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훌라걸스: 오랜 만에 울다

[훌라걸스] 2007.03.11. 19:15, 아트레온 9관 11층 B-10

영화관에서 이 영화의 홍보영상을 봤던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이 영화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땐 읽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왜일까?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신나고 유쾌한 영화일 거라고 여겼다. 일테면 비슷한 제목의 [스윙 걸즈]처럼. 영화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었고, 이상일 감독 작품을 예전에 읽은 적이 없기에, 그저 가벼운 몸으로 즐겁게 읽고 나오면 그만이란 기대였다. 이런 기대는 다른 의미에서 채워졌는데, 오랜 만에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울 수 있는 영화라는 예상은 못 했지만, 언제든 울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사나에가 이사를 가서 단짝인 기미코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울었는데, 헤어짐이 슬프서라기 보다는 마지막 인사, “또 봐”라는 말이 우리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어떤 예감을 품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서로 그런 예감을 알고 있기에 그토록 절실하게 “또 봐”라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이 두 사람이 못 만났는지, 언젠가 다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봐”라는 말을 통해, 우리 이제 정말 영원히 못 만나는 구나, 라는 의미를 전하는 슬픔.

영화 중후반 즈음이었나, 하와이안 센터의 식물들이 추위에 죽게 되었을 때, 식물들을 담당하는 이들은 마을 난로를 빌리려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물론 하와이안 센터의 식물 담당자도 마을 사람이다) 난로를 빌려주길 거부한다. 그 장면-난로를 부탁하는 모습과 거절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기미코의 엄마도 목격하지만 그냥 지나간다. 그리고 영화의 압권인 기미코가 춤추는 장면을 본 후, 기미코의 엄마는 난로를 모으는데, 이에 마을 주민 일부가 몰려와서 뭐하는 거냐고 말한다. 이에, 꼭 광부여야 하느냐고,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하면 어떻느냐고,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면 안 되느냐고 답하는데, 이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앞서 적었듯, 떠나간 친구 사나에에게서 소포가 오고 엄마는 소포를 전해주기 위해 기미코를 찾아가는데, 그때 기미코는 막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들어오자 기미코는 잠시 멈추다간 다시 춤을 추는데 그 장면이 이 영화의 정점이라고 느꼈다. (어떤 의미에선 이 이후의 장면은 여분이기도 했다.) 고집이 느껴지는 표정 속에서 엄마가 인정하지 않는 춤을, 춤을 통해 설득하고자 했다. 이 순간, 그리고 기미코의 춤을 본 후 엄마가 난로를 모으는 순간, 더 이상 엄마의 삶은 부정 해야할 무언가가 아니게 된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하며 집을 나갔지만 기미코는 엄마’처럼’ 살고 있었다. 고집과 강단이 느껴지는 표정 속에서 기미코가 문제제기하는 건 엄마의 삶이 아니라 엄마처럼 살게끔 하는 관습들이고, 기존의 관습(탄광촌의 “여성”의 삶, “남성”의 삶)이 상상할 수 없게 했던 삶을 통해 엄마처럼 살면서도 엄마처럼 살지 않을 수 있음을 설득한다. 하와이안 센터에 난로를 모아주길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엄마가 아이들까지 우리처럼 살게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할 때, 이는 단 하나만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의미로 운 것만은 아니다. 그냥 그 장면에서 하염없이 울었고, 슬쩍 민망할 뻔했다. 흐흐흐.

[영화] 행복을 찾아서: 그런데 무슨 “행복”?

[행복을 찾아서] 2007.03.10. 09:30, 아트레온 2관 3층 G-17

※곳곳에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The Pursuit of Happyness인데, 영화를 시작하며 뜨는 제목에 Happyness의 y의 글씨체가 다르다. 영화관에서 이 글씨체를 구별하며 재밌다고 느꼈다. 그런데… 영화를 읽다보면 나오지만 y가 아니라 i로 써야 맞는 표기법이다. Happyness가 아니라 Happiness. 루인의 영어 수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잘못 쓴 줄 몰랐기 때문;;; 물론 영화 제목에서 i 대신 y를 사용하는 건,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느낌은 그렇다. 문법에 맞는 행복Happi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문법이 틀리더라도 때에 따라선 행복일 수 있는 그런 행복Happyness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Happyness는 크리스(윌 스미스 분)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머무는 놀이방의 벽에 그래피티로 적혀 있는 글자이다. 중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그 놀이방으로 크리스토퍼를 데려다 줄 때마다 크리스는 철자가 틀렸다고 불평한다.

