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상대방의 젠더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미국정신의학회(APA)의 1974년 회의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 세션에 참가한 한 의사는 mtf 트랜스섹슈얼이 유난히 예쁘고, 일반적인[비트랜스] 미인이 자신에게 유발하는 느낌을 환기한다면, 그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다움을 더 잘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른 의사는 트랜스섹슈얼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젠더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의사 자신에게 성적인 흥미를 일으키는지로 판단한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Kessler, Suzanne J. and Wendy McKenna.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118.
(번역은 대충 날림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격언이 아니겠지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세요.” *뻔뻔*)


한동안 분주했고, 별도의 읽을거리가 있어 『젠더』를 못 읽었다. 원래는 『젠더』를 6월까지 다 읽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다. 어쨌든 어제부터 약간의 시간이 생겨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구절은 예전에 다른 곳에서 들은 적이 있다. 2006년 여름이었나. 여이연에서 트랜스젠더 강좌를 열었는데 담당 강사가 위의 일화를 소개했다. 무척 인상 깊어 어디선가 몇 번 언급했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인용하길 관뒀다. 근데 『젠더』에 나오는 일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제 늦은 밤 지하철에서 이 구절을 읽고 꽤나 흥분했다. 흐흐.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가 1978년이란 점, 그러니 1970년대 중후반에 이 책을 썼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엔 트랜스젠더를 진단할 공적 진료규범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정신의학회에서 성전환증(transsexualism)을 성동일성장애(GID: gender identity disorder)란 항목으로 의료진단범주에 포함한 건 1980년이니 그전까진 설만 분분했다. 이런 시기에 몇 명의 의사들이 위와 같은 얘길 했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찾아왔을 때, 진짜 트랜스여성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에게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환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로 판단한다고.

의사들이 다소 노골적으로 표현했을 뿐 유별난 기준은 아니다.

작년 ftm 관련 다큐를 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감독 및 출연자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을 때, 몇 명의 관객들은 출연자를 보며 “쟤는 좀 남자 같네.”라고 속삭였다. 난 이 속삭임과 『젠더』에서 전하는 의사들의 발언에서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하리수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이란 수식어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어떤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하는 일상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여성”으로, “남성”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위에 인용한 의사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매혹을 기준으로 삼았고, 어떤 사람은 머리카락 길이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걷는 방식이나 목소리 톤을 기준으로 삼는다.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만 듣고선 상대를 “여자”로 판단한다면, ‘내’가 “여성의 목소리”라고 판단할 자극을 받았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것이 위의 의사들이 성적 매력, 유혹으로 판단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매우 드물고 나 역시 이런 구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이런 구분을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으로 구분하는 건 곤란하다. 이 말을 덧붙이는 건, 예전 어느 강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의사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 당시 강의실은 술렁이며 의사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그건 의사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술렁임, 의사를 향한 비난/비판은 용인할 만한 행동과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구분하고 있단 점에서 유쾌하지 않다.

유쾌하지 않음, 불쾌한 건 아니라도 유쾌한 건 아닌 감정은 순전히 나의 경험 때문이다. 내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낯선 사람을 만날 때 많은 이들이 나를 “남성”으로 판단했다가 내가 트랜스젠더인 걸 ‘알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뀐다. 혹은 나의 이름은 알고 오프라인의 모습은 모르다가 오프라인에서 인사를 할 때, 내가 “그 루인”이라는 얘길 할 때면 종종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놀람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내 몸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글로 드러나는 나와 오프라인에서 드러나는 나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놀람은 온라인이나 글로만 알던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도 빈번하잖아. 그저, 이런 놀람과 의사의 발언을 구분하고 놀람은 괜찮지만 의사의 발언은 나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어제 지하철에서 『젠더』를 읽다가 이런 저런 고민이 떠올랐다. 요즘 다시 두드러진 고민 중 하나가, 20~30년 뒤의 내 모습이라 좀 심란하기도 했고.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 젠더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

딸만 여럿이고 아들이 없는 가족을 상상하자. 그 가족이 사는 사회에서 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사냥을 도울 아들이 필요하다. 마침내, 아이가 새로 태어났지만 딸이었다. 부모는 사냥꾼이 필요했기에, 그 아이를 아들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가 임신을 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그 아이는 소년으로 옷을 입었고, 남자들의 기술을 배웠고, 실제로 매우 튼튼하게 자랐고,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다.
아들이 있는 또 다른 가족을 상상하자. 그 아이는 여자들의 일에 관심을 보였고, 남자들의 일은 피했다. 그래서 부모는 그를 시험하기로 했다. 그들은 작은 울타리에 아들을 데려갔고, 활과 화살, 그리고 바느질 도구가 든 바구니를 넣어줬다. 부모든 울타리에 불을 질렀고, 아들이 무엇을 챙겨 탈출하는지 지켜봤다. 그 아이는 바느질 도구를 챙겼고, 그때부터 그 아이는 딸이 되었다.
-Kessler and McKenna. “Cross-Cultural Perspectives on Gender.” Gender: An Ethnomethodological Approach.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21.


