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를 진부하고 태만하게 전시하기

어제 입은 면티엔 “I AM QUEER. SO WHAT?”이 적혀 있다. 팔엔 “LOVE conquers HATE”이라고 적힌, 올해 퀴어문화축제에서 판매한 팔찌를 두르고 있다. 보조가방은 작년 퀴어영화제 가방이고, 그 가방엔 무지개를 든 안드로이드 뺏지(올해 퀴어문화축제에서 부스를 마련한 구글이 나눠준 것)가 달려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면티는 올해 구매한, 혹은 예전에 구매한 퀴어문화축제의 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아보는 사람은 이 물품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퀴어문화축제에 참가했거나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 뿐이다. 아직 길에서 이것을 알아보고 시비를 건다거나 뭐라고 한 사람은 없다. 사실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이런 물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해서 꼼꼼하게 읽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알바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제까지 이것으로 질문한 사람은 없었다. (아, 태블릿에 끼우고 다니는 무지개는 알바하는 곳에서 한두 명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막 티내려고 애쓴다고 해도 이것은 충분히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이 입는 티나 물품에 크게 신경쓰지 않듯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나는 면티의 앞부분, 그 광활한 앞부분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좋은 공간이라고 믿는다. 디자인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공공연히 전시하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나는 늘 개인이 소량으로 티를 손쉽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입금될 금액이 입금되면 나는 곧 스냅티에서 티셔츠를 주문할 예정이다.) 때론 이런 행동이 참 옛스럽기도 하다. 그냥 좀 고리타분한 생각이라고 느낄 때도 많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고리타분해도 이렇게 진부하고 태만한 방식이 나의 감성인 걸. 뭔가 폼나는 사람처럼 급진적이고 싶고 세련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태만함은 나의 감성이고, 그러니 결국 태만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LGBT/퀴어 운동의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LGBT/퀴어는 지금 이 사회의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주의로 차별과 억압을 겪고 있다는 방식의 언설로는 더 이상 운동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없다. 벌써 몇 년 전부터 그런 시대로 변했다. LGBT/퀴어가 겪는 차별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글쓰기, 강연, 캠페인과 같은 운동을 성공으로 이끌기 힘든 시대다. 슬프게도 이것은 이미 많은 활동가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이를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는 별개고). 운동의 방식이, 발화의 형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너와 내가 겪는 차별이나 억압이 어떻게 공통의 경험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공통의 경험, 모든 개인은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복잡한 범주로 삶과 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언설은 무척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정치학은 지금 이 새대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체화되지 않았다. 삶에서 나온 이 성찰은 많은 경우 이론적 언어일 뿐 구체적 삶과 무관하다고 잘못 이해되기도 하다. 문제는 개인 범주의 복잡성이 지금 이 시대의 한국 사회에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맥락은 상당히 다르다. 과거엔 어땠는지 몰라도 오늘날, “LGBT/퀴어는 차별을 겪는다”란 언설엔 “이성애자인 나도 차별을 겪는다”라고 반응한다. 이런 식의 반응에 동조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지금은 대충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사회에서 비이성애-트랜스젠더는 차별받고 있고 이성애-비트랜스젠더는 이를 고민해야 한다”란 언설은 큰 효과를 갖기 힘들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문제 삼는다고 이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점은 견고하게 유지하되, 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바꿔야 한다. 비이성애-트랜스젠더가 겪는 억압이나 차별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가 살면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 억압 혹은 차별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경험을 유사한 서사로 재구성해서 상당한 접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회구조적 맥락(혹은 최소한 ‘너도 나도 다 차별 받으니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 방향)에 초점을 전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것은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유는 지난 4월에 했던 특강에서 이것의 초기 판본을 시도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건 차별을 겪는다. 그렇기에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발생하는 차별 경험을 유사한 사건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설명 방식, 혹은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렇게 믿는다.

정치적 외로움

정치적 외로움.

이곳에 오는 분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각자의 방식으로 떠올리며 공감할 것 같다. 정치적 외로움. 다른 많은 친밀한 관계에서 얻는 사랑이나 힘과는 별개로 정치적 입장에서, 이론적 사유에서 나 혼자 뿐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분명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 이슈로 계속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지는 않을 때 느끼는 어떤 서운함과 외로움, ‘난 지금 뭐하고 있나’ 싶은 감정 말이다.

이를 테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상당한 관심이 있거나 그 자신 트랜스젠더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종종 어떤 기대를 한다.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공부해서 글을 쓰고 떠들면 좋겠다고. 재능도 있어서 그 기대는 더 커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다른 이슈에 더 관심을 가질 때 어쩐지 서운하고 섭섭하다. 그렇다고 또 이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는 없다. 누군가 특정 주제를 파고 들며 발화를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때때로 나는 어떤 이슈가 매우 문제가 많다고 화를 내는데 이 감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 문제 의식을 갖지 않을 때 당혹스럽기도 하다. 나만 뭔가 이상한 건가, 혹시 내가 오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정치적 외로움. 이 말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다른 말로 LGBT/퀴어 정치학이라고 해도 어떤 이슈는 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다른 어떤 이슈는 인식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다. 동성(애자의) 결혼은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마치 한국 LGBT 공동체에 속하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관심이 있을 것처럼 얘기된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소수만,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아니며 별관심이 없는 사람도 약간 언급은 하는 그런 이슈가 된 것 같기는 하다. 트랜스젠더 정치가 중요하다는 인식 혹은 불쌍한 트랜스젠더를 도와야 한다는 수준의 인식 정도는 생긴 것 겉다. 바이/양성애 정치는 전혀 아니다. 소수가 혹은 소수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이 얘기하지만 LGBT/퀴어 공동체에서 회자되는 방식은 ‘문제로서, 논쟁의 대상인 바이’로만 존재한다. 바이가 아니면서 바이를 떠드는 사람의 자기 위치는 안전하다. 아울러 바이는 여전히 비난의 대상으로, 비정치적 존재로 내몰린다. ‘바이/양성애’가 존재함은 아는 것 같지만 바이/양성애 인식론을 사유하는 경우는 사살상 없다(극소수만 얘기할 뿐). 퀴어의 BDSM은? 같이 이야기하기는커녕 어떤 퀴어 모임은 BDSM을 거부한다. 퀴어 정치가 단지 성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째서? 무성애 정치학은? 인터섹스 정치학은? 극소수만 얘기하고 사유할 뿐 대체로 LGBTAIQ라고 하니 궁금한 집단일 뿐이다.

한국엔 어떤 공동체가 있을까? 존재는 있는데 인식론이 없다면 그것은 무슨 공동체고 어떤 정치학인 걸까. 늘 얘기하지만 동성애가 전부는 아니다. 동성애자의 삶이 먼저 좋아지면 BTAIQ도 자연스레 좋아지고 그런 게 아니다. 때론 동성애자와 그렇게만 묶을 수 없는 존재의 이해가 경합하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퀴어, 퀴어라며 말하지 말고, 정말 퀴어하게 복잡하게 사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정확하게 나를 포함해서 하는 얘기다). 정치적 외로움을 조금은 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