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논하는 퀴어이론인가: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

2012년 09월 20일에 제출한 글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수업 쪽글이고요. 그냥 묻어버리기보다 기록으로 남겨야지 싶어 여기 공개합니다.
서지사항을 작성해야 한다면
루인. “누가 논하는 퀴어이론인가: 동성애규범성” Run To 루인 2012.09.20. 웹. 2012.09.22.
정도가 되려나요? MLA 기준에 따르면 글을 공개한 날짜와 해당 웹페이지에 접근한 날짜를 적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개 날짜가 이틀 늦은 것 뿐이고 이후 수정할 가능성이 없으니 날짜를 저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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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논하는 퀴어이론인가: 동성애규범성
-루인
1973년 동성애 활동가와 그 지지자의 노력으로 DSM에서 ‘동성애’ 항목이 빠졌을 때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1980년 GID가 DSM에 추가되었을 때 이 항목은 트랜스젠더를 진단하는 범주로만 이해되었다.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Eve Kosofsky Sedgwick)은 동성애자 활동가가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분하는 새로운 접근법에 따라 GID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한다(20). 많은 동성애자 활동가가 GID와 동성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여성스런 남자아이 혹은 젠더 비순응적 남자아이와 성인 게이를 분리하였다. 이런 식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구분은 동성애 이슈를 섹슈얼리티 이슈로 수렴했고 게이, 레즈비언의 남성 혹은 여성이란 젠더 범주는 안정적이며 ‘대상 선택’이 주요 이슈라고 주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동성애자 활동가가 GID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칼 브라이언트(Karl Bryant)에 따르면 일부 동성애자 활동가는 GID, 특히 아동의 GID(GIDC)가 1973년 동성애가 빠진 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GIDC가 아동 동성애자를 정신병으로 진단하기 위한 범주며, 성인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막연한 비판과 우려가 아니었다. 세지윅도 논하고 있는 리처드 그린의 장기 추적 연구에 따르면, GIDC 진단을 받은 이의 ¾이 게이나 바이로 자랐다. 이 연구를 빌미로 많은 동성애자 활동가가 GIDC 삭제를 주장했다. 다른 한편, 일부 의사 집단은 GIDC가 동성애 예방을 의도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며 반박했다. 리처드 그린은 동성애자 되기를 예방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는데(Sedgwick, 24) 이것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린을 비롯한 이들은 GDIC가 치료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며, 자신들은 젠더를 치료하지 섹슈얼리티는 치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책에서 그린은 “그런 개입은 트랜스섹슈얼과 트랜스베스타잇을 미연에 방지한다. 하지만 성적 지향은 고려하지 않으니 아이가 성장하면 동성애자가 된다”(Bryant, 466)고 주장했다. 그린의 주장에 따르면 동성애는 치료와 예방의 대상은 아니지만 트랜스젠더는 치료와 예방의 대상이며, 트랜스젠더에게 적절히 개입하면 동성애자가 된다는 주장과 같다.
세지윅과 브라이언트 모두가 지적하듯, GIDC의 또 다른 문제점은 남자아이의 여성성을 병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GIDC는 동성애 남자아이의 남성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게이로 자라건, 이성애자로 자라건 남성성을 적절히 실천한다면 성적지향은 문제가 안 되거나, 큰 문제는 아니다. 음경을 지닌 사람이 여성성을 실천하는 것이 문제다. GIDC는 음경을 지닌 사람의 여성성을 정신병리화하고 있으며 이것을 치료하여 규범적 남성을 생산하고자 한다. 브라이언트는 이를 두고 GIDC가 “동성애 근절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적이고 퀴어하지 않은 형태의 동성애를 생산”(469)한다고 지적했다. 실재 GIDC 논쟁에서 핵심은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의 구분이 아니다. 어떤 규범을 생산하고자 하는가가 핵심이다. 이성애규범성에 문제제기하지 않으면서, 문화시민인 동성애자를 적법한 주체로 만들고 중산층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젠더-섹슈얼리티 실천을 배제하는 행위, 즉 동성애규범성에 문제제기가 세지윅과 브라이언트 논의 모두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GIDC 논의에서 트랜스젠더는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구분과 겹침 논쟁이기도 하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관계는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언제나 모호하고 불분명한 경계를 만든다. 이를 테면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명하게 분리할 때 LGB의 젠더 이슈는 은폐되거나 누락되고, 그것은 섹슈얼리티 이슈로 수렴된다. 게이나 레즈비언, 바이의 젠더표현이 문제가 된 사건이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로만 독해된다. 그리하여 LGB와 T가 겪는 유사한 차별 경험이 별개의 경험으로 분리되고 서로 무관한 사회적 맥락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오인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구분하지 않을 때, 특히 젠더를 섹슈얼리티의 일부로 이해할 때 T는 LGB의 변종, 기이한/새로운/신종 성적 취향, 혹은 이성애자되기 기획일 뿐이다. 그리하여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삶, 게이와 mtf, 레즈비언과 ftm의 경계 분쟁을 설명하기 힘들게 만든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트랜스젠더 몸에서 분리할 수도 없고 등치할 수도 없는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퀴어이론은 젠더 이론인가 섹슈얼리티 이론인가라는 논쟁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복잡한 관계를 누락할 우려가 있다. 퀴어이론을 섹슈얼리티 이론으로 전유한다면 이것은 누가 얘기하는 퀴어이론인가? 누구의 경험만을 ‘퀴어한’ 경험으로 전유하려는 것인가? 만약 동성애자의 경험을 이성애자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의 대표 아이콘으로 특권화하며 특정 동성애 경험을 제외한 다양한 비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 실천을 주변화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퀴어이론의 지속적 발달은 퀴어이론을 백인 중심의 동성애 이론으로 전유하고, 트랜스젠더를 혐오하고 배제했던 역사와 담론에 근본적으로 도전한 이들의 성과를 밑절미 삼는다. 그래서 퀴어이론은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규범성을 비롯한 규범적 사유, 이론, 언어를 문제삼으며 발달했다. 이런 점에서 세지윅이 게이와 레즈비언의 기원에 관한 안정적 이론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26), 퀴어이론의 토대가 섹슈얼리티 이론일 이유도 없고 안정적 토대를 찾을 수도 없다.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 트랜스젠더

