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로 먹고 사는 인간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제 절감했다. 요즘 몸이 안 좋아 목이 꽉 막혔다. 간단한 대화만 짧게 할 수 있어 토론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못 하는 상황이 무척 답답했다.
어제 진정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바이 이슈가 나왔고 그때 말하고 싶었지만 못 한 얘기가 있어 개인적 기록 차원에서 남기는 글. 어제 논의 자리에 있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점에서 일기장에 쓰면 좋을 법한 글이지만 블로그가 (공개적으로 쓰는)일기기도 하단 점에서 그냥 여기에 쓰기로 한다.
바이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는 부분에서 기혼이반 이슈, 여성과 만나다가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의 이슈를 주로 다루며 바이와 기혼이반을 등치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이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제 토론 시간에도 적잖게 나왔고 강사는 자신은 바이보다는 기혼이반 이슈를 좀 더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제목을 “바이”가 아니라 “기혼이반”으로 바꿨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이 이슈를 다루기 전까지는 매우 흥미롭고 탁월한 분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강숙자 논쟁을 이원젠더 규범에 대한 문제제기로 재구성하려한 부분은 참 좋았다. 그런데 이런 통찰이 바이-기혼이반 이슈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이와 기혼이반 이슈를 혼재하면서, 이전의 통찰이 사라지고 바이 이슈를 또 다른 이분법으로 환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것은 직관적 판단이다). 이런 의심은 나의 참조점에서 출발한다. 다른 많은 이슈에선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으며 탁월한 성찰을 보이는 많은 비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가 트랜스젠더 이슈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이원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존재란 식으로 독해할 때가 있다. 심한 경우, 트랜스혐오 문헌을 적절한 참고문헌을 인용하며 트랜스젠더를 비난할 때도 있다. 다른 많은 이슈에서는 반짝거리는 성찰을 표현하면서 왜 트랜스젠더 이슈에선 그 성찰이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어제 강의에선 바로 이 지점이 아쉬웠다. 앞 부분의 논점을 바이-기혼이반 이슈에 적용했다면 전혀 다른 글과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울러 남자에게 가는 것,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문제라면, 남자에서 여자로 혹은 여자에서 여자로 떠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레즈비언 범주, 레즈비언의 진정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의미인지를 질문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니끄 위띠(Monique Wittig)는 레즈비언이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는 존재로서 이성애 관계 외부, 여성과 남성 범주 외부에 있는 존재(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레즈비언은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으니 여성이 아니라는 위띠의 주장은 매우 중요하지만, 위띠의 주장에서 레즈비언은 여전히 이성애주의 맥락에 위치한다.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관계의 외부’라는 또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띠 식의 논의는 바이와 트랜스젠더를 완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위띠 논의에서 바이는 이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매우 위태롭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파트너가 혹은 나 자신이 남자 혹은 남성에게 가는 것이 레즈비언 범주 형성에 어떤 의미인지를 살폈을 때 레즈비언 범주 논쟁, 바이 논쟁, 트랜스젠더 논쟁을 더 복잡하고 흥미롭게 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어제 강의에선 위띠 얘기가 안 나왔습니다. 위띠 얘기는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덧붙여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맥락에서 글을 쓰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이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한 강사에겐 무척 고마웠다…라고 쓰면 너무 수습하는 느낌이려나? ;;; 근데 바이 이슈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이슈였어도 나는 똑같이 고마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