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아 멈추어라, 그리하여 흘러라: 글을 쓰는 시간

가급적 새로운 글을 쓰려고 했는데 오늘 수업과 뒷풀이로 늦게 귀가하기도 했고, 머리를 잠깐 비우고 싶기도 해서 수업 쪽글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을 주제로 쓴 글입니다. 가장 행복한 시간, 그래서 영원히 변하지 않길 바라는 순간은 시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찰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궁금한데 여러분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언제 내가 시간적 존재라는 걸 느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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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2.화. 15:00-18:00
시간아 멈추어라, 그리하여 흘러라: 글을 쓰는 시간
-루인
며칠 전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카페에 머물렀다. 비는 시간이 길었기에 책을 읽었다. 한 뼘 남짓의 광활한 페이지 어느 한 문장에서 나는 오랜 시간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고민의 실마리를 잡았다. ‘아, 그래, 이거였어.. 그렇지, 그래..’ 이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나는 그 찰나에 그대로 멈춘 느낌을 받았다. 고민의 실마리가 풀리는 그 찰나(비단 그날 뿐만 아니라) 나는 시공간에서 붕 떴다고 느꼈다. 이 찰나에 나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고 느끼고, 또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이 상태가 지속되길 바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고 느끼는 순간에(사실 이런 순간은 매우 잦다) 나는 내가 시간을 사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다. “시간아, 멈추어라!” 외마디 비명 같기도 하고, 환희의 순간 같기도 한 이 말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가장 예민하게 인식하는 찰나에서 나온다. 불가능하단 걸 알기에 간절하게 혹은 음미하듯 욕망한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언어와 글쓰기는 내 삶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이 문장은 두 가지 다른 시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삶을 나 자신에게 설명하고자 했고 내가 처한 ‘현재’ 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다(이 문장은 현재시제로 바꿔 써도 무방하단 점에서 과거시제 형식을 취한 현재시제다). 또한 나는 설명과 해명을 요구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 관해, 혹은 나와 결코 같지 않지만 비슷한 점은 있는 이들에 관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나는 설명과 해명을 요구받지만 그렇다고 써야 하는 글을 쓰지는 않는다. 나는 글을 쓴다. 책을 읽고 고민의 실마리를 잡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글쓰기는 내 삶의 행복이다.
내게 글쓰기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 순간으로 불러들이며 ‘현재’와 과거가 조우하는 찰나를 기록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내게 말하기와 글쓰기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말하기는 뒤늦게 느끼는 분함, 때늦은 따짐을 용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며칠 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일을 여러 날 지난 뒤 갑자기 화내며 따진다면 그건 대체로 황당한 일로 이해된다. 아니, ‘그때 제대로 따질 걸 왜 그냥 넘어갔을까’, ‘그때 왜 그랬을까?’라며 뒤늦게 분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자책할 뿐이다. 분함의 대상이 원인을 제공한 상대에게서 나로 전환되는 찰나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다르다. 글쓰기에선 언제나 과거 시간을 마치 현재 사건인 것처럼 기술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글쓰기는 거의 언제나 과거 사건을 기술하는 작업이며 매우 가치지향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 특징은 글쓰기를 매우 중요한 저항의 도구로 만든다. 글쓰기의 특징이라고 얘기하는 비동시성은 지배규범이 비규범적 존재를 타자화하고 박제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이런 특징으로 비규범적 존재, 사회적 타자는 지배 규범에 문제제기하고 ‘역사적’ 잘못을 따질 수 있다. 누군가는 이미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말해 무엇하냐고 말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이미 지난 일을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하여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자 과거로 흘러간 시간을 직면할 수 있고 또 직면하도록 하는 순간이다.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글을 쓰는 시간은 책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는 시간과 함께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글을 쓰는 시간은 내가 구원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일이 쉽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날은 글이 도저히 안 풀려서 온 종일 서성거리기만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어려운 순간 조차 내겐 행복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감사한 일이기에, 글을 쓰면서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행복과 구원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 시간적 존재로서 타자: 사람책

지난 토요일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 팀)과 이화여자대학교 변태소녀하늘을날다, 두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2013 LGBT 상담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그냥 참가만 한 건 아니고, 사람책 세션에서 사람책으로도 참가했다. 10여 분 정도가 책으로 참가했고, 각자 자신만의 주제를 정했는데 나는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채식하는 트랜스젠더”였다. 무척 재미 없는 주제라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대출률 0을 기대했는데!!!) 이 목표는 실패했고.. 관련 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고..

40분씩 총 두 번을 했는데, 두 번째 대출 말미에 한 분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잉여롭게 사는 거요”라고 답했다. 사실 이건 앞으로 꼭 살고 싶은 방법이다. 난 잉여롭고 빈둥빈둥거리며 살길 바란다. 특히 이 날 점심 때 햇살 좋은 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그저 이런 여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간절했다. 그랬기에 잉여롭게 사는 건 나의 꿈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하고 싶은 것도 여럿 있으니 그것 중 하나를 얘기했는데,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는 트랜스젠더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원하는 작업이었고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 학업계획서의 주제 중 하나로 제출한 이슈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두근거리면서 작업하는 일이기도 하고. 새로운 기록물을 발굴하면 혼자 좋아서 덩실덩실했다가, 그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했다가, 다시 읽으니 괜찮아서 또 좋아했다가.. 과거 흔적과 기록물을 발굴하고 역사를 쓰는 작업은 늘 즐겁고 좋은 일이라 박사학위논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작업 중 하나기도 하다. 특히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행사를 계기로 간단한 원고를 쓰면서 요즘 역사쓰기엔 좀 더 버닝하고 있는 상황인데…

나는 역사쓰기가 트랜스/젠더/퀴어가 마치 근래에 등장한 존재로 독해되는 지점에 문제제기하며 그 역사를 복원하고, 기존의 역사를 재구성/상대화하는 작업이라고 믿고 있다. 즉, 퀴어의 역사화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퀴어화다. 늘 여기까지만 고민했는데..

적어도 9월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번 학기에 “여성과시간”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과 관련한 고민을 자주 한다. 그러며 나는 늘 시간을 말해왔지만 그럼에도 시간적 사유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등 고민을 확장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민이 역사쓰기와 결합하자 역사 쓰기의 또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다름 아니라 시간적 존재로 타자를 이해함이다.

많은 경우, 타자는 시간이 없는 존재로 독해된다. 예를 들어 오랜 만에 만난 지인이 트랜스젠더나 바이/양성애자, 동성애자 등에게 “넌 아직도 그렇게 사니?”라고 말하며 철없는 존재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퀴어를 비롯한 타자를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 여김과 같다. 혹은 케냐의 어느 부족의 삶을 TV 다큐멘터리로 본 다음, 그 다큐멘터리가 언제 제작되었는지와 상관없이 그 부족에 대해 혹은 케냐에 대해 안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것은 그 부족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에서 재현한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으며 그 부족을 시간 없는 존재로 박제함과 같다.

역사를 쓴다는 건 타자를 시간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역사 쓰기의 중요한 의미기도 하단 걸, 깨달았다.

뭐.. 대충 이런 얘길, 사람책 말미에 했다. 이렇게 정리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