01

8월까지는 어떻게든 초벌을 완료해야 하는 일이 있어 공부는 포기하고 그 일만 하고 있다. 그 일만 하니 정신이 혼미하여 이름 뿐인 트랜스젠더연구소라도 하나 만들까라는 망상을 한다. 명함을 하나 만들고 나를 소개하는 구절로 “트랜스젠더연구소 소장” 혹은 “트랜스젠더연구소 대표”라는 식으로 홍보하는 거지. 심지어 글을 출판할 일이 있으면 이름 옆에 “루인(트랜스젠더연구소)”라고 쓴다거나. 크크크.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단체. 그저 이름만 있는 단체.
물론 망상입니다. 현실을 도피하다보면 이렇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도 합니다. ;ㅅ;
이제 정신 차려야지요.. ㅠㅠ
하기 싫은 일은 아니고 너무 재밌는 일이지만 진도가 더디니 이런 망상도 하네요. 흐흐.
02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를 소개한 글이 출판되었습니다. 잡지는 지난 6월에 나왔고 PDF는 지난 주에 나왔고요. 언제나처럼 WRITING 메뉴에 있습니다.
수잔 스트라이커라는 트랜스젠더 이론가를 소개한 글입니다. 역사학자면서 트랜스젠더 이론의 발달에 상당히 중요한 공헌을 했지요. 제가 하앍하앍하며 좋아하는 이론가, 저자기도 합니다. 흐흐. 소개 내용은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역사, 동성애규범성입니다. 나열한 단어만으론 별개의 내용 같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자세한 건 그냥 글을 참고해주셔요. ;;;;;;;;;;
(소개글을 요약할까 하다가 급 귀찮아서요. 크. )
03
그러고 보면 이 블로그를 운영한지도 7년이 넘었네요. 2005년 8월 11일부터 시작했으니까요. 초기 몇 년은 한 달에 글 50편을 쓸 때도 있었는데 이젠 10편도 안 쓸 때가 많네요. 그렇다고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애정은 여전합니다. 제가 꾸준히 사용하는 유일하게 꾸준히 사용하는 공간이고요. 그냥 고민이 많은 거겠죠. 그렇다고 믿으려고요.
참, 저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요. 모바일에서 제 블로그에 들어올 경우, 아이폰 계열에선 자동으로 모바일 버전으로 전환하지만 안드로이드 버전에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근데 별도의 방법이 있더라고요. 별다른 것은 아니고 https://www.runtoruin.com/i 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주소 뒤에 빗금 하나 치고 i만 추가하면 됩니다. 전 이걸 이제 알았어요.. ;ㅅ;

이것이 내가 하는 말: 시건방진 트랜스젠더

01

좀 건방지게 말하자. 나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성취한 인식론적 토대의 수혜자면서 바로 그 인식론에 저항해야 하는 도전자다. 페미니즘은 학제에서 비규범적 존재가 자신의 위치로 기존 학제를 다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문제 삼는 바로 그 질문의 토대를 문제삼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이성애-비트랜스젠더를 밑절미 삼는다. ‘여성’이란 토대는 여전히 견고하다. 견고할 뿐만 아니라 집요하게 고집하는 근본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와 노력에 포섭될 수도 없고 내쳐질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예외로는 머물 수 있지만 예외로만 머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예외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로 인해, 꼭 내가 아니라도 트랜스젠더를 인식하며 인식론적 토대, 존재론적 토대 자체를 바꾸길 바란다. 이것이 내가 나를 전시하고 공개하는 이유다. 내가 아니라 젠더란 범주, 여성-남성으로 나뉜 공간을 새롭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지 나의 편의가 아니다. 예외로 머무는 한 나는 편하지 않다. 솔직하게 말해 더 불편하다. 내가 제공 받은 편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편의를 제공하는 사람이 것이다. 내게 편의를 제공하려고 애쓴 분의 노력을 폄훼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에겐 언제나 고마울 따름이다. 그저 그 분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 행동이 의도하지 않게 유지하는 토대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예외로 포섭될 때, 젠더 이분법을 유지하려는 토대는 온전한 형태로 유지된다. 세상은 여성 아니면 남성 뿐이라고 인식하는 방식은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유지된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바라지 않는다.
02
가장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급진성을 사유할 것.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급진적으로 사는 것이다.
03
어제 처음으로 김비 님을 뵈었다. 글은 여러 편 읽었지만 직접 뵙고 강의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또 성찰이 반짝이는 말이라니!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태도의 문제와 끊임없이 연결하는 말하기 방식은 보통의 내공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 김비 님의 삶을 말로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나중엔 또 어떤 식의 삶을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금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활자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트랜스젠더 이슈를 말하고 있어서 고마웠다.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김비 님이나 하리수 님과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공적 인물이 아무도 없던 시기에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이후에 등장했고 그래서 조금은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참고로 02번의 말은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란 책 제목과도 관련 있다. 이 얼마나 끝내주는 제목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