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과 아웃팅, 사이에서

ㅈㄱㅇ님의 블로그에서 아웃팅과 관련한 글(아웃팅은 범죄다, 란 식의 운동방식이 가지는 한계 혹은 문제점)을 쓰고 싶다는 글[링크를 걸어도 되나 잘 몰라, 일단 생략]을 읽으면서, 종종 차라리 아웃팅이 더 편한 경우도 있다고 중얼거렸다. 아웃팅을 범죄화하는 운동이 오히려 커밍아웃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종종, 아웃팅을 하면 안 된다는 정도로 알고 있는 집단에서 커밍아웃을 할 때의 그 “철렁”하는 혹은 “술렁”이는 반응. 아웃팅의 범죄화가 커밍아웃조차 하지 못하도록-말 그대로 조용히 지내도록 만드는 (역)효과를 가진 건 아닐는지. (아웃팅 자체가 범죄인 것도 아니거니와.)

그런데, 또 이런 의문들 속에서,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무엇을 혹은 어떤 맥락을 커밍아웃 한다는 걸까? 모든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의 의미가 다른 상황인데. 소위 말하는 “이성애자”가 아닌 루인은,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는 곧 이성애자라고 간주하는 사회에서, 루인은 트랜스예요, 라고 커밍아웃하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트랜스젠더다 혹은 동성애자다와 같은 커밍아웃보다는 좀 덜 무겁다고 여겨지는, 채식주의자라고 밝히는 행위, “루인은 채식을 해요, 우유나 계란도 안 먹어요.”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루인이 채식주의자라고 여기기 시작하지만, 이때의 반응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날 고깃집에 가자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빵을 권하고, 어떤 사람은 반복해서 무얼 안 먹는지 물어보고. 한동안 이런 식의 반응은 채식주의를 정치학이 아닌 취향으로 간주하는 행위이거나 루인이 채식주의자임을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하곤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루인이 채식주의자임을 알고 있고, 때로 루인보다 더 신경 써주는 사람들도 종종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 접하며, 채식주의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와 무게로 다가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커밍아웃이라고 큰 차이가 있겠는가, 싶다. 루인의 친구 중 한 명은, 작년 초에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1년 정도가 지난 최근에야 루인이 트랜스임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했음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1년 정도의 시간. 하지만 루인은 루인에게 커밍아웃 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커밍아웃 앞에서 취약하게 반응하곤 한다. 커밍아웃으로 인해, 어떤 부분들, 경험들을 말함으로서 상대방이 루인을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 두려움. 하지만 커밍아웃 자체가 애초 상대방을 믿는 만큼이나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을 안고 시작하는 건 아닐는지.

사실, 누군가에게 “나는 ○○이다”라고 커밍아웃을 하면, 상대방이 곧장 어떻게 행동하고 반응하고 얘기할 지를 깨닫길 기대하는 것 혹은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커밍아웃이 인정투쟁이 아니라, 상대방과 커밍아웃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의사표시라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커밍아웃을 하겠다고, 고민한 시간만큼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상대방에게도 필요할 테다(지금의 사회적인 맥락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조차도 자신과 소통하고 관계 맺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텐데. 커밍아웃의 의미가 다들 조금씩 다른데 자신이 원하는 기대 수준으로 상대방이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커밍아웃과 아웃팅을 고정적인 것으로, 그래서 단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려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한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커밍아웃을 하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과 상대방이 감당해야 할 몫 사이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할까?

그냥, 어쩔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으라지… 라고 중얼거려야지. 떠날 테면 떠나라지, 여기서 끝이라면 그런가 보다고 중얼거려야지. 관계가 어색해진다면 그러라지…. 커밍아웃 혹은 아웃팅 사이에서,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관계를 맺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의 의미를 모색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중얼거림이 체념은 아니니까. 지금의 시간을 견디면서 모색하는 과정일 뿐.

그나저나, 커밍아웃 혹은 아웃팅과 관련한 글을 참 많이 쓰는구나, 싶다. 키워드로 커밍아웃만 눌러도, 적지 않은 글이 쏟아지는 걸 보면…. 아무려나, ㅈㄱㅇ님의 글을 기대하고 있다.

