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연재…: 임의 삭제 문제

주간지가 나온지 며칠 안 되었고 잡지로 정독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테고, 그 중에서 저를 아는 분은 더 적을 테니… 수줍게 말하자면 이번 주부터 <한겨레21>에 퀴어 혹은 LGBT 이슈로 칼럼 연재를 합니다. 혼자 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기획 제목으로, 저를 포함한 총 네 분이 격주로 연재를 합니다. 즉, 제가 이번에 글을 썼다면 그 다음은 8주 지나서라는.. 흐흐흐. 지면 개편에 맞춰 기획자가 처음엔 매주 연재를 원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는 안 되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생략..)

암튼 그리하여 한겨레21에 연재를 시작했는데요… 처음엔 무덤덤했습니다. 그냥 글 쓰나보다, 고료 나오면 넥서스7 구매해야지, 정도의 감흥이었는데요.. 정작 잡지가 나올 즈음, 이제까지 등록출판물 + 소위 주류 매체에서 퀴어 혹은 LGBT 이슈에만 집중해서 칼럼을 연재한 경우가 있었나 싶어서 당황하기도 했다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닙니다. 사실 이곳에 별도의 글로 연재 사실을 밝히지 않으려 했습니다. WRITING 메뉴엔 이미 적었지만요..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투고한 형태와 실제 출판된 형태 사이에 간극이 발생해서 입니다. 그것을 굳이 따지거나 항의하진 않을 계획입니다. 이 이슈는 나중에 아예 별도의 칼럼으로 쓰면 되니까요. “왜 임의로 바꿨냐?”-“다음엔 안 그러겠다”-“알았다”라는 구조가 아니라 좀 다른 식으로 이 이슈를 다뤄야겠다 싶거든요. 그래서 뭐가 문제냐고요?
이성애자가 아닌 것 같으면 그땐 그냥 동성애자일 뿐이다. 양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S/Mer인지, 무성애자인지, 다른 어떤 성적 지향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이성애자가 아닌 것 같으면 그땐 그냥 동성애자일 뿐이다. 양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무성애자인지, 다른 어떤 성적 지향을 가졌는지 구분하지 않는다.
주간지의 경우, 문장 종결 등을 임의로 바꾸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성적 지향을 소유물로 바꿨네요. 이것 말고도 바뀐 부분이 좀 많은 듯합니다. 그냥 쭉 읽었을 때, 제가 쓰지 않는 문장이 종종 튀어나왔거든요. (몇몇 부분은 다음에 투고할 때 말해야겠네요…) 그리고 S/Mer를 임의로 삭제했습니다. S/M을 성적 지향으로 이해할지, 성적 실천으로 이해할지 혹은 어떻게 명명할지는 별개의 논의라고 해도, 이렇게 임의 삭제는 당혹스럽지요. 그래서 아예 이 이슈를 한 문단 이상으로 다루는 칼럼을 투고하려고요. 물론 바로 다음은 아니고요. 다음에 쓸 주제는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아.. 그래서 이번 칼럼의 제목은 “그런즉 외모로 젠더를 예단 말지니”(제981호, 2013.10.14.)입니다. 기사와 칼럼의 제목은 잡지사에서 정하는데, 아, 제목 정말…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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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의 제보를 통해..
벌써 온라인 판이 나왔네요..
http://goo.gl/XuwR7F  <- 한겨레21 페이지의 웹판본입니다.
http://goo.gl/aGfGwY   <- 한겨레 페이지의 웹판본입니다.
어찌하여 두 판본의 편집과 제목이 다릅니다… ;;;
기본 서지사항은 종이인쇄본을 따랐고 이는 writing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013.10.09.22:30 추가

