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 시간적 존재로서 타자: 사람책

지난 토요일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 팀)과 이화여자대학교 변태소녀하늘을날다, 두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2013 LGBT 상담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그냥 참가만 한 건 아니고, 사람책 세션에서 사람책으로도 참가했다. 10여 분 정도가 책으로 참가했고, 각자 자신만의 주제를 정했는데 나는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채식하는 트랜스젠더”였다. 무척 재미 없는 주제라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대출률 0을 기대했는데!!!) 이 목표는 실패했고.. 관련 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고..

40분씩 총 두 번을 했는데, 두 번째 대출 말미에 한 분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잉여롭게 사는 거요”라고 답했다. 사실 이건 앞으로 꼭 살고 싶은 방법이다. 난 잉여롭고 빈둥빈둥거리며 살길 바란다. 특히 이 날 점심 때 햇살 좋은 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그저 이런 여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간절했다. 그랬기에 잉여롭게 사는 건 나의 꿈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하고 싶은 것도 여럿 있으니 그것 중 하나를 얘기했는데,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는 트랜스젠더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원하는 작업이었고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 학업계획서의 주제 중 하나로 제출한 이슈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두근거리면서 작업하는 일이기도 하고. 새로운 기록물을 발굴하면 혼자 좋아서 덩실덩실했다가, 그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했다가, 다시 읽으니 괜찮아서 또 좋아했다가.. 과거 흔적과 기록물을 발굴하고 역사를 쓰는 작업은 늘 즐겁고 좋은 일이라 박사학위논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작업 중 하나기도 하다. 특히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행사를 계기로 간단한 원고를 쓰면서 요즘 역사쓰기엔 좀 더 버닝하고 있는 상황인데…

나는 역사쓰기가 트랜스/젠더/퀴어가 마치 근래에 등장한 존재로 독해되는 지점에 문제제기하며 그 역사를 복원하고, 기존의 역사를 재구성/상대화하는 작업이라고 믿고 있다. 즉, 퀴어의 역사화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퀴어화다. 늘 여기까지만 고민했는데..

적어도 9월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번 학기에 “여성과시간”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과 관련한 고민을 자주 한다. 그러며 나는 늘 시간을 말해왔지만 그럼에도 시간적 사유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등 고민을 확장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민이 역사쓰기와 결합하자 역사 쓰기의 또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다름 아니라 시간적 존재로 타자를 이해함이다.

많은 경우, 타자는 시간이 없는 존재로 독해된다. 예를 들어 오랜 만에 만난 지인이 트랜스젠더나 바이/양성애자, 동성애자 등에게 “넌 아직도 그렇게 사니?”라고 말하며 철없는 존재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퀴어를 비롯한 타자를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 여김과 같다. 혹은 케냐의 어느 부족의 삶을 TV 다큐멘터리로 본 다음, 그 다큐멘터리가 언제 제작되었는지와 상관없이 그 부족에 대해 혹은 케냐에 대해 안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것은 그 부족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에서 재현한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으며 그 부족을 시간 없는 존재로 박제함과 같다.

역사를 쓴다는 건 타자를 시간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역사 쓰기의 중요한 의미기도 하단 걸, 깨달았다.

뭐.. 대충 이런 얘길, 사람책 말미에 했다. 이렇게 정리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하하. ;;

