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퀴어 킥] 후기

아무래도 후기를 쓰고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할 말이 없다. -_-;; 포럼이 별로여서가 아니라 워낙 발제 스트레스가 심해서 다소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도 있어서 지금은 다소 산만한 상태. 그래도 정리는 해야겠지.

01. 공간
홍대 놀이터 근처에 있는 마녀란 카페에서 포럼을 했다. 루인이야 워낙 카페 같은 곳엘 안 가니까 그곳이 어떤 곳인 줄 몰랐는데, 결과적으로 포럼을 하기에 그다지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실내조명은, 흔히 좀 어둑한 카페를 상상하면 될 법한 그 정도 밝기가 최대였다. 여기에 포럼 중간에,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생겨서 토론자의 목소리가 뒷좌석에까지 들리지 않기도 했다. 때문에 상당히 당황. 물론 이런 우발적인 상황이 누구의 잘못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속상했다.

02. 토론
포럼 주제는 지난 글에서 소개했고, 주최한 위그 발제문의 내용은, 페미니즘, 레즈비어니즘, 트랜스젠더리즘[분명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루인의 경우엔 트랜스젠더리즘보다는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더 선호하는 편, 그냥 그렇다는 거지 트랜스젠더리즘이란 말을 전혀 안 쓴다는 건 아니고] 사이의 경계구분, “여성성”과 “남성성”의 복잡한 의미들을 질문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부치나 “여성”들의 “남성성”을 둘러싼 논의가 거의 없다는 점, “공적 영역”에 트랜스젠더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트랜스젠더들의 주장을 통해 젠더를 둘러싼 논의의 지형도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예외로 취급하는 측면들, 등등. 여러 질문을 던지는 발제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토론이 될까 싶기도 했다. 자칫 “동의해요”란 한 마디로 끝날 위험도 있었다.

포럼 직전까지 해서 세 편의 발제문이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보내온 발제문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논쟁을 일으킬 내용이었다. 아주,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상담소에서 보낸 발제문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ftm/트랜스남성이 페니스를 욕망하는 건 이성애 남성의 남근권력을 욕망하는 것이기에 기존의 남근권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등등.

[어쩌면 발제문을 위그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전문을 직접 확인해 주세요!]

어제 포럼 자리에서도 이런 내용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른 토론자들이 상담소의 발제 내용을 비판하는 편이었다. 운조씨는 일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들을 비난한 역사를 비판하며, 투명한 몸이란 없음을 지적했다. 한무지는 부치 혹은 레즈비언단체에서 ftm에게 가지는 오해들이 맥락을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남근권력을 욕망하려고 외부성기재구성수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고 얘기했다. 변혜정선생님은 상담소에서 피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것이 부메랑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근데 사실 뭔가 신나는 토론은 없었다. 상담소에서 보낸 토론문 자체에도 논리적인 모순이 많았지만, 토론자로 나온 케이씨의 입장과 토론문 사이에도 상당한 간극이 존재했다. 토론문을 읽는 시간에 많은 토론자들이 케이씨에게 문제제기를 했기에 토론자간의 질의응답시간에 케이씨가 많은 얘기를 했는데, 이때 케이씨는 사견임을 전제했다. 이때부터 얘기하기 시작한 내용들은 토론문의 내용과 충돌했다. 아, 구체적으로 쓸 수 없는 안타까움 혹은 루인의 무능력이라니! 하지만 이 상황에서 루인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아니라, 단체 입장으로 나온 토론문과 그 토론문을 발표한 발표자 사이의 입장 차이 자체였다.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의 경우, 단체로 연락이 오건, 개별적으로 연락이 오건 지렁이 활동가란 소개글을 쓰는 편인데,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이런 모든 발화들은 철저하게 사견임을 전제한다. 단체활동의 운동방향과 배치하는 내용이라도 나가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정말 문제가 된다 싶으면 사후 징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종종 어딘가에 가서 발표를 할 때면, “이건 단체의 입장이 아니라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에요”라고 전제를 붙이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전제가 상당히 불편했는데, “루인(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가)”라고 소개할 때 루인의 말을 곧 지렁이란 단체의 의견으로 환원하는 인식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문제제기할 지점은 사견이라고 얘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개인의 발화를 단체의 입장으로 치환하는 지점이다. 특히나 트랜스들처럼 소위 “사회적인 소수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경우, 한 명의 말이 모든 트랜스의 의견인 것처럼 여기는 바로 그것이 문제이고, 그래서 이 지점에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다.
[#M_ 지렁이가 제시하는 최고의 징계는?.. | ㅋㅋㅋ.. |

향후 50년간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기. 낄낄.

