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훈육, 그리고 혐오: 함부로 개입하기 어려운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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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 추가
이와 관련한 논의가 계속해서 엉망이 되는 이유에는
ㄱ.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ㄴ.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의무교육이라는 제도에 따라 초등학교 경험은 어느 정도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이 의제와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각자의 경험과 고민이 있다는 점이, 이와 관련한 논의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두가 경험이 있는데 그 경험의 층위가 천차만별이고 각자가 고민하는 방향이 있다는 점은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심지어 ‘내’가 하는 어떤 이야기의 반론을 이미 ‘내’가 알고 있으며, ‘나’는 때때로 그 반론을 ‘나’의 의견처럼 말할 수 있다는 점은 더욱더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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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 선생에게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동학대라는 용어는 있었지만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일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집에서 효자손이나 파리채는 활용도 높은 도구였다. 마찬가지로 학교 선생은 부모와 같다는 노래 가사처럼, 학교 선생은 당구채나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묵직한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어떤 선생은 당구채에 테이프를 감아 허벅지나 엉덩이에 주는 타격감을 높였다고 자랑했고, 어떤 선생은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나무봉에 쇠심을 박았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언제 맞았냐고? 시험 점수가 떨어지면 쩔어진 점수만큼 맞았다(총 점수가 30점이 떨어지면 30대를 맞았다는 뜻이다). 떠들면 맞았고, 뭐 암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맞았다. 뺨을 맞은 기억도 있는데(왜 이렇게 뺨 맞은 사람은 많은지…), 그 중 가장 당혹스러운 이유는 시계를 손목이 아니라 손에 착용했다는 게 꼴보기 싫어서였다.
아무려나 내가 경험한 초중고는 폭력을 가르치는 곳이었고, 애들은 패야 말을 듣는다고 믿는 체제였다. 드물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교육하고자 하는 선생도 있었지만, 언제나 어려워했는데 한편으로는 패지 않는 교사를 만만하거나 편하게 여기는 학생들의 반응도 있지만, 폭력 없는 훈육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당구채로 팬 선생은 언제나 니들이 개돼지도 아니고 패야 말을 듣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정신머리라고 훈계했다. 이 메시지는 팬 선생이 아니라 맞은 학생이 잘못한 것이라는 의미다. 때린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가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맞은 사람이 잘못해서 맞은 것이며, 피해자가 피해를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 시절 내가 다닌 초중고 교육의 핵심이었다. 나는 폭력이 가르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히 맞으면 훈육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는 다 마땅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으며 맞은 사람, 피해자가 그 모든 행위의 원인 제공자라는 관념의 체화다. [기억에 의존하는 그 시절의 일화를 하나 더 말하면, 1990년대 교사에게 주는 촌지를 범죄이자 뇌물로 처벌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많은 학교 선생이 공개적으로 반발했었다.]
지금은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니 나는 더이상 학교의 분위기가 어떤지 체감하지 못한다. 그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 중에서는 괜찮거나 존경할 수 있는 선생의 기억보다는 폭력과 강압적인 선생이 여전히 더 많았다. 혹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범죄자도 여전히 많았으며, 언어 폭력도 여전히 빈번했다. 하지만 지금 발생하는 일련의 폭력은 학생인권운동의 성취로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반검열은 여전히 상당하고, 당구채로 패는 대신 상벌 제도가 도입되었고, 몸에 피멍이 드는 대신 대학 진학과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는 규율로 그 형태가 바뀌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학교 선생의 폭력과 위협에 공포를 느낄 것인데, 특히 트랜스젠더퀴어를 비롯한 많은 퀴어는 여전히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빈번하게 노출된다. 학생 사이의 폭력에 방치되기도 하고, 선생이 퀴어 혐오를 주도하기도 한다. 당구채와 같은 무기로 사람을 패는 일은 과거보다 줄었겠지만, 그보다 더 악랄한 형태의 폭력과 외면, 괴롭힘이 만연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선생으로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실제 어떤 지역은 전입교사의 수보다 전출교사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고, 경력 있는 선생은 근무하지 않으려고 해서 신입 교사로, 신입 교사도 기피해서 기간제 교사로 대체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초등학교의 반은 담임이 5번 바뀌었다고 한다(이럴 경우, 그 반의 학생들은 아무것도 못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 양육자가 어린이집 선생님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간섭하고, 일상 생활 태도를 간섭한다는 기사가 상당히 충격이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담임이 그 피해를 겪고 있다. 선생의 연락처를 알 수 없어야 하는 학부모가 연락처를 획득해서 연락을 하고, 메신저 프로필 사진과 문구를 간섭하고 있다. 최근에는 결혼하는 시기도 간섭하고 있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면 중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사의 프로필 사진을 간섭하는 일이 기사로 등장할까? 