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꾸를 개념화하기

벨 훅스의 책 중 Talking Back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나는 이 제목을 말대꾸로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내가 이해한 뉘앙스로는 이것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다. 벨 훅스는 이 말을 가져온 것이 아이가 양육자나 어른에게 그러하듯, 자신보다 권위가 있는 이들에게 대응하는 말하기의 방식이었다. 즉 체제를 부정하지 않지만 온전히 순응하지 않으며, 권력과 규범의 틀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지만 또한 그것을 승인하지 않고 툭툭 내뱉듯 균열을 내는 말을 하는 방식, 이것이 내가 이해한 말대꾸다. 언제나 어른에게 혼날 것을 알면서도 이어이 내뱉는 말이며, 그리하여 얻어맞을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말하기. 저항의 의도성이 없을 때에도 가장 강력하게 규범을 위협하고 분노케하는 말하기.

어찌보면 비동일시로 독해할 수도 있는 이 용어를 나는 오랫동안 활용해보고 싶었지만 언제나 성공하지 못 하고 있다. 그래서 어디 강의나 다른 어떤 자리에서 말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개념화시키지도 이론화하지도 못했다. 물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라, 이미 누군가는 개념화했겠지. 그랬겠지. 그럼에도 뭔가 내 방식으로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말대꾸라는 용어가 꽤나 몸에 들었나보다.

절에 다녀왔다

지난 주에 일이 있어 부산에 있는 한 절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스님의 법어를 들었는데 두 가지 단어를 새로 배웠다.

무상. ‘인상사 무상하다’고 하면 무상을 ‘허무하다’고 이해하는데 무상은 허무함이 아니고, 상이 없다 즉 모든 만물은 고정된 형태 없이 변한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몸의 형태를 바꾸며 죽기도 하고 그런다고. 제행무상이 그래서 그런 뜻이었구나 싶었다.

양구(良久)라는 용어를 배웠다. 양구는 질문을 하면 답변이 올 때까지의 시간이라고 하셨다. 내가 질문을 던지면, 그 질문을 받은 이가 나에게 답변을 주기까지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고 하는 것을 다 포함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자리는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그리하여 양구라는 용어는 고인을 추모하는 경에 나와 있는 용어였다. 다시 말해, 양구는 고인에게 나의 말을 전달하고, 나의 질문을 전달하고 그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마도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그 답을 듣지는 못할 것이고, 그리하여 양구는 시간을 견디는 것이자 내가 던진 질문을 끊임없이 자문자답하고 또 자문자답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인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도 결국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애도이지 않을까… 그리하여 무상은 그래도 들어본 적 있는 용어인데, 양구라는 용어가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책임감의 사회적 교훈

오늘자 건조 에디터의 말… MZ세대에게 책임감이 없다, 권리는 찾으면서 의무는 어쩌고 저쩌고 많이 말하는데, MZ세대는 세월호 참사에서 이태원 참사를 동년배/동세대로 겪었고 이를 통해 어른들의 무책임함을 벼락 같이 배운 세대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충격적이었다. 제대로 고민하지 않는 내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