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사리, 양성애/바이 논문, 그래비티

알바를 하다가 문득 메모장에 쓰기를, 몸에 사리 생기겠다…
정말 몸에 사리가 서넛은 있지 않을까 싶다…
자료를 좀 찾다가 2013년 여름에 나온 석사학위 논문의 초록을 확인했는데…
한국에서는 퀴어 관련 연구들조차 종종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지금까지 성적 정체성의 차원이나 성적 지향의 차원에서 양성애자들을 다룬 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논문은 20대 양성애/바이 남성을 연구했고, 위 인용은 초록에 실린 문제의식의 일부다. 이 구절을 읽고 이 논문의 패기에 반했다. 2010년에 양성애 논문이 한 편 나왔음에도 한국 양성애 남성에 관한 논문이 아니라 한국 양성애에 관한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 패기. 2010년 논문은 양성애 논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어떤 뜻일까?
이 논문의 가장 큰 아쉬움은 한국 소재 대학교에서 나왔지만 영어로 썼다는 것…
영화 <그래비티>를 3D로 봤다. 3D는 처음 봤는데, 영화를 볼 때는 괜찮았는데 극장에서 나오니 어지럽네..;;
암튼 이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면, 우주(정확하게는 태양계 수준이지만)가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변태가 등장하는 영화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그나저나 스톤 박사 역을 맡은 배우는 연기를 정말 잘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듯…

문제적 프레임에 갇힌 글

‘우연히’ 어떤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넘어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하였습니다. 제가 이 글에 어떤 언급을 하면 뭔가 이상하게 연결시킬 분들이 계실 수도 있어서요. 하지만 글이 매우 (논쟁적이 아니라!) 문제적이라 짧게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의견을 덧붙이는 건, 행여나 해서 찾아본 트위터의 언급이 더 문제가 많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원글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추정하는 글인데 부연설명이 더 곤란해서, 원글 중심으로 의견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보통은 원문을 그대로 퍼오지 않는데 글이 짧을 뿐만 아니라 전문을 먼저 읽어야 해서, 원저자의 동의 없이 퍼왔습니다. 펌이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아울러 가급적 링크를 따라 가셔서 원문을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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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O @mecovibre

질문: 바이는 회색분자의 운명을 못 벗아 나는 건가요?

답변: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 바이포빅한 분위기가 있지요. 그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바이도 많고요. (물론 바이를 자처함으로써 정체감 형성에 따르는 부담감을 줄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들은 사실 바이와 별 상관은 없지요. 물론 이로부터 진짜/가짜 바이를 가리자, 는 데까지 나가면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요)