강의 이후

이틀 전, 아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며칠 전 루인이 강의실 강의를 했다고 들었다며, 강의가 좋았다고 (그 수업의)선생님이 말하더라고 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의례적인 말일 수 있고(비록 루인의 경우, 너무 많은 얘기를 의례적인 인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사치레로 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특강 이후, 수업게시판에 실명으로(익명게시판이 있음에도) 5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얘길 적었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강의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구나 했다.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 강의나 수업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면 종종 메일로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듣곤 한다. 물론 어떤 선생님은 이런 경험이 전혀 없다고 한다. 수업시간의 논의 방식, 학생이 강사에게 가지는 신뢰 등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수업의 마지막 한 시간으로 트랜스젠더나 퀴어, 동성애를 다룬다고해서 학생들이 강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논의 구조를 어떤 식으로 가지고 가느냐가 쟁점일 테고, 그래서 학생이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그 강사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도 있다는 걸 뜻한다.

그날, 특강 때 했던 말 중에, 루인이 나름 중요하다고 여기며 한 말은 두 가지:
1. 상대방의 외형을 안다는 것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번째 숫자를 안다는 것이, 상대방의 외부성기 형태를 안다는 것이 무엇을 안다는 건지 고민했으면 해요.
2. (질의 응답 중에, 1번을 부연설명하며) 지금 이 강의실에도 말하지만 않았을 뿐,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들이 있어요. 소위 남성이라고 혹은 여성이라고 여겨지는 외형으로, 또한 그런 외형에 따른 어떤 젠더 역할을 수행하곤 있지만, 말하지만 않았을 뿐, 사회가 요구하는 성별이나 성별역할과는 다른 식으로 자신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1번의 얘기는 다른 곳에서도 한 적이 있는, 아마 어느 강의를 가건 반드시 할 얘기이다. 2번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할 수 있는 내용이다. 어떤 자리냐에 따라 말하는 내용의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그것도 단 두 시간 특강강사(맨날 누군가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입장인 루인이 스스로를 특강”강사”란 식으로 부르는 건 참 민망하네요;;)의 말일 뿐이기도 하기에, 수업 반응은, 횡설수설이었다 정도로 예상했다.

그래서, 그날 특강 이후 다섯 명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글을 적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아주 횡설수설하며 혼자서 쑈만 하고 온 건 아니구나, 했다. 사실 특강을 끝내며 메일주소(runtoruin@gmail.com)를 남겼는데, 한 통의 메일을 받기도 했다. 며칠이 지난 어제야 답장을 했는데, 그건 서울여성영화제 기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메일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답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쁜 건, 커밍아웃 혹은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는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루인과는 또 다른 결로 얘기할 텐데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루인이 그날 커밍아웃을 했기에 가능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두 시간으로 끝나는 특강강사의 커밍아웃 만으로 수업게시판에 자신의 고민을 적을리 만무하다. 기본적으로 수업을 담당하는 강사를 신뢰한다는 전제 하에 루인이 촉매제 역할을 했으리라. 그리고 바로 이러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기뻤다.

앞으로 계속해서 경험할 지도 모를 일들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더 많은 상황들 속에서 더 많은 고민들을 해야 한다. 그래도 시작에서의 이런 경험은 기쁘다. 🙂

부모님께 커밍아웃 하기 어려움..

관련 글: 노란 손 + 세월 속에 변하는 부모’님’

부산에 가서 부모님과 (혹은 친척들과) 얘기를 나누며 종종 답답함을 느꼈다. 부모님이나 이성애혈연(부계건 모계건 상관없이)을 매개하는 친척들은 루인이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서부터 답답함이 발생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앎은 사실이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원하는 모습 혹은 알고 있는 모습 속에서 루인은 하루 종일 학교에만 있는 “범생이 원단”일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 물정은 잘 모르고(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_-;;) 아직은 철없는 학생.