_M#]

이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케이씨의 의견이 단체의 의견으로 제출한 토론문과 충돌하는 지점을 느꼈을 때, 조금 슬펐다. 실제 케이씨는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반박을 안 했는데, 바로 이 간극, 자신도 느끼고 있는 간극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토론문을 발표한 케이씨 역시 토론문의 내용에 완벽하게 동의하는 건 아니거나 토론문에 쓴 논리에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혼자서 지레짐작했다. 물론 이런 상상과 지레짐작이 루인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03. 했던 말과 하지 않은 말
케이씨의 경우, 아직도 여성들의 피해가 많고 이런 피해를 말하지 못 하고 있기에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이런 피해 경험을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얘기했다. 변혜정선생님은 이런 전략이 반드시 유용하기만 할 것인가란 문제제기를 했다. 여기에 꼭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어서, 슬쩍 손을 들고 얘길 했다. 뭐, [Run To 루인]에 오는 분들이야 익숙할 법한 내용. 피해를 전시하고 피해를 말하지 않으면 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바로 그것에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 않는가와 함께, 정체성을 명확하게 분류하지 않으면 불명확한 존재로 없는 존재로 만들며 불명확한 상태로는 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바로 그것에 문제제기 하는 방식으로 단체[얘기를 시작하며 위그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가로 소개했다] 운동방식을 모색 중이란 얘길 했다.
[포럼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며 좀더 깔끔하게 정리한 표현: 고통을 전시하고, 누군가의 관음증적 페티시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나를 주장할 수 없게 하는 그것에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다; 고통스럽고 피해 경험이 있어야만 나를 주장할 수 있는가? 왜 더 즐겁기 위해, 지금도 즐겁지만 더 즐겁기 위해 요구하고 주장할 수는 없는가?]

그리고 하지 못한 말은 페니스는 그 자체로 남성성과 폭력성, 권력의 상징이며, ftm은 이런 남성권력을 욕망해서 수술을 바라고, ftm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레즈비언을 불편하게 한다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토론문 내용에 대한 비판.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지만 한무지나 다른 사람들의 내용으로 충분했지 싶어 그냥 넘어갔는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은, 상담소에서 ftm을 비난하는 이런 내용은 ftm들이 말하는 내용들이 아니라 몇 명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자기 환상, 실로 과대망상일 뿐, 논할 가치도 없다란 말을 할까 살짝 고민을 했다. 거칠게 표현해 “논할 가치도 없다”고, 대꾸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낡은 논리며 이미 충분히 비판 받은 내용인데 아직도 그대로 동원해서 사용하는 의도가 뭔지 묻고 싶었다. 고정되고 본질적인 몸, 그래서 다른 해석은 아예 불가능하며 몸을 둘러싼 해석은 오직 한 가지만이 가능하단 식의 논리를 구성하고자 하는 맥락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아예 지렁이 블로그에 쓸까?)

04. 그리고
아무려나 포럼은 끝났다. 포럼이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 평가회의를 했다는데, 루인은 수업 발제 준비를 위해 먼저 나왔다. 살짝 아쉽다. 좀 더 멋진 포럼을 기획하지 못 한 건 아쉽지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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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말인 건 알지만 그래도 덧붙인다면, 위에 쓴 말들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너희들은 틀렸어”라는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이런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 글을 쓸 루인도 아니고. 단체란 차원에선, 상담소와 지렁이의 경우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할 수밖에 없기에 이런 저런 문제제기를 하고 싶을 뿐. 혹시나 이 글을 상담소의 누군가가 읽으신다면, 간단하게라도 대답을 해 주실까? 메일로도 좋은데.

