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세미나, 버틀러, 네이버의 만행

마땅한 제목이 없으면 “근황”이란 제목이 제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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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온다. 새벽 4시에 잠들어 아침 8시에 일어났는데, 현재 그런대로 멀쩡한 상태다. 혹은 멀쩡하다고 혼자서 착각하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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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인 수요일까지 마감해야 하거나 어느 정도 마감을 해야 하는 글이 네 편이었다. 하지만 월요일 밤까지만 해도 두 편이었는데, 월요일 늦은 밤, 몇 통의 문자를 주고 받다 마감하거나 다시 한 번 퇴고를 해야 하는 원고가 두 편이 더 늘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마감일이 어제였다 -_-;;; 어쨌든 무사히 끝나고 저녁엔 출판회의를, 밤 9시엔 세미나를 했다;;; 야심한 시간의 세미나라니… 하지만 버틀러_였기에 즐거웠다.

세미나 자리에서, 이웃블로그님의 글과 댓글을 통해 알았던 사실을 살짝 확인했다. 올 가을 즈음, 버틀러와 조안 스캇이 한국에 올지도 모른다고. 현재 초청하려고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 꺄릇♡♡♡ 물론 올지 안 올지는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우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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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한 시간의 세미나가 끝나고 새벽 3시 40분 즈음까지 뒷풀이를 했다. 밤 12면 자는 인간인 루인은 살짝 조는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재밌었다. 그렇게 玄牝으로 돌아와 3시간 조금 더 자고 일어났다. 뒷풀이 자리를 파하며, 시간이 참 애매하다고 느꼈다.

만약 엠티 같은 자리여서 아침에 돌아 오는 거라면 그냥 하루 종일 잘 예정이었다. 하지만 玄牝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4시 즈음이었고 씻고 정리하다가 잠들어도 종일 잠에서 뒹굴며 나가지 않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분명 아무리 늦게까지 잠든다고 해도 10시면 눈을 뜰테고 그렇게 종일 이불 속에서 뒹굴면 좋긴 하지만, 그렇게 몸의 리듬을 깨고 싶진 않았다.

종일 이불 속에서 뒹굴며 나스타샤랑 영화라도 읽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읽고 싶은 글도 있고, 사무실에 나와서 멍한 상태로 꾸벅이다가 일찍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사무실에 나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몸의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오늘 하루가 아니라 지속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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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버틀러를 읽을 때에만 _이런 표정을 지었다면, 요즘은 버틀러 이름만 듣거나 읽어도 _이런 표정을 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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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키드님 블로그에서 “어이없는 네이버“란 글을 읽고 섬뜩하고 화나고 분개하고, 그랬다. 특히나 이요님블로그에서 관련 글을 읽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나 화가 났던 부분은, 글을 단순히 비공개로 바꾼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린 점. 블로그에 글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간을 들이는지 알기에 분노했고, 그래서 네이버의 블로그 관리자들은 블로그를 사용하는지가 궁금했다. 만약 그들이 블로거였다면 그럴 수 없으리라는 믿음. 아니 적어도 글을 쓴다는 것,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럴 수 있을까 싶다.

더군다나 네이버는 검색사이트도 아니잖아.

불쾌의 쾌: 우울증

“불쾌의 쾌”라고 프로이트옹은 말한 적 있다. 켁. 치유 혹은 치료를 계속해서 미루며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그것을 지속하고 이런 과정에서 쾌락을 느낀다는 뜻이라고, 날림으로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사람에겐 불쾌이지만 자신에겐 쾌락이니 불쾌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에게(도) 불쾌이기에 쾌락인 셈이다. 그래서 “불쾌의 쾌”인 것이고. 이와 관련한 예로, 프로이트옹은 아이들이 대변을 참으며, 그렇게 참는 과정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우울증이, 사실은 최고의 쾌락임을 깨달았다. “우울해~!”라는 외침은 한편으론 “즐거워”라고 말하는 의미라는 것도 아울러 깨달았다.

키워드: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섹슈얼리티]

두려움이 말하는 것

어떤 행동에 앞서 발생하는 두려움, 걱정, 불안은 내 몸에 축적되어 있고 침전물로 가라 앉아 있는 관습, 금기, ‘경험’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다. 바닥에 침전물이 가라 앉아 있는 비이커의 물을 저어 침전물들이 회오리처럼 일어나듯. 두려움은 그 동안 내가 어떤 환경 혹은 관습(승인과 금기) 속에서 살았고, 어떤 규범을 요구하는 맥락에서 살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다. 동시에 나를 둘러싼 여러 지배규범들과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자신의 “나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축적되어 있고 깊히 가라 앉아 있어서 없는 것만 같은 흔적들, 금기(인 동시에 승인)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하는지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무엇을 입을 지를 망설이는 과정이 이러하고 루인의 매니큐어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보는 과정이 이러하다. 한 편으론 매니큐어를 심드렁하게 드러내고, 다른 한 편으론 매니큐어를 한 손톱을 숨기려 한다. 루인의 몸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짐작할 수 있을 뿐, 알 수는 없다), 루인의 외형과 매니큐어는 언제나 어떤 충돌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거의 매일 접하는 김밥가게 주인은 매일 루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루인의 손톱을 볼 때마다 매번 표정을 바꾸고, 그렇게 바뀐 표정을 접할 때마다 루인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만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루인은 이런 루인을 바라보는 루인에게 이래저래 변명한다.

필요한 건, 허무맹랑한 “자부심”이 아니라 이 두려움을 읽을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이다. 그리하여 이 용기와 상상력, 두려움이 사실은 자부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