사실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로 가게 된다면 문제가 너무 도식화되고 빤해지는 듯합니다. 만일 제가 바이라면, 이런 구도 대신에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쪽을 택할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어느 커뮤니티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물론 양성애자라고 밝혔을 때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 겪게 되는 갈등의 폭이 매우 커질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두렵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시스템이 씌워 준 ‘회색분자의 운명’을 자처할 필요는 더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만, 써버리고 나니 상당히 재수 없는 소리가 되어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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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부연설명으로 추정하는 트윗 세 개
우선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고민은, 사회적 소수자 위치 혹은 소위 차별 받는 위치에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의 글이구나,였습니다. 이것은 느낌이지만, 정말로 소위 기득권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 혹은 특정 지배 규범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이 할법한 어떤 위치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사실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로 가게 된다면 문제가 너무 도식화되고 빤해지는 듯합니다.”란 구절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는 누가 만들었고 선호하며 유통하는 프레임인가? 이런 프레임과 비슷한 예로, ‘페미니즘은 남녀 대립구도를 만들어서 (가장 부정적 의미에서의)갈등만 부추긴다’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트랜스젠더 강의를 하고 나면, ‘그냥 다 살아가는 사람인데 굳이 트랜스젠더와 정상인으로 나누어서 사고할 필요가 있느냐?’가 있지요. 혹은 이성애규범성과 이성애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동성애자 강사에게 ‘다 같은 사랑인데 왜 이성애 vs. 동성애자 구도로 도식화하느냐?’가 있겠지요. 아시겠지요? 페미니스트가 남녀 대립구도를 조장하나요, 남성중심적/가부장적 사회 제도 자체를 탈구성하려고 하나요? 트랜스젠더 이슈는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구분하려는 정치학인가요, 비트랜스젠더를 인간의 기본값으로 삼는 사회적 인식 자체를 문제삼는 정치학인가요? 동성애 운동은 동성애자 분리주의 운동이던가요? 바이/양성애자 운동/인식론은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를 구분하려는 운동인가요?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구도”와 같은 도식은 특정 지배 규범을 문제삼는 이들의 논의를 망치기 위해 혹은 의도적으로 훼손시키기 위해 특정 규범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정확한 의도야 알 수 없지만 그 질문을 “동성애자 vs. 양성애자”의 프레임으로 가두는 건 두 집단의 권력 위상을 등치할 뿐입니다. 마치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는 정치 권력이 동일해서 둘 사이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페미니즘의 주장을 “남녀대립구도”로 만드는 것 역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인간이며 둘 사이엔 아무런 차별 없이 잘 살고 있는데 괜히 페미니스트가 시끄럽게 떠들어서 문제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처럼요. 이런 프레임에선 ‘동성애자 공동체’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자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바이나 비동성애-비이성애자가 문제일 뿐이죠. 즉 모든 문제를 동성애-비트랜스젠더가 아닌 존재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이 프레임이 야기하는 문제는 곧이어 드러납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이나 갈등 같은 것은 어느 커뮤니티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이 문장을 조금만 바꿔볼게요.
한국인 사회가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식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곧 한국인 사회의 일원이란 게 내 정체성에도 중요한 요소인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활동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차별이나 혐오폭력 같은 것은 어느 나라/사회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하겠지요.
또 다른 문장.
“하지만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이 역시 조금만 바꿔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교회에서든 모두가 잘 지낼 수는 없는 것이고, 잘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동성애자 vs. 양성애자” 프레임에선 문제제기를 하는 양성애자/바이가 잘못입니다. 이런 인식틀의 대립 언어를 조금만 바꿔 적용하면, 한국 사회에서 보수기독교의 혐오발언은 문제될 것 없으며 그런 혐오발화를 문제삼는 일군의 집단이 문제인 거죠. 혐오발화를 문제삼는 집단이 보수기독교의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http://goo.gl/B5hSsL) 것과 같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문제 삼는 글을 단순히 “개인적인 상담글”(http://goo.gl/nNSSRf)로 여길 수 없습니다.
아울러 질문자의 질문 “바이는 회색분자의 운명을 못 벗아 나는 건가요?”(이것이 질문의 전체라고 가정한다면)의 어디에 “회색분자라는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http://goo.gl/B5hSsL)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개된 질문만 따져 읽으면 바이를 회색분자로 여기는 ‘동성애자 공동체’에 문제제기로 해석할 수도 있거든요. 즉 바이/양성애자를 “회색분자”로, “박쥐”로 몰아가는 사회 구조, ‘동성애자 공동체’를 문제삼으며 글을 전개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덧붙여 “이런 구도 대신에 자신의 문제에 천착하는 쪽을 택”하라는 구절 역시 당혹스럽습니다. 질문하는 분이 “동성애자 vs. 양성애자”라는 프레임을 “수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미 질문자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바이 이슈며, ‘동성애자 vs. 양성애자’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유통하는 집단의 이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바이나 동성애자 공동체와 무관한 남의 이슈인 것처럼, 질문자의 이슈가 아닌 것처럼 설명할 수 있는 건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프레임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위험합니다.
(이 글은 또 다른 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러운데, 이 글은 단편적 글에 말을 덧붙인 경우지 글을 쓴 사람을 비평한 것이 아닙니다. 글을 비판하면 마치 글쓴이를 비판하는 것처럼 오독하는 경우가 있어 덧붙입니다.
++
프레임을 프레임하는 이슈는 부끄럽지만.. ㅠㅠㅠ
루인. “괴물의 인식론: 이택광, 『마녀 프레임』(자음과모음, 2013)” <자음과모음> 20 (2013): 348-352. 인쇄본. http://goo.gl/25xlG
을 참고하셔요.

묻고 답하기: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까지 해야 할까요?

