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게 시간은 있는가, 혹은 분석틀로서 시간을 사유하기

수업 때 쓴 글입니다. 매주 한 편 씩 써야 해서 일주일에 한 편은 쪽글로 지나갈 수 있는 그런 행운이.. 으하하. ;;
제 입장에서 이 글의 핵심은 첫 번째 문단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내용 정리에 가까우니까요.
===
2013.10.01.화. 15:00- 수업쪽글
타자에게 시간은 있는가, 혹은 분석틀로서 시간을 사유하기
-루인
그러고 보면 과정분석이나 생애사연구만이 시간을 고려하는 연구는 아니다. 젠더 개념과 젠더 수행성을 둘러싼 연구 및 논쟁 역시 시간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는 그의 유명한 책 <젠더 트러블>에서, “시간 속에서”[in time] 젠더를 체화하고 또 수행한다고 얘기했다. 나 역시 다른 곳에서, 젠더는 일생에 걸쳐 전혀 다르게 구성될 수 있으며, 어떤 개인이 현재 재현하는 젠더 표현으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예단하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얘기했다. 젠더 수행성 개념 및 젠더 분석만이 아니다. 트랜스/젠더/퀴어는 이 사회에서 매우 자주 미성숙한 존재로 명명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와 심리학자가 퀴어는 어린 시절 특정 단계의 고착이나 애착 경험으로 규범적 이성애자로 성장하지 못 한다고 애기한다. 트랜스/퀴어는 이성애의 발달 단계 중 어느 찰나/시간에 머물고 있는 퇴행적 존재에 해당한다는 식이다. 이것은 퀴어가 언제나 시간성 개념과 긴밀함을 뜻한다. 퀴어만이 아니다. 내게 익숙한 논의 지형인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언제나 시간적 개념이다. 젠더 수행과 섹슈얼리티 실천에 있어 시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인간이 태어난 바로 그 특정 시점에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파비안의 지적처럼 시간 역할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젠더가 시간 속에서 수행되고 체화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인식하지 못 했다는 건, 시간이 자연적 개념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연화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간을 얘기하는 것과 시간을 사유하는 건 다르다. 시간 논의에 있어서 로살도와 파비안은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시간을 어떻게 사유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로살도에게 문화인류학 연구에서의 과정분석은 “진리에 대해 독점권을 주장하는 틀들을 거부”(158)하는 것이다. 인류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저명한 인류학자들은 기존/주류 연구 방법에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주류/기존 연구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두터운 기술을 하고도 사회 제어기제나 사회구조의 원리를 더 강조하는 빈약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렇다고 과정연구가 제어기제에 대한 연구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를 탈중심화하고 “진리에 대한 주장을 객관주의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171)이라고 분명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사회의 규정적 양식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어떤 관습적 양식이 행위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구도 삶도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시간을 탈락하는 연구는 “정치학과 문화적 의미를 제거”(179)할 뿐이다.
파비안은 기존 인류학 연구에서 동시대성/같은시간성coevalness을 무시하는 방법을 논한다. 하나는 문화적 상대성을 이용해서 동시대성을 자기 수준으로 포위하는 것(circumvent)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있는 차원으로서 시간을 삭제하며 선점하는 것(preempt)이다. 많은 고전적 인류학 연구는 타 문화를 문화적 상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자면서도, 자신의 시간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그리하여 타 문화권의 삶을 ‘잃어버린 고리’와 같은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통해 시간을 논한다. 파비안은 이것이 실질적으로는 시간을 박제하고 시간을 배제/추방(exorcise)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타자와 내가 동시대성을 살아간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런 태도는 결국 거리두기며, 시간을 자연화하는 것과 같다. 파비안은 시간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연구는 또 다른 식민주의 연구라고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타자에 대한 글쓰기, 시간을 사유하는 글쓰기가 중요하다. 민족지적 현재시제(ethnographic present)를 논하는 파비안은, 생산적 경험 연구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가 시간을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연구참여자를 재현할 때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연구자와 연구참여자의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지적이다.
