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들

어제 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玄牝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갔을 때였다. 늦은 밤의 지하철은 술 냄새를 비롯한 역한 냄새가 심해서 별로 안 좋아하지만 버스가 끊긴 시간이라 선택사항이 없었다. 터벅터벅 졸리는 눈을 비비며 지하로 내려가 개찰구를 지나가려할 때였다. 한 게이커플이 서로 헤어지길 아쉬워하며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 수줍어하면서도 헤어지길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내가 특강을 갔던 수업의 한 수강생이, 자신은 자신이 게이로 오해 받는 상황이 너무 싫어서, 관련 논의들이 활발해지는 게 싫다고 말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성애연애를 할 생각이 없고 그저 일을 열심히 하고, 성공하면 그때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곤, “혹시 게이 아니세요?”라고 물었다고 했다나. LGBT와 관련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LGBT란 용어가 익숙해질수록 오해가 많이 생긴다고 싫다고 했다. 불편하다고 했나? 이 말을 들은 이후부턴 자신이 이성애자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 말 자체가 재밌었다. 게이로 보이기 싫어서, 이성애자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 게이처럼 보이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이며, 이성애자처럼 보이는 행동은 어떤 걸까? 이후 이 사람은 자신이 남성을 사랑한다는 상상만 해도 토악질이 난다고도 했다. 근데 이 일련의 말들이 재밌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다. 모든 강한 부정이 긍정은 아니지만, 어떤 강한 부정은 긍정이기도 하다. 사실 이 사람의 행동들은 오히려 자신이 게이/바이인데 아닌 척 하는 거거나, 자신이 게이/바이일 수 있다는 자기 안의 어떤 느낌을 부인하고 싶은 상황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주기도 한다. 물론 정말 아닌데 이런 오해가 많아서 이렇게 강하게 부정하는 걸 수도 있다. 자기 입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옆에서 섣불리 추측하고 단정할 수 없기에 그저 이런 저런 상상력만 펼쳐볼 따름이다.

하지만 어제 지하철 개찰구에서 헤어지길 아쉬워하는 게이커플과 자신은 자신이 게이일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공존하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아마 이들은 때로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도 있을 테고, 서로 지나가다 마주치거나 아는 사이로 지낼 수도 있다. 아울러, 자신은 자신이 게이일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구역질난다는 그 사람의 말이, 게이혐오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그런 말은 게이 혐오야!”라고 단정해서 말하기 힘들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그런 게이 혐오야. 넌 호모포비아야.”라고 말했겠지. 지금도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버릇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쉽게 말하기가 힘들다. 이런 말은 때로 자기혐오를 드러내는 말일 수도 있는 만큼이나, 이런 방식의 표현을 혐오로만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이런 풍경들, 반응들이 재밌었다. 12시가 넘은 늦은 밤, 졸린 눈을 부비며 탄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문득 이렇게 공존하는 상황들이, 각자가 품고 있는 고민들이 좋았다. 부인하는 반응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정황이기 때문에 좋은 것만은 아니고.

2 thoughts on “풍경들

  1. 그런 사람 보면 당신에게 작은 불편을 주는 논의가 다른 이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말하고 싶으나 그 사람의 불편에 대해서도 뭐라고 막 말하면 안 되겠죠;; 그저 가끔씩 답답해서요 =_=

    1. 정말 그래요. 어떤 땐 그런 반응이 재밌기도 하지만, 때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거나 속상할 때도 있어요. 그래도, 뭐… 시간이 지나면 변하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랄까요… 흐. 그런게 있어요. ;;;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