타자에게 시간은 있는가, 혹은 분석틀로서 시간을 사유하기

수업 때 쓴 글입니다. 매주 한 편 씩 써야 해서 일주일에 한 편은 쪽글로 지나갈 수 있는 그런 행운이.. 으하하. ;;
제 입장에서 이 글의 핵심은 첫 번째 문단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내용 정리에 가까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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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화. 15:00- 수업쪽글
타자에게 시간은 있는가, 혹은 분석틀로서 시간을 사유하기
-루인
그러고 보면 과정분석이나 생애사연구만이 시간을 고려하는 연구는 아니다. 젠더 개념과 젠더 수행성을 둘러싼 연구 및 논쟁 역시 시간 개념을 중요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는 그의 유명한 책 <젠더 트러블>에서, “시간 속에서”[in time] 젠더를 체화하고 또 수행한다고 얘기했다. 나 역시 다른 곳에서, 젠더는 일생에 걸쳐 전혀 다르게 구성될 수 있으며, 어떤 개인이 현재 재현하는 젠더 표현으로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예단하고 판단해선 안 된다고 얘기했다. 젠더 수행성 개념 및 젠더 분석만이 아니다. 트랜스/젠더/퀴어는 이 사회에서 매우 자주 미성숙한 존재로 명명된다. 많은 정신분석학자와 심리학자가 퀴어는 어린 시절 특정 단계의 고착이나 애착 경험으로 규범적 이성애자로 성장하지 못 한다고 애기한다. 트랜스/퀴어는 이성애의 발달 단계 중 어느 찰나/시간에 머물고 있는 퇴행적 존재에 해당한다는 식이다. 이것은 퀴어가 언제나 시간성 개념과 긴밀함을 뜻한다. 퀴어만이 아니다. 내게 익숙한 논의 지형인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언제나 시간적 개념이다. 젠더 수행과 섹슈얼리티 실천에 있어 시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인간이 태어난 바로 그 특정 시점에 완벽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파비안의 지적처럼 시간 역할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젠더가 시간 속에서 수행되고 체화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인식하지 못 했다는 건, 시간이 자연적 개념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자연화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시간을 얘기하는 것과 시간을 사유하는 건 다르다. 시간 논의에 있어서 로살도와 파비안은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시간을 어떻게 사유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로살도에게 문화인류학 연구에서의 과정분석은 “진리에 대해 독점권을 주장하는 틀들을 거부”(158)하는 것이다. 인류학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저명한 인류학자들은 기존/주류 연구 방법에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주류/기존 연구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두터운 기술을 하고도 사회 제어기제나 사회구조의 원리를 더 강조하는 빈약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렇다고 과정연구가 제어기제에 대한 연구를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연구를 탈중심화하고 “진리에 대한 주장을 객관주의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171)이라고 분명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사회의 규정적 양식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어떤 관습적 양식이 행위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구도 삶도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걸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시간을 탈락하는 연구는 “정치학과 문화적 의미를 제거”(179)할 뿐이다.
파비안은 기존 인류학 연구에서 동시대성/같은시간성coevalness을 무시하는 방법을 논한다. 하나는 문화적 상대성을 이용해서 동시대성을 자기 수준으로 포위하는 것(circumvent)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있는 차원으로서 시간을 삭제하며 선점하는 것(preempt)이다. 많은 고전적 인류학 연구는 타 문화를 문화적 상대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자면서도, 자신의 시간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그리하여 타 문화권의 삶을 ‘잃어버린 고리’와 같은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통해 시간을 논한다. 파비안은 이것이 실질적으로는 시간을 박제하고 시간을 배제/추방(exorcise)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타자와 내가 동시대성을 살아간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런 태도는 결국 거리두기며, 시간을 자연화하는 것과 같다. 파비안은 시간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연구는 또 다른 식민주의 연구라고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타자에 대한 글쓰기, 시간을 사유하는 글쓰기가 중요하다. 민족지적 현재시제(ethnographic present)를 논하는 파비안은, 생산적 경험 연구는 연구자와 연구참여자가 시간을 공유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연구참여자를 재현할 때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연구자와 연구참여자의 시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지적이다.
연구에서, 그리고 사유에서 시간 개념을 반드시 염두에 두는 자세는 나와 타인의 관계성을 고민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와 타인을 어느 한 찰나에 고착시키지 않으려 함과 같다. 변화가 자연의 질서라면, 시간이 개인의 삶에, 사회문화적 생활에, 그리고 젠더 범주를 수행하는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누락된 연구와 글쓰기는 결국 글을 쓰는 나 자신을 성찰하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