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만난다는 것

낮에 친구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 왔다가, 문득 9년째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루인에게 9년째 만나고 있는 친구가 있다니….

전에 어느 글에선가도 적은 것 같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학년이 바뀌어 반이 바뀌면 이전에 알던 사람은 낯설거나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되곤 했다. 주말에 약속을 잡아서 따로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교 2학년 땐가 처음 듣고는 신기하게 여겼고, 학년이 바뀌면 연락 안 하는 것이 당연하고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꼈다. 이런 행동은 여전한데 지금도 어떤 특정 목적으로 만난 사람들과, 그런 목적이 끝난 후에도 연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 물론 친구에게도 먼저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는 루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신기한 일이지, 이 친구 역시 여러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지만, 그 중 유일하게 연락하고 만나는 단 한 사람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루인이 먼저 연락을 하곤 하는/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고. 어쩌면 이 친구와는 “평생”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몇 년을 떨어져 지낼 일이 있었는데, 인터넷도 안 되는 상황에선 루인이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그 친구가 어학연수를 1년 간 갔을 때엔 그 친구가 루인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물론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동안 서먹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땐 그 친구가 먼저 연락을 줬는데, 그 한 통의 전화가 지금까지의 인연을 이어가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보통 루인에게 친구하면, 세 명을 꼽곤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 얘기하는데 자신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의 친구 한 명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비슷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건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만나면 공유할 얘기가 줄어들고 그렇게 서먹하게 지내다 서서히 잊혀지는 시간. 물론 루인이 어지간해선 먼저 연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 강박적인 루인이지만, 친구(들)과 만날 때 사전에 시간 약속을 잡아서 만난 적은 거의 없기도 하다. 그냥 언제든 연락을 하면 반갑게 만나곤 했다. 딱히 약속을 잡아서 만나는 것보다 갑자기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이 더 반갑고 즐거우니까. 그래, 어쩌면,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이런 식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친구라면 몇 년 정도 떨어져서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없다 해도 아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루인 같이 취약한 인간에게 가장 없는 것이 믿음이지만, 오랜 시간을 만난다는 건, 이런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래서 두어 달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고 하루 만에 만나도 새로 만난 것처럼 반갑다.

요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일 년을 절친하게 지내다가도 별다른 이유 없이 낯선 사람 마냥 지내기도 하고, 오래 만나도 낯설기만 한 사람도 있다. 어차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평생 만나고 싶다고 해서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평생 만날 것처럼 얘기하고서도 다음날 헤어지기도 하니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헤어진다고 해서 아쉬워 할 일도 아니다. 이제 만난지 얼마 안 되지만, 어느 순간, 만난지 10년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힝, 이렇게 적으니 마치 무슨 세상을 달관하거나 관조하는 것 같잖아 -_-;;;)

그러고 보면 이웃 블로거들도 참 신기한 일이다. [Run To 루인]의 즐겨찾기를 사용하며 종종 추가하거나 빼곤 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분들, (키드님 블로그를 매개해서 만난 분들까지!) 정말 고맙고 루인 스스로도 신기하다고 느낀다. 정말 작은 동네 같다.

감정들

며칠 전에 머리를 자르고 꽤 여러 사람을 만났거나 스쳐 지나갔는데 알아 본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두 달 보름 전에 잠깐 만났을 뿐인 사람. 재밌다고 느꼈다. 이건 익숙함과 낯설음이 주는 차이일까? 익숙하기 때문에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낯설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것. 익숙해서 풍경화로 사라진 것과 낯설어서 여전히 거슬리는 것. 하지만 그저, 루인은 누군가가 신경 쓰거나 관심을 가질 만한 종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면 간단한 일이다. 풋.

(어찌하여 해러웨이의 [동반종 선언문]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 발제를 해야 하는데, 아아, 해러웨이의 문장은… ㅠ_ㅠ)

궁상떠는 것도 귀찮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한 마디에 내내 분한 감정을 품었다. 칫, 댁이 뭘 안다고 그래? 라고 중얼거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옹졸해서 그렇다고 자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옹졸함이 주는 감정까지 해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루인에겐, 소위 말하는 “금지어” 비슷한 것이 있다. 이 “금지어”의 효과는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아는 척 안 하는 것-세상에서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예전에 정확하게 이 말(“금지어”)을 해서 처음부터 알고 지낸 적 없는 사이로 바뀐 사람이 있다. 정확하게 이 말(“금지어”)과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유사 언어들. 그런데 이런 유사어를 말했고 그래서 상당한 위험 수위까지 갔다가 현재는 조금 수습한 상태.

어떤 의미에서, 혐오발화들엔 이렇게 까지 반응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혐오발화는 ‘귀엽게’ 받아들이고 쌩긋, 웃고 마는 편. 하지만 컴플렉스 중 하나를 건드리면 문제가 달라지는데, “금지어”는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으아악, 분하다고!!! -_-;;;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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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자주, “나는 살 수 있을까? 살 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