지…
아.. 공부할 거리만 늘어가는구나..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