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무거운 잠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비비며 [이터널 선샤인]을 봤다. 몸이 무겁게 가라 앉는다. 잊기 싫어, 당신을 기억하고 싶어, 그렇게 몸부림치면서도 당신을 잊고 있는 루인을 만난다. 희미해지고 빛바랜 기억이 몸에서 지워지고 있다. 더 많이 지우면 그리울 일도 없을 테지. 그 전에 당신을 억지로 지우진 않겠어, 하면서도 어쩌면 강제로 당신에 대한 기억을 소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울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눈을 비비다, 흔하디흔한 우울증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은 우물에 빠질 일이 없을 거라 믿었기에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잠들기엔 고통스럽고 잠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Nina Nastasia와 Portishead가 들어있는 엠디 디스크를 틀어 놓고 저녁 6시 즈음 잠들었다.

잠든 사이 두 건의 문자가 왔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문자는 잠결에 (늦게라도) 답장을 했고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는 잠결인 걸 알고 일찍 끊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해가 떴을 즈음 눈을 떴다. 씻지도 않고 멍하니 앉아 나스타샤를 켰다. [플라이트 플랜]을 보며 ‘레즈비언’ 관계로 읽었는데, 모성애로 읽은 글들을 보며 당황했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있다.

옅은 그리움-얼룩

이랑 엠티를 갔다 왔다. 엠티를 가면 항상 그러하듯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졸음이 폭염처럼 쏟아지는 이 와중에 옅은 농도의 그리움이 심장을 옥죄어 든다. 그립다, 라는 말로 환생한 것인지 “그리움의 샌드위치”에 낀 인생인건지, 이렇게 그리움으로 범벅된 상태에 빠진 자신을 만난다는 건, 조금 아픈 일이다.

무엇이 이렇게 옅은 농도의 그리움에 빠지게 했을까. 빨아도 빨아도 너덜해질 뿐,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얼룩진 삶. 막막한. 정적에 갇힌 시간들.

보고 싶고 그립다. 하지만 무엇이?

가시야,

썩지도 못할 낙엽을 밟으며 돌아왔어요. 이젠 썩을 수도 없는 운명으로 변한 것이 자신의 몸을 보는 것만 같이 묘하게 즐거웠죠. 몇 해 전, 몸에 새긴 상처가 아물지 않고 흉터로 변한 것과 닮아 보였거든요.

우리는 항상 서로의 불운을 경쟁했지요. 누가 더 많은 불운 속에 있는지 이야기 하고 ‘내’가 더 불운하다고 더 불운하다고 악다구니하며 지냈죠. 그래요, 우리는 서로의 불운을 멸시하고 그 불운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서로를 감시하는 관계였어요.

바람이 부는데도 뒹굴지 않는 낙엽을 보며 당신을 떠올렸어요. 당신이란 거울 너머 있는 저를 외면하고 싶었거든요. 더 불운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 떠올라요. 그렇게 해서 남은 상처들이 다시 흉터로 남으려고 하네요. 썩을 수조차 없는 몸의 흔적들이 있어요. 실은 썩어가면서 더 선명해지는 흔적들이죠. 변하면 안 된다고 안 된다고 부둥켜안고 매 해 새로운 상처를 덧대고 그렇게 곪아가는 곳에 또 한 번 날을 들이밀고.

당신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요. 몸 한 곳의 욱신거림, 그 욱신거림으로 떠올리는 당신, 그리고 빗장 걸린 마음.

몸 한 곳에 이런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만나요.
당신은 안녕한가요?
전 안녕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