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사항 없음’이란 선택이 없음이 주는 고민

주제 사마라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엔, 선거 당일 비가 엄청나게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청난 폭우에 사람들이 투표를 할 리 없다. 다행히 오후 즈음 비가 그치자 사람들이 투표를 하러 나오는데, 그게 또 재밌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시각에 나온 것. 그리고 결과는 대부분의 표가 백지투표. 다시 한 번 투표를 하지만 결과는 이전보다 더 많은 백지투표용지가 쏟아질 뿐이다.

소설의 초점이 “왜 백지투표를 했나?”에 있지 않기에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런 결과가 부쩍 매력 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상상 중에 하나는, 이례적으로 대통령선거 투표율이 90%에 육박하는데, 이 중 90%가 백지투표고 나머지 10%에서 적당히 알아서 표를 나눠 가지는 것.

이런 상상이 실현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후보들의 현수막만 봐도 짜증만 날 뿐인 요즘, 백지투표란 결과는 무척 매력적이다. 그러며 다시 떠오르는 바람은 “이상의 후보 중에 지지할 만한 인물이 없음”이란 항목이 생겼으면 하는 거. 지금처럼 후보가 11명이면 13번째 칸(사퇴는 했지만 이름은 표시되니까)에 “지지할 만한 인물이 없음” 혹은 “다 별로”라는 식의 내용도 있어야 한다는 거.

특히나 요즘과 같은 상황일 때, 11명 중 한 명을 어쨌거나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고등학교 다닐 무렵, 학교 선생이 “10대 맞을래, 20대 맞을래? 선택해.”라고 말하거나, “손바닥으로 뺨을 맞을래, 당구대로 엉덩이를 맞을래?” 라거나. 그리고 나선, “이건 네가 선택한 거다”라고 말함으로서 “선택”한 사람의 책임으로 만든다. 딱 이런 상황이 떠오른다. “맞지 않겠다”와 같은 대답은 불가능하고 어쨌든 맞아야 하며, 이제 어떻게 맞느냐 혹은 얼마나 맞느냐 하는 선택만 가능한 상황.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울며 겨자 먹기일 뿐이다. 선택하지 않을 권리나, 이런 선택지 자체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때에야, 그나마 ‘선택이라는 어떤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종종 며칠 전 있었던 번개에서, 호빵님이 정세분석을 하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진보-보수의 논쟁은 미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알다시피 미국대선과 관련한 이슈의 핵심 중 하나는, 동성혼과 동성애자들이 군대에 입대할 권리를 부여하는가의 있다. 물론 미국에선 동성애 이슈가 투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이기에 이런 논의가 가능할 테다. 반면 한국에서의 진보-보수의 논쟁은 이렇지 않다. 일테면, 11명의 후보 중에서 1명을 빼면 그 누구도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서 얘기하지 않고, 그 한 명도 며칠 잠깐 얘기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다들 알다시피 지금의 논쟁은 이명박-반 이명박이라는 구도이고, 이 구도의 핵심은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득표를 해서,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 보수이긴 한가? 정동영이 진보이긴 한가? 웃기게도 소위 범여권이라고 불리는 진영은 자신들을 진보나 중도로 포장하지만, 그저 득표에 급급하다는 인상만 받을 뿐이다.
(진보와 보수가 있느냐, 이런 논쟁이 있느냐는 논의는 별개로 하고. 최소한 차별금지법 원안으로 제정할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정치성이 ‘진보’란 의미도 당연히 아니다. 단지 득표를 위해서 LGBT차별금지법이나 상당히 ‘괜찮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더 끔찍한 상황일 수도 있다.)

한미 FTA와 파병 반대가 곧 진보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한미 FTA와 파병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는 말을 했던 후보들(문국현을 비롯한 상당수)을 과연 속편하게 지지할 수 있을까? 그나마 나쁘지 않을 권영길은, 여러 이유로 민노당 이미지가 너무 나쁜 상황인데 지지할 수 있을까? 예전엔 부분적인 이유로라도 어떤 후보를 지지하거나 응원했는데, 이젠 이런 지지마저 내키지 않는다. 아아, 정말로 누구의 이미지가 덜 나쁜가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인가?

정말, 19일은 종강과 기말레폿 마감, 그리고 얼추 열흘간의 휴식에 들어가는 날일뿐인지도 모른다.

5 thoughts on “‘선택 사항 없음’이란 선택이 없음이 주는 고민

  1. 눈뜬 자들의 백지투표.. 요즘같아선 정말 매력적인것 같아요.

  2. 안녕하세요. 흔해빠진 문국현 지지자입니다. 채식주의자라 흘러흘러 가끔 여기 들렀구요. FTA는 이미 기존 정권이 한없이 무르게 결정해놓은 거니 제대로 협상을 해서 최대한 농촌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분 농촌 정책을 보면 유기농을 지원하는 세부정책이 농가에서도 이대로만 되면 좋겠다고 할 정도거든요. 이분 여성정책도 성폭력범 처벌 강화, 공직 여성 관리직 의무적 할당, 기혼만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한 여성 복지등 현실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습니다. 유한킴벌리에서도 관리직중 여성이 40%이상일 정도로 20년 이상 실천하는 삶을 사셨구요. 시민운동도 사비를 털어 하실 정도로 사람을 생각하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집전화 언론 조사와 달리 MBC 핸드폰 조사에서는 오차범위내 2위셨고 인터넷 조사는 단독 1위구요. ‘동성애 하는 사람은 사람도 동물도 아닌 질병이다’라고 말한(동성애가 질병이라는 것과 동성애자가 질병이라는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건 막아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리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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