위의 문장은 케슬러와 맥켄나(맥케나/맥키나?)가 함께 쓴 책의 일부다. (정확한 번역은 아니고 대충 얼버무린 번역. -_-;;)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 중엔 버다치(berdache)로 불렸던, 지금은 두 영혼의 사람들(two-spirit people)로 불리는 또 다른 젠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위에 날림으로 번역한 내용은 두 영혼의 사람들의 일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인디언 문화를 조사한 인류학자들이 남긴 기록의 일부다.

1978년에 이 책을 쓴 케슬러와 맥켄나의 주장에 따르면, 현존하는 인류학지 중에서 두 영혼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사실상 없다고 한다). 대부분이 옆 부족에 두 영혼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는 식의 얘기를 전하고 있단다. 암튼 그렇게 기록에 남은 두 영혼의 사람들과 관련한 위의 일화는 젠더를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위의 두 사례는, “어쨌든 결국 남자 아니면 여자로 구분하고 있는 것 아니냐”란 반응을 끌어내기 쉽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때, 현대의 통상적인 젠더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 이렇게 이해할 여지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이 두 사례가 말하는 젠더 개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접하는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선, 위의 두 사례는 모두 젠더를 소위 “생물학적 본질로 불리는 몸”에 고착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서 젠더는 개인이 어떤 역할을 선호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비록 태어날 땐 생물학 혹은 몸의 외부 형태로 젠더를 결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에 유연해서 여성과 남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개인을 둘 중 하나로 설명한다 해도 이분법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한다. 이 유연함은 개인의 젠더를 둘 중 하나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듯하다. 혹은 그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여겼거나.

물론 이 두 사례로 인디언 부족들 각각의 젠더 개념을 유추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인디언 부족의 젠더 개념을 이분법의 틀로 이해한다면, 그런 이해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이해다.

그런데 …. 사실 첫 번째 사례를 읽으며, 뭔가 운이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새로 태어난 아이가 사냥꾼이 되기 싫었다면 꽤나 괴로웠을 테니까. 부모는 사냥꾼이 되길 강요하는데, 아이는 바느질을 하고 싶어 했다면 부모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사례에서, 딸이고 싶지만 활과 화살을 좋아한다면 얘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선 그 아이는, 아마 매우 똑똑했을 테니, 시험에선 선택하기 어려웠을 거 같다. 바느질 도구를 선택하면 딸로는 살 수 있지만 활과 화살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활과 화살을 선택하면 사냥은 할 수 있겠지만 딸로는 살 수 없을 테고. 어쩌면 그냥 빈손으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인디언 부족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정 문화적 기호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분명 현대 사회의 대처 방법과는 달랐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쉽지만 이 역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은밀한 유혹Affinity

[은밀한 유혹Affinity]를 꼼꼼하게 살폈다. 세라 워터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Tim Fywell 감독이 만든 영화다. 폐막작이라 다행이었다. 일요일에 상영하는데 자막 작업이 토요일 낮에 끝났거든-_-;; 아쉬운 건, 미리 홍보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 단연 최고였는데!

영화를 15분 정도 남겨뒀을 때까지만 해도, 난 이 영화와 관련해서 쓰고 싶은 글은 다음과 같았다.

트랜스젠더 범주를 정의하는 문제는 상당히 많은 논쟁을 유발한다. 누구의 입장을 반영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 학제의 맥락에서 트랜스젠더는 규범적이지 않는 젠더 표현을 실천하는 이들을 아우른다. 물론 여기서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트랜스섹슈얼, 퀴어, 레즈비언, 게이, 바이, 드랙, 크로스드레서, 간성,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한 사람 등을 아우른다. 어떤 이들은 이 정의를 미국 백인에 제한한다. 다른 이들은 인도의 히즈라, 미국 원주민의 두 영혼의 사람들(버다치로 알려진), 동남아 지역의 카토이 등을 아우르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폭넓게 적용하는 몇몇 활동가들과 역사학자들은 잔다르크를 트랜스젠더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확장할 수 있을 때까지 확장하면, 한국의 무당도 트랜스젠더일 수 있다. 물론 이는 미국의 백인 중심, 학제 중심의 해석이다. 그나마 이런 정의가 그들의 학제에선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말은 상당히 골치 아프다. 일단 학제에선 합의 과정은커녕 아예 관심 밖이다. 그리고 이 용어를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합의가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 즐겁기도 하다. 생생하니까. 각자의 입장을 좀 더 활발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어떤 의미를 암기하는 식으로 배울 필요 없이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정의할 수 있으니까.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트랜스젠더란 범주를 비규범적인 방식으로 젠더를 표현하는 이들로 정의하고, 무당까지도 포함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영화 [은밀한 유혹]은 트랜스젠더 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15분을 마저 살폈을 때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표면적으로 레즈비언 관계를 다루는 이 영화를 트랜스젠더 영화로 독해할 수 있었던 건 어째서일까.