연구에서, 그리고 사유에서 시간 개념을 반드시 염두에 두는 자세는 나와 타인의 관계성을 고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을 어느 한 찰나에 고착시키지 않으려 함과 같다. 변화가 자연의 질서라면, 시간이 개인의 삶에, 사회문화적 생활에, 그리고 젠더 범주를 수행하는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누락된 연구와 글쓰기는 결국 글을 쓰는 나 자신을 성찰하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

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지난 수업 쪽글입니다.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고 쓴 글이고요.
글과 관련해서, 제가 “결국 청춘이 기준”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청춘과 관련한 상상력은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고민하니, 한국에선 나이와 관련한 풍성한 상상력이 없더라고요. 그저 규범적 생애주기만 있을 뿐…
===
2013.09.24.화. 15:00-  영화 후기 쪽글
삶의 유통기한, 쓸모의 유통기한
-루인
나이 60에 학부에서부터 수학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얘길 하곤 한다. 학부 시절 수학 공부를 허술하게 한 것이 아쉬워 나중에 꼭 제대로 다시 배우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이들 중엔 “나이 예순에 새로운 공부라니…”라는 반응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공부도 아니고 수학이라니’란 뜻일까, ‘다른 일도 아니고 공부라니’란 뜻일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나이 예순이면 아직도(조금씩 변하곤 있다지만) 뭔가를 새로 시작할 나이는 아닌 듯하다. 은퇴(가 가능한 일을 내가 한다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걱정할 나이다.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소일거리 중심이고 학업이라고 해도 외국어를 배우는 정도다. 노년에 할 일은 주로 이런 이미지로 유통된다. 하지만 나의 고민은 양호하다. 내 고민은 적어도 노년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영역, 사회적/젠더화된 금기가 존재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베티나 오베를리의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는 노년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얘기한다. 나이 들면 뒷방 늙은이가 되거나 양로원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노년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소일거리 삼아 새로운 걸 배울 순 있어도 ‘노인이 할 법한 일’에서 벗어나는 건 금기 위반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장면처럼 노년의 삶은,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 헐값[discount]에 팔리듯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의 여성이 여성 란제리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면? 남성의 속옷이 아닌 여성의 속옷을 공공연히 전시하고 판매한다는 것과 그 일을 노년의 여성이 한다는 건, 마을 당의장의 주장에 따르면 “마을의 전통”을 위반하는 일이다. 속옷은 일상에서 매우 중요한 물건이지만 여성의 란제리 판매는 마을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노년의 여성 마르타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당의장이 몸소 보여준 것처럼 노인은 멸시의 대상이며 양로원에서 얌전히 지내면 그만인 존재라는 게 마을/사회의 “전통”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 속의 풍경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상상력 뿐만 아니라 나이듦과 관련한 상상력 자체가 매우 부족하다. 가능한 몇 안 되는 사회적 상상력은, 다양한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현재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보험으로 시작해서 보험으로 끝나고 현재를 저당잡거나 ‘경제활동인구’를 저당잡을 뿐이다.