사진과 붉은 띠, 딜레마: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우선, 감정을 좀 추스르고…)

어제 지렁이 회의 때, 제 8회 퀴어문화축제 무지개의 퍼레이드 행사에 참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부스에 설치할 것과 퍼레이드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의논했다.

단체를 설립한지 이제 몇 개월이고, 지금은 동면상태라 딱히 무언가 그럴 듯 한 걸 하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았다. 부스엔 그저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알릴 수 있을 간단한 표시 정도 수준으로 결정했다. 단체를 소개할 그럴 듯한 팜플렛이나 뭔가 홍보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자료 하나 아직 없는 단체이다 보니, 우선은 지렁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알리는데 의미부여하기로 했다.

퍼레이드를 하며, 어떻게 할까를 얘기하다가, 지렁이 깃발 큰 것과 작은 것을 흔들기로 했고, 아울러 피켓을 몇 개 들기로 했다. 피켓 내용은 네 가지, “나는 트랜스젠더일까”, “나는 트랜스젠더이다”, “나는 트랜스젠더 인가봐”, “나는 트랜스젠더이고 싶어”. 두 번째 내용인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는 루인이 제안했고, 이 피켓은 루인이 들겠다고 했다. (이 말은 그날 퍼레이드에서 이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으면 루인이란 의미인가? -_-;; 차라리 그러면 다행인데 잠깐 다른 사람이 들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루인으로 인식하면, 이것도 재밌겠다. 흐흐 ;;)

고민은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데, 붉은 띠를 할 것인가. 왜냐면 붉은 띠의 의미는

붉은 띠는 방송, 신문뿐만 아니라 개인블로그, 까페 등에도 공개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아웃팅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원하는 사람은 붉은 띠를 할 수 있으며, 이럴 때 그 사람 사진은 찍지 못하고, 혹시나 찍혔다면 누구도 알아 볼 수 없게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고민이 발생했다.

예전에도 적었듯, 루인의 경우 사진 찍히는 것 자체, 사진 속의 모습 자체를 못 견디는 경향이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사진도 증명사진 두 종류가 전부고. 한때 중고 디카를 선물 받은 일이 있어 셀카도 조금 찍었지만 그 사진들 중 남아 있는 건 한 장도 없다. 일테면 오프라인에서 누군가 루인을 지칭하며 “저 사람 루인이야”라거나 “저 사람이 루인인데, 트랜스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상관없다고 느끼지만, 사진이나 영상물은…

그렇다고 루인이 사진 찍히길 싫어하는 게 트랜스(젠더)들의 자기 이미지 때문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트랜스젠더들의 경우,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거울을 통해 보는 모습이 너무도 달라, 거울을 안 본다거나, 사진 속의 모습을 안 보는 경향이 있다(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식의 말들이 있다는 의미다). 자신은 자신을 “여성”이라고 인식하며 살아가는데 거울 속에서 돌연 “남성”의 모습이 나올 때, 낯설고도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 때문이다. 하지만 루인의 경우, 이런 이유는 아니고 그냥 사진 속의 모습이 싫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붉은 띠는 딜레마로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까지 적고, 붉은 띠의 의미 자체를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만약 붉은 띠가 아웃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진 찍히는 것 자체가 싫다는 의사 표시일 수도 있다면 지금의 이 고민은 무게가 덜할 수도 있겠다 싶다. 비록 사진을 찍거나 퍼레이드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은 붉은 띠를 아웃팅과 연결시키겠지만, 그렇다면 사진 찍히기 싫다는 표현을 곧장 아웃팅으로만 연결시키는 지점에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지. 만약 소위 “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사진 찍히길 거부한다면 이럴 땐 아웃팅과 연결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비이성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진 찍히길 거부한다면, 다른 맥락을 무시하고 아웃팅으로 연결하는 그 지점에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겠지. 여기에 트랜스라면 몸 이미지 때문이냐고, 다른 맥락 무시하고 곧장 이런 식으로만 묻는 지점에 문제제기하면 되겠지.

+
사실, 피켓에 정말 쓰고 싶은 말 중 하나는, “나, 괴물. 낄낄낄.” 혹은 “나는 트랜스이다. 나는 괴물이다.”
케케케. 일단 인쇄해서 가져갈까? (ㅎㅁㅈ씨 어때?)