이쯤 되면 틀린 철자를 통해 영화의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행복을 찾아서]는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추적pursuit하고 있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 영화이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을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재 혹은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미국의 사회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가정하며 그것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 속에 현재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다만 개인이 노력을 하느냐 노력을 하지 않느냐가 “행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조건이 된다. 그렇기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순전히 개인의 문제다.

(이 영화 속의 배경이 반드시 1980년대의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기에 “현재”라고 쓴다면) 현재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가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부의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개인의 능력 문제로 설명하고 있는 사회적인 측면을 이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빈부의 구조를 그나마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잘 곳이 없어 쉼터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앞으로 스포츠카를 타고 즐거워하는 백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이 아니라, 단지 쉼터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혹은 주인공들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가 이다.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성조기는 행복이란 건, 미국 백인 중산층의 부에 따른 그것임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고 크리스의 부단한 노력은, 결국 “노력하면 너희들도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영화에선,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인종주의가 개인의 능력 문제로 지워진다. 인턴들을 담당하는 사람은 유일한 흑인(으로 가정한다면)인 크리스에게만 각종 심부름을 시키며 부하 다루듯 하고, (인턴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성이라고 간주하는 모습이고,) 앞서 적었듯 쉼터에서 하루 밤을 지내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백인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놀이방을 운영하는 중국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이 모든 지점들이 이 영화에선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문제이지 성별이분법과 인종주의가 작동해서는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 영화는 현재 상황에서 크리스가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자본 혹은 돈은 행복Happyness/Happiness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바뀐다. 물론 살아가는데 있어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 건 너무도 분명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란 점에서 돈이 행복이 조건일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돈 혹은 취업이 행복의 도달점일까?

대기업에 입사해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이 최고의 추구점인 이 영화는, 한국의 오늘날과 상당히 겹친다.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기도 전에 행복해야 한다고만 말하는 사회에서, 크리스의 입사는 기쁘고 상당히 감동적이지만(영화 속 크리스의 상황에서 입사를 위한 노력은 어떤 의미에서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끝나며 크리스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하는 자막-엄청난 돈을 벌었고 회사를 설립했다는 내용은 입사를 축하하고픈 감흥을 깨버린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 결국 이렇게 행복의 추구는 돈이라는 노골적인 말은 이 영화의 의도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Happyness는 Happiness의 의도적인 오기를 통해 행복 그 자체를 질문하려 했던 건 아니라고 몸앓았다.

그나저나 린다(탠디 뉴튼 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가 끝나며 나오는 자막 어디에도 린다와 관련한 내용은 없다. 린다의 입장에서 크리스는 유쾌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 린다의 존재는 크리스를 설명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린다가 뉴욕으로 떠나는 장면을 읽으며 영화 말미에 다시 린다와 만나는 통속을 바랐지만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린다의 뉴욕행은 영화 밖으로의 퇴장을, 영화가 설명하는 크리스의 삶 밖으로의 퇴장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퍼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린다의 감정은 모성애라는 어떤 성역할에 따른 본질로 여겨지지만(린다가 크리스토퍼를 키워야 하는 이유로,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를 챙기는 크리스의 감정은 책임감, 자기성실성 등으로 크리스를 포장한다(영화 초반에 크리스는 자신의 친부를 20대에 만났다며 자신의 아들에겐 결코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한다).

그래서 가볍게 영화를 읽으려던 의도는 그렇지 않은 몸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떠오른 말,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 하지만 이 말의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렇지 않음을 통해 권력을 징후하고 있다. 재밌는 역설! 🙂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순박 혹은 “순정”이라고 불리는 폭력

[좋지아니한가家] 2007.03.08. 19:40, 아트레온 7관 9층 I-5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중 읽고 싶은 영화는 세 편. [훌라걸스],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지금 이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이 영화감독의 전작인 [마라톤]은 아직 안 읽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인지 모르는 상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루인에겐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감독이지만, 개봉하기 전부터 몇몇 영화 관련 매체에서 많이도 띄운 영화기도 했다. 물론 관련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 기사가 많이도 나온 건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에 흥미가 생긴 건, 김혜수가 나온다는 거(물론 김혜수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저 90년대 후반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처음 알았는데;; 그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아서 아직까지 김혜수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재밌다는 거 정도랄까? “좋지 아니 한가”와 “좋지 아니 한 家”를 동시에 의미 하고 있어서 재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포일러는 기본
이 영화를 읽던 와중에, 불현듯 모든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정도의 장르일 이 영화는 불현듯 아주 불쾌한 영화로 바뀌었는데, 그건 아들 역할을 하는 용태(유아인 분)가 하은(정유미 분)에게 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반에 용태는 하은의 집 앞에 가선, 하은이 원조교제(혹은 ‘청소녀’ ‘성판매’)를 하는 걸 알고, “창녀 같은 X야”라고 외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불쾌함은 그 다음에 찾아가선 뜬금없이 “모든 걸 다 용서 할께”라는 말로 바뀌고 그러고선 매일 찾아가선 용서한다고 말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누가 누굴 용서할 권리/권력이 있으며, 하은은 무슨 잘못을 한거지?