잡담.. : 광주비엔날레, 트랜스젠더 연구자 등장?, 시사인-무지

어제 말했던 글 대신…

몇 년 전 유럽 어느 나라의 작가와 인터뷰를 했고 그걸 동영상으로 찍은 적 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퀴어 활동가와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그것이 검색하면 찾을 수 있는 사이트에 게시되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사실 거의 잊고 지냈다.
그리고 얼마 전, 해당 작가가 이메일로 이번에 광주비엔날레에 해당 작품으로 초청받았다면서, 동영상을 전시해도 괜찮냐는 질문을 보내왔다. 잠시 고민하고선 그러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흠.. 지금 문득 떠올리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싶다. 광주비엔날레가 예전처럼 그렇게 큰 화제를 모으는 느낌이 아니라 상관없다고 했지만.. 흠.. 모르겠다.
혹시나 광주비엔날레에서 저를 만나시거든.. 못 생긴 얼굴에 눈 버렸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인증 사진 좀.. 굽신굽신.. 흐흐흐.
내가 다니는 학교에..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등장했다.
다니는 학교 도서관에 트랜스젠더 관련 도서가 별로 없어서 꾸준히 주문하고 있고, 그 중 아직 내가 소장하지 않은 책은 대출해서 장기;; 보관하고 있는데.. 지난 달부터인가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여러 책을 예약했다는 메일이 왔다. 그 중엔 그냥 대중적으로 유명해서 그러려니 하는 책도 있지만… 어지간하면 찾지 않는 책을 예약한 메일에, 뭔가 촉이 왔다.
그리고 어제 책 몇 권을 반납 후 재대출하려고 했는데.. 어랏.. 역시나 많이 찾지 않을 법한 책을 동일 인물이 예약했다고 나왔다.
누구지? 누굴까?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로 본격 공부하려는 걸까, 아니면 특정 프로젝트에 따른 한시적 관심일까? 이미 아는 사람인 걸까, 모르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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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몰라.. 거.. Transgender Identity 예약해서 대출하신 분, 여기도 오시려나요?
11월이면 일주기라 뭔가를 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시사인의 기자가 한무지와 관련한 글을 썼다. “그/그녀”라고 써야 했는지 묻고 싶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묘한 느낌이다. 사실.. 아직도 이곳 리퍼러로그, 유입키워드는 무지가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온라인판으론 안 나왔으니 사진으로 찍어 첨부한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 시간적 존재로서 타자: 사람책

지난 토요일에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의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 팀)과 이화여자대학교 변태소녀하늘을날다, 두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2013 LGBT 상담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그냥 참가만 한 건 아니고, 사람책 세션에서 사람책으로도 참가했다. 10여 분 정도가 책으로 참가했고, 각자 자신만의 주제를 정했는데 나는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채식하는 트랜스젠더”였다. 무척 재미 없는 주제라 아무도 안 올 줄 알았는데(대출률 0을 기대했는데!!!) 이 목표는 실패했고.. 관련 더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고..

40분씩 총 두 번을 했는데, 두 번째 대출 말미에 한 분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잉여롭게 사는 거요”라고 답했다. 사실 이건 앞으로 꼭 살고 싶은 방법이다. 난 잉여롭고 빈둥빈둥거리며 살길 바란다. 특히 이 날 점심 때 햇살 좋은 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그저 이런 여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간절했다. 그랬기에 잉여롭게 사는 건 나의 꿈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하고 싶은 것도 여럿 있으니 그것 중 하나를 얘기했는데,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다.
트랜스/젠더/퀴어 역사 쓰기는 트랜스젠더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원하는 작업이었고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 학업계획서의 주제 중 하나로 제출한 이슈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두근거리면서 작업하는 일이기도 하고. 새로운 기록물을 발굴하면 혼자 좋아서 덩실덩실했다가, 그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했다가, 다시 읽으니 괜찮아서 또 좋아했다가.. 과거 흔적과 기록물을 발굴하고 역사를 쓰는 작업은 늘 즐겁고 좋은 일이라 박사학위논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작업 중 하나기도 하다. 특히 이번 주 금요일에 있을 행사를 계기로 간단한 원고를 쓰면서 요즘 역사쓰기엔 좀 더 버닝하고 있는 상황인데…

나는 역사쓰기가 트랜스/젠더/퀴어가 마치 근래에 등장한 존재로 독해되는 지점에 문제제기하며 그 역사를 복원하고, 기존의 역사를 재구성/상대화하는 작업이라고 믿고 있다. 즉, 퀴어의 역사화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퀴어화다. 늘 여기까지만 고민했는데..

적어도 9월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번 학기에 “여성과시간”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과 관련한 고민을 자주 한다. 그러며 나는 늘 시간을 말해왔지만 그럼에도 시간적 사유를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등 고민을 확장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민이 역사쓰기와 결합하자 역사 쓰기의 또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다름 아니라 시간적 존재로 타자를 이해함이다.

많은 경우, 타자는 시간이 없는 존재로 독해된다. 예를 들어 오랜 만에 만난 지인이 트랜스젠더나 바이/양성애자, 동성애자 등에게 “넌 아직도 그렇게 사니?”라고 말하며 철없는 존재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퀴어를 비롯한 타자를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 여김과 같다. 혹은 케냐의 어느 부족의 삶을 TV 다큐멘터리로 본 다음, 그 다큐멘터리가 언제 제작되었는지와 상관없이 그 부족에 대해 혹은 케냐에 대해 안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것은 그 부족이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에서 재현한 모습과 같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으며 그 부족을 시간 없는 존재로 박제함과 같다.

역사를 쓴다는 건 타자를 시간적 존재로 재구성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역사 쓰기의 중요한 의미기도 하단 걸, 깨달았다.

뭐.. 대충 이런 얘길, 사람책 말미에 했다. 이렇게 정리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