++
피켓 내용 추가
“응, 나 괴물이야. 케케케”
“응, 나 괴물. 그런데 뭐?”
“응, 나 트랜스야. 그래서?”

퇴고: 글 수정하기, 고마움

마지막 문장을 쓰곤, 스스로 감동 받았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에 실릴 원고 중, 파일명으론 “정체성 명명과 경계지대”, 현재 수정한 제목은 “범주와 명명, 그리고 경계지대”. 물론 최종 제목은 또 다르겠지. 오늘 저장한 파일이 take8이니, 그 전에 10개의 다른 원고들이 있다는 의미인데, 앞서 쓴 10개 원고들에선 얼버무리며 넘어갔던 부분들, 혹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긴 부분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며 루인의 생애사가 상당 부분 들어갔다. 이곳, [Run To 루인]에도 쓰지 못한 얘기들이 그 글 속에 너무도 많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쓰면 꼭 황색신문 같다. 일테면 “루인, 충격고백”처럼 -_-;;; 크크크)

take7에서 take8로 넘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실제 날짜 상으론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글 한 편 수정하겠다며 며칠을 붙잡고 앉았다는 점에선 오래 걸렸다. 보통은, 수정하겠다고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서 끝내기 때문이다. 참 많이 외면하기도 했다. 그냥 외면하고 싶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을 마주하는 일,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일. 이런 일을 할 용기가 부족해서 자꾸만 미루기도 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냥 어물쩍 얘기해도 남들이 알아 줬으면 하는 바람을 품었다. 앞뒤 맥락 다 잘라버리고 한 마디, 툭, 내뱉는 것처럼.

배치를 바꾸기도 하고, 뺄 부분 빼고, 채워 넣을 부분들 채워 넣고 말을 덧붙이면서, 뭔가 전혀 다른 글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런 느낌은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오후에 다시 수정할 때 여지없이 깨지겠지만, 적어도 지금 느낌은 그렇다. take7과는 많이 다른 느낌의 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추가하면서, 감동 받았달까. 참 민망한 말이다. 자기가 쓴 글에 자신이 감동 받는다는 건, 그 만큼 허접하단 의미거나 거리를 두고 건조하게 평가하지 못 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안다. 분명 퇴고하려고 글과 마주하는 순간, 비문에서부터 구조적인 문제까지,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거란 걸. 그리고 아직 수정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이 여기까지란 걸 인정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론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방금 전에 다시 읽고, “감동”의 크기가 반 토막 났다.)

이 글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는다면, 다른 무엇도 아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는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정의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은 없지만, 미국이란 맥락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과 한국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이 얼마나 다른지를 드러내려고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사서 읽으시면… 편집장님, 책 홍보 잘 하고 있죠? 흐흐 -_-;;;)

그러고 나면 루인의 생애사를 통해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특정 범주(일테면, 게이냐 트랜스젠더냐 크로스드레서냐란 식)로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냈다는 점, 정도랄까. 따지고 보면 이 지점은 (한국에선 아직 별다른/활발한 논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루인이 읽은 영어논문에선 낯설지 않은, 때론 익숙한 논의들이다. 그렇다면 그 논의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꾀할 것인가가 관건이겠지.

그러고 보면 루인은 인복이 참 많다. 이성애혈연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겐 대인관계가 참 좁다는 말을 듣는데도, 그런 만큼이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매일 조금씩 변태할 수 있다. 최근 쓰고 있는 몇 편의 글들 모두,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며칠 전 출판회의 때, 편집장님이 “저자의 자기소개와 함께 thanks to도 넣을까 생각했어요”란 요지의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맴돌아 괜히 누구에게 고마움을 표할까 떠올리니, 20명이 넘는다(블로그 이웃이 반 이상이다 흐흐). 인간관계 좁다고 말하면서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만약 책에 정말 thanks to를 적는다면, 참 유치한 일이라고 민망해 하면서도 가득 채워서 적을 것 같다. 지금은 그냥, 이런 몸이다.

아, 저녁은 알바가 있다. 갑작스레 맡은 알바. 그곳에서 글을 수정할지 짧은 논문을 읽을지 결정해야 한다. 이제 슬슬 갈 준비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