결국 노년을 둘러싼 상상력은 은퇴 후의 휴식이거나 기껏해야 제 2의 청춘이다. 결국 청춘이 기준이다. 나이가 들면 인생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상상력은 서구 근대적/지배 규범적 생애주기의 근간을 이룬다. 노년은 무언가를 하는 나이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둔 걸 ‘까먹는’ 나이다. 사회에서 생산하는 나이, 쓸모가 있는 나이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청춘에서 노년 이전까지다.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한다. 상품으로 판매할 수 없어 버려지는 것, 하지만 사용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줍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은 이 다큐멘터리는 쓸모의 유통기한을 질문한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쓸모는 실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판매할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지만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쓸모 없는 ‘쓰레기’와 같다. 그래서 신선한 야채도 판매할 수 없다면 쓰레기로 버려진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상품으로써 쓸모가 없어진 물건, 하지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줍는다. 그리고 그 물건에 또 다른 쓸모를 부여한다. 쓸모는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태도에 따른 것이다. 쓸모의 재해석은 사물의, 그리고 삶의 유통기한을 재정의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것은 정확하게 <할머니와 란제리>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과 갈등에도 결국 마을 사람을 설득하고 란제리 가게를 운영하는 마르타는 영화 말미에, 속옷엔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을 한다. 농담이지만 이 말은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속옷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농담은 또한 꿈을 이루는데 유통기한이 없다는 뜻이다. 노년은 유통기한이 지났기에 양로원에서 조용히, 조신하게 지내거나 자식세대가 요구하는대로 무시[discount]당할 시기가 아니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준 것처럼 쓸모와 노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자연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그리하여 유통기한 자체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며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젠더

이번 학기에 듣는 과목 중 하나는 시간과 젠더의 관계를 주제 삼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수업의 쪽글입니다. 논문 두 개를 읽고 대충 요약 정리한 것이랄까요..;; 뭐, 그렇습니다.
2013.09.24.화. 15:00- ‘여성의 시간, 젠더화된 시간’
-루인
시간은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경험인가? 아니 시간은 경험 혹은 인식의 대상일 수 있는가? 시간이 경험이라면, 조안 스콧이 지적했듯, 시간은 자연스럽고 투명한 무언가가 아니라 사후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는 사건이다. 시간이 해석을 통해 구성되는 사건이라면 시간은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수 없다. 아울러 시간이 인식의 대상이라면 린다 알코프와 니키 설리반 등이 지적했듯, 이것은 곧 해석과 경합의 영역이다. 만약 시간이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어떻게 경험이자 인식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 또한 만약 시간이 경험도 아니고 인식의 대상도 아니라면 나는 시간을 어떻게 지각하거나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지각하는 것이 시간인가란 질문은 차후로 남겨두자.)
시간이 경험이자 인식의 대상이라면, 모든 사람이 시간을 동일하게 의미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겪느냐에 따라 시간의 속도, 시간의 의미 등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포만과 펠스키의 글은 시간의 젠더화된 의미를 탐문한다.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다른가, 혹은 여성적 시간은 있는가란 질문에 포만은 긍정적이다. 남성 지배적 세계에서 여성은 이방인이자 집이 없다는 표현처럼,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시간 체계에서 여성은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시간을 겪는다. 남성이 성취 중심에 평가 단위가 분명한 시간을 겪는다면 여성은 분절된 평가 단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을 겪는다. 남성의 시간이 우울과 죽음을 향한다면 여성의 시간은 미래와 희망을 향하고 출생으로 얘기된다. 그리하여 포만에게 여성의 시간은 남성의 시간과 다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를 둘러싼 논쟁으로 시간 개념을 논하는 펠스키는 포만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비록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시간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경험은 아니란 것이 펠스키의 지적이다. 남성은 직선의 시간을, 여성은 나선형 시간을 겪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남성도 여성도 모두 직선의 시간과 나선형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 동시에 겪고 있다. 즉 누구는 특정 시간을, 다른 누구는 또 다른 특정 시간을 겪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이질적 시간을 동시에 하지만 마치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겪는다. 그리하여 비록 이원젠더화된 시간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것이 각 젠더에게 대당으로 할당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포만과 펠스키의 논의는 시간 경험과 시간 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하지도 않음을 지적한다. 이것은 특정 해석체계가 유일하게 옳은 해석 방법이란 뜻이 아니다. ‘철지난’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해석하는 것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란 뜻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삶과 시간 경험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체계가 필요하단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매일매일의 삶, 알바를 위해 아침마다 출근하는 나의 삶은 이 시대 많은 사람과 유사하며 불혹과 질풍노도를 같이 겪을 가능성은 상당한 차이를 야기한다. 차이와 공통점을 동시에 겪는데 ‘직선 시간 아니면 선형적 시간’이란 식의 어느 한가지 방법론으로 삶을 해석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