이 불쾌함 때문에, 용태의 이런 태도는 후반에 뒤집힐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걸 기대했다. 즉 마치 용태 자신에게 하은을 용서할 권리/권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도한 기대였고, 감독은 이런 용태의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가고 이것을 사랑에 따른 “순정” 혹은 “순수함”으로 포장한다. 쳇. 불편함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천진함 혹은 순수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렇게 의미화하는 것에 따른 해석이다. 얼마 전, 우연히 동영상을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끈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은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우선 한 명의 흑인(지금 이 글에서 흑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싸잡아 획일화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이다, 다만 그 사람의 국적이 안 떠올라서;;;)이 나와서 자신의 나라는 스페인(?) 혹은 유럽의 어느 나라가 사실상 700년 가까이 침략해서 지배했지만 사과 한 마디 안 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35년 간 침략한 건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한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그 사람은 정말 “한국인”일까?)이 35년이 아니라 36년이라고 정정하며 ‘차분’하게 식민지 기간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침략했다는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그 “흑인”은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읽다가 짜증나서 닫았는데, 그 짜증의 이유는 댓글들에 있었다. “한국인”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데 “흑인”은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말한다는 내용들. (물론 일본식민지 경험과 관련해서 상상 가능한 댓글들 역시 수두룩했고!)

루인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마다 감정이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른 반응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20년을 살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루인은, 루인의 말투로 인해 종종 씨니컬하다, 공격적이다, 라는 얘길 많이 듣는 편이다. 한동안은 루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고 지금도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이는 단순히 루인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와중에 깨달은 건, 재밌게도 정작 부산에선 이런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며 문득 떠올랐다. 지역에 따른 말투의 차이를.

부산에서 살다보면 종종 서울지역어를 비꼬는 얘길 자주 듣는다. 현재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적하면, 대충 “말투가 곱상한 것이 재수 없다”란 반응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당연히 양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며, “머시마가 재수 없게 말투가 그게 뭐냐”라는 반응들. 이에 반해 서울에 살며 자주 들은 혹은 방송을 통해 듣는, 부산이나 경상도 지역의 말투나 언어에 관한 내용은 공격적이고 쌈질 하는 것 같음이었다. 즉, 부산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꼭 싸우는 것 같다는 반응들. 물론 루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거나 씨니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말투나 루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지역색을 배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루인의 말투가 공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비부산, 비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그래서 어떤 지역에선 일상적인 말투가 다른 지역에선 공격적이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로 여겨진다.

그 “흑인”의 말투가 감정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겨진 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 비추어 발생하는 반응이고, 여기에 한국의 극심한 민족주의, 일본에 가지는 열등감, 그리고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이 겹치며 발생한 반응임을,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에서 느꼈기에 더 이상 그 동영상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어떤 “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루인에겐 용태의 행동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용태에겐 애시 당초 하은의 감정이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하은의 상황에 관심 없기로는 감독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은 그저 엄마가 아프지만 약값도 없는 가난한 상황의 하은이라는 정도의 설명만 한다.) 용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순정” 혹은 “순박함”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행동양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은은 “원조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용태의 모든 행동은 더욱더 정당화 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하은의 반응은 언제나 무관심이고 그래서 용태의 행동은 튕겨나갈 뿐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점에 있는데, 하은의 무반응은 용태의 말을 수긍하는 동시에 무시한다. 즉, “그래서 뭐?”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는 용태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용태의 비난과 “용서”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용태의 행동이 얼마나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용태의 아버지 창수(천호진 분)의 동영상을 본 후 하은을 찾아가 신경질을 내고 혼자서 나자빠지는 장면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착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사실은 제멋대로의 행동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판단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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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족이 새롭지 않았는데, 이 영화 속 가족구도가 새롭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화 속의 가족구조 자체가 새로워서는 아니다. 새롭다니? 너무도 익숙한 걸.

이 영화를 읽고 나왔을 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읽으려면 다섯 번은 읽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캐릭터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고, 용선(황보라 분)이란 인물은 참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며 등장하는 용태와 하은의 관계는 다른 지점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다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