그리고 부모님이 모르는 모습과 생활 속에서 루인은 실태조사기획단에서 일하기도 했고(“했고”라는 과거시제를 쓰고, 아직 활동이 끝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흑흑)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라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단체를 발족하고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루인이 스스로를 활동가로 부를 수 있느냐는 언제나 의심스럽고 부족함에 부끄럽지만. 어쨌거나 여성학/페미니즘 분야에선 나름 유명한 [여/성이론]이란 잡지의 2006년 겨울호에 글을 싣기도 했고(물론 그 글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ㅠ_ㅠ) 모 주간지나 어떤 매체들에 미약하나마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얘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저 공부만 하는 아이”라는 한 친척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속상하고 답답했다. 루인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기도 했다. 그 내용이나 수준과는 상관없이 “유명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적당히 허풍 섞인 말을 한다면 부모님은 한껏 좋아할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지만, 할 수가 없었다.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 믿지만, 행여나 보여 달라고 했을 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루인이 쓰는 거의 모든 글은 루인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루인의 글을 읽는 순간이 곧 커밍아웃 하는 순간이다. 루인이라는 이름 자체를 밝히기가 꺼려지기도 했고.

그동안 워낙 제멋대로에 속만 썩인 아해라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가장 큰 “불효”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그 완고함이 의외의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한편으론 그걸 믿기에 루인이 트랜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당장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충격에 쓰러지거나 하시겠지만(엄마님의 현재 건강 상태를 봤을 때, 한 번 쓰러진다는 건 다시는 못 일어 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루인이 트랜스인 걸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있고, 루인 스스로 트랜스’임’을 부정하고 그냥 살겠다고 말하길 바라는 몸으로 루인이 트랜스’임’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맺어 갈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망설이고 그냥, 부모님만은 루인의 정체성들을 영원히 모르길 바라는 몸.
(석사학위 논문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두 가지 판본으로 찍을 계획도 세우고 있다. 실제 제출하고 취득할 제목과 목차의 판본과, 가족들에게 보여줄 제목과 목차를 지닌 판본으로. 그렇다면 아마 서론도 조금은 바뀌겠지. 왜냐면 원래 판본에선 서론에서부터 루인의 정체성들을 얘기하는 것으로 시작할 테니까.)

설이라는 행사를 빌미로 만난 가족 중 조카 한 명은, (어떤 명확한 정체성 범주 구분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나중에 게이로 커밍아웃할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편으론 기쁘지만 한 편으론 걱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겪을 일들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여담인데, 왠지 루인의 사촌들 중엔, 나중에 LGBTQ 모임이라도 있다면 그런 모임에서 만날 거라는 느낌이 드는 사촌도 있다. 서로가 당황하려나? 흐흐. 엄청 재밌어하고 좋아하겠지. 후후.)

이런 감정들-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움, 친척 중엔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사람이 없길 바라는 몸이 루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픈 걸 의미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루인의 다양한 정체성들이 특별히 자랑스러운 것도 아닌 만큼이나 특별히 부정하고픈 것도 아니다. “게이 자부심[gay pride]”과 같은 말이 혐오와 공포가 만연한 사회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말은 자칫 동성애자를 특별한 존재로,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된 존재로 만들 위험성 때문에 별로 안 좋아하는 표현이다(“트랜스젠더는 신을 매개하는 존재”, “트랜스젠더는 젠더와 무관한 존재”, “젠더를 횡단하는 존재”란 식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만큼 부끄럽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지만, 루인의 친척관계 속에서 커밍아웃을 해야만 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몸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이런 앞선 걱정은, 상대를 루인의 수준으로 환원해서 판단하는 것이기에 위험하단 건 ‘안다.’ 커밍아웃하지 않으며,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여겨지는 트랜스(이럴 때 그 사람을 “트랜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가 다른 트랜스, 트랜스젠더를 향해 더 심한 혐오 발화를 하는 이유엔 이런 ‘앞선 걱정’이 있기 때문임도 ‘안다.’ 이런 고민들 속에서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은 속상함일 수도 있고, 한편으론 아직도 커밍아웃을 하기에 앞서 걱정과 두려움이 다른 한편으론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바람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꼭 커밍아웃을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루인의 정체성들을 부정하거나 숨기지도 않으면서 루인의 활동을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남의 일이지만 관심이 있어서 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을 하며, 예전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나눈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인터뷰에 대답한 사람이, 자신의 딸은 자신처럼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했다. 조금은 기대를 했기에 어떻게 논문을 썼을지 궁금하고 읽고 싶(었)다. 기회가 생길지는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