메신저의 공개는 밤이고 낮이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없이 학부모가 선생에게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학부모는 학생에게 녹음기를 상시 착용시켜 수업 시간에 있었던 모든 발언을 간섭하고 있다고 한다(이 말은 퀴어 관련 교육, 다양성 관련 교육이 모두 규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30년의 시간 사이에 교사의 지위는 급격하게 변한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사가 온전한 가해자라거나 피해자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고, 학생이 온전하게 가해자라거나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교사는 심각한 피해를 겪었고 어떤 학생은 심각한 가해를 했다. 어떤 교사는 여전히, 하지만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폭력적 행동을 하고 있고, 어떤 학생은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자퇴를 결심하고 있다. 어떤 학부모는 담임을 믿지만 어떤 학부모는 담임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역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하나마나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집단을 적대 세력으로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시절의 감각으로, 선생이 잘못했겠지라고 단언하기에는 라떼의 헛소리가 될 뿐이다. 학교 분위기,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의 관계는 매우 많이 변했다. 교사가 피해자라고만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퀴어가 학교에서 강제로 추방되고 있다. 학부모의 잘못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더욱 단순해진다. 더 정확하게… 누군가를 최후의 보스몹으로 규정하면 누가 남겠는가? 예를 들어, 노키즈존이 곳곳에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청소년 출입을 금지하는 카페가 있다. 취준생과 카공족을 비난하는 글은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맘충이니 문제가 되는 학부모나 양육자는 30~40대에 해당하는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에는 노시니어존이 등장했다. 장애인은 직장인의 민폐로 규정되고, 퀴어는 아동청소년의 위협으로 규정되고… 자, 이제 누가 남는가? 오래 전에 유행한 용어, ‘혼자 있고 싶습니다, 지구에서 다 나가주세요’가 떠오른다. 모두가 문제로 규정되고 오직 나만 옳다는 식의 질문이 아닌 어떤 질문이 필요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일주일 넘게 머뭇거리고 있으며, 이 글을 쓰는 37가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주제에는 함부로 말을 보태지 않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싶어서다. 그저 교사의 죽음, 기간제 교사의 죽음의 대한 무관심, 학부모의 민원, 퀴어 학생의 자퇴, 장애 등 다양한 의제와 관련한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나는 한 가지 질문만 보태고 싶었다.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둘러싼 논쟁이 더 치열하고 복잡해져야 한다고. 이번 사건을 고민하다 떠오른 시간은 1990년대 성폭력방지특별법과 성희롱방지특별법이 생겼을 때였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많은 직장에서는 팔을 만지면 4만원, 어깨 만지면 5만원 따위의 끔찍한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성희롱, 성폭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조롱과 비난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기억하겠지만, 이런 식의 반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학대와 훈육 사이의 논쟁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고민했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를 깨우는 행위는 학대인가 훈육인가? 수업 시간에 떠들어서 10분 정도 교실 뒤에 세워두는 행위는 훈육인가 학대인가? 시사프로그램,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는 많은 교사가 전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런 훈육 행위가 학대로 고발되고 민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 주변의 많은 이들은 이것이 학대인지, 그리고 민원으로 가서 교사를 2년 넘게 괴롭힐 사항인지에 질문을 하고 있다. 나 역시 이것이 민원을 넣고, 소송을 걸고, 2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교사를 괴롭히는 사안이 되는지에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질문은, 학대와 훈육 사이의 한계 논쟁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가 겪은 일은 거의 명백한 학대, 아니 폭력 그 자체였지만 그 시절 그 폭력은 훈육이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모두가 아니라는 것이 함정) 그 시절의 행태를 훈육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가 되는 행동, 민원의 대상이 되는 행동은 훨씬 미묘하고 복잡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하고 있어서 교실 뒤에 세워두는 행위는 훈육인가? 숙제를 하지 않아서 경고를 하는 행위는 훈육인가? 퀴어여서 이를 문제 삼으며 이성애를 강제하는 행위는 훈육인가?  어떤 질문은 정치적 쟁점이고, 어떤 질문은 인권의 의제여서 첨예한 논쟁의 장에 위치하는 쟁점이고, 어떤 질문은 사회적 상식이라고 불리는 일이라 당연히 훈육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이지만, 사실 그 경계는 미묘한 차원이 있다. 나도 내가 지금 논의의 층위를 섞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이렇게 섞이는 지점을 고민할 필요가 생겼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명하다고 느낀다면, 사실 그 지점에서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자명하다고 느끼는 순간 비난하기와 전선 만들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일부러 섞으며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고민은 내가 학교에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행태일 수도 있다. 당장 내일 또 다시 학교로 출근하거나 등교해야 하는 누군가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면서(나는 내가 잘 모르는데 답답해서 알고 싶으면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50시간 이상 찾아 듣는 편이다) 그 의견에 학대와 훈육을 자명하게 구분하는 경향에 질문이 필요하다고 고민했다. 지금 억울한 많은 교사가 사실은 학대를 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육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더 나은 상황으로 전개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며칠 내에 삭제할 수도 있다.) (50H50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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