줄거리를 대충 쓰면, 일단 시대적 배경은 1870년대. 셀리나 도즈란 영매가 살인죄로 여자 감옥에 갇혀 있다. 이 감옥에 마가렛이 수감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도즈를 만난다. 둘은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마가렛은 영매들의 세계를 배워간다.

[현재 이 영화는 개봉하지도 않았고 개봉 일정도 잡히지 않은 것 같으며, 책도 한글로 옮기지 않은 상태라 스포일러 남발합니다. 알아서 피하세요. :P]

내가 주목한 부분은 도즈의 영이 피터란 남성적인 존재란 점이다. 무당으로 치면, 주민등록번호 2번인 무당이 모시는 신이 주민등록번호 1번인 사람이랄까? 여성과 남성으로 개인을 분명하게 나누는 사회에서 도즈와 피터는 서로 다른 성별 번호를 부여 받은 사람이다(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서구에서 이런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건 아니다). 피터는 도즈의 몸을 매개하고, 이 과정에서 도즈는 피터를 체화해서 피터로 행동한다. 도즈가 피터를 불러들이지 않을 때와 피터를 불러 들여 도즈의 몸을 매개로 피터로서 말을 할 때, 도즈의 목소리부터 행동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변하는데 이 과정이 묘하게 성별 전환과 닮았다. 비록 피터를 통한 젠더 전환/변화가 ‘영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시적인 사건’이라 해도 나는 이것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피터가 도즈의 영으로서 평생 함께 한다면, 이 또한 ‘영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도즈는 접신 경험을 통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 주변 사람들이 도즈가 영매란 사실을 알고 경외하는데, 이를 통해 도즈는 빅토리아시대의 여성다움을 실천하지 않는다.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을 상당히 흥미롭게 해석할 여지를 준다. 그렇다고 내가 이 영화를 레즈비언과 ftm/트랜스남성간의 경계분쟁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미국 학제의 개념으로서 트랜스젠더 실천이 상당히 일상적으로 발생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로 영을 소환했다는 혐의도 강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영에 씌어서 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도즈는 살인죄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이 살인한 것이 아니라 피터가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접신 상태에서 피터를 통제할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피터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이는 도즈의 젠더 실천이 규범적이지 않아도 무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즉,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행동이 상당히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스포일러. 영화의 핵심이기도 함]

문제는 후반부 10분 정도를 남겨 놓고 등장하는 반전에 있다. 도즈는 소수의 사람들을 모아선 자신의 접신 경험을 공연한다. 이때 도즈 뒤에 피터가 등장하고 도즈의 입을 매개로 말을 한다. 근데 피터는 사실 도즈의 파트너, 바이거스였다. 바이거스가 피터로 분장해선, 영혼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 이렇게 되면 도즈가 영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도즈가 진짜 영매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도즈는 자신을 영매로 소개함으로써 사회에서 공인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동시에 행동 제약이 줄어드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이제 방점은 바이거스의 행동에 찍으면 된다.

바이거스는 영화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이지만 실제 등장하는 분량은 상당히 적다. 배후에서 모든 것을 움직이기에 사건을 조율하고 지배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국에 머물 때의 드라큘라를 닮았기도 하다. 일종의 안개 같은 역할이다. 그래서 바이거스의 행동을 분석하는 건 쉽지 않다. 그저, 피터로 분장했을 때 바이거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적어도 영적 사기를 위한 단순한 도구 같지는 않다. 피터가 바이거스가 분장한 인물이란 게 밝혀지는 사건에서, 피터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지!”란 말을 한다. 바이거스는 항상 도즈 옆에서 살았기에 피터가 특별히 멀리서 온 건 아니다. 피터의 모습으로 분장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주 멀리서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분장에 걸리는 시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피터로서 바이거스와 하녀로서 바이거스, 도즈의 파트너로서 바이거스가 상당히 다른 자아들이란 걸 암시한다. 적어도 피터로 변해서 나타난 바이거스는 피터로 변장했거나 분장한 바이거스가 아니라 피터, 그 자체이다. 이런 점에서 피터/바이거스의 변환 관계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도즈와 피터/바이거스가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어떤 행동을 트랜스젠더스러운 실천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영화 속 시대를 살고 있는 비규범적인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한 전략들이 중요하다. 그 전략들은 그 사회의 규범과 규범의 허점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암튼, 정말 흥미롭고 재밌는 영화다. 정식 개봉을 안 한다면 비공식 개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