가끔 이메일로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요청 받거나, 간단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때마다 답장을 보내곤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아울러 이메일을 보낸 분만 읽기엔 아쉽기도 하고요. 제가 쓴 내용이 좋아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동안 들인 품이 아깝달까요. 하하 ;; 그래서 앞으로는 관련 내용을 정리해서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올리는 주기는 없습니다. 이메일이 오면 그때마다 정리해서 올릴 수도 있고 귀찮으면 한두 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

이 글 혹은 이 시리즈의 독자는 이제 처음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이슈나 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러니 내용은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단순하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상당하지만 어쩌겠어요. 😛 이 시리즈(?)에 실릴 글의 상당 부분은 다른 단체에서 발간한 자료집에도 비슷한 내용이 많으니 꼭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

기본 용어는 KSCRC사전을 참고하세요. 🙂 출판물로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린 용어정리가 있고, 다른 여러 단체에서 발간한 다양한 자료집도 있습니다.

모든 관련 기록물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www.queerarchive.org)을 참고하세요. 🙂



질문: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고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성전환 수술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답변:
일단 트랜스젠더/비트랜스젠더라는 젠더정체성과 동성애/양성애/이성애라는 식으로 구분하는 성적지향/성정체성 개념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을 경우,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성적지향은 내가 누구를, 어떤 젠더를 좋아하는가를 핵심으로 해요. 이를테면, 나는 나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이 여성이면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좋아하는 상대방이 남성이면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 어느 한쪽만 배타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경우엔 양성애자로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간단한 구분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그냥 넘어 갈게요. 하하. ;; )

반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젠더), 즉 흔히 말하는 여성이나 남성 중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거죠. (물론 젠더가 여성이나 남성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둘만 가정하고 설명하겠습니다.) 나를 여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나의 젠더정체성은 여성일테고, 남성 젠더로 인식한다면 남성이겠죠. 그래서 성적지향이 상대와 나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개념이라면, 젠더정체성은 나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련 있는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듯합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의 관계는, 성적지향이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나의 성별, 상대방의 성별을 확정한 다음에야 통상적인 성적지향을 얘기할 수 있죠. 여성으로서 여성을 좋아한다는 말은, 즉 나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고 상대의 젠더정체성이 여성이라고 확정한 다음 우리 둘의 젠더정체성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동성이란 개념이 가능한거죠. 이렇듯 성적지향은 젠더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랄까요.

거칠게 설명했는데, 대충 이렇게 이해하면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다소 다른 개념입니다. 즉 내가 남자 혹은 여자란 것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다른 이슈인 셈입니다. 성적지향과 젠더정체성을 구분한다면, 성전환 수술은 젠더정체성 이슈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수술이 ‘이성애자 되기’는 아니란 거죠. 🙂 언젠가 기회가 되면(과연?) 정리하겠지만,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을 이성애자되기로 이해한다면, 레즈비언인 트랜스여성, 게이인 트랜스남성, 바이인 트랜스젠더를 설명하기 힘들고요.

(논의를 더 진행하면 이런 구분 자체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여기선 생략할게요. 더 자세한 논의는 … 부끄럽지만 루인 “범주명명과 경계지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참고하세요. ;;; )


그 다음의 논쟁점은 흔히 얘기하기를 “나는 내가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럼요. 저 역시, 어떤 의미에서, 제가 어떤 젠더인지 크게 개의치 않아요. 하하. 🙂 문제의 핵심은 그럼에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남성이 아닌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남성으로 구분하고 남자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요. 아울러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설명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바라볼 가능성이 크고, 남성처럼 생긴 사람이 여성일 거라고 여기고 여성으로 대하는 주변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암튼 갈등의 많은 지점은 여기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물론 스스로 바라는 몸의 형태가 있긴 하지만 이런 형태는 한 사회의 지배규범과 크게 다르진 않겠죠. 인기 연예인의 몸이 규범적인 몸이 될 때, 많은 이들이 그 연예인을 닮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듯. 혹은 실질적인 노력은 하지 않아도 그런 규범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듯. 수술 자체의 논의는 좀 다르게 가져가야 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설명할까요? (슬쩍 얼버무리고 도망치는 분위기!!) 관련해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충 정리하겠습니다. 논쟁적이지만 음미할 만한 구절이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내[트랜스젠더]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젠더시스템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이분법이 나를 위반합니다.”
-리키 앤 윌킨스(Riki Ann Wilch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