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 포터

[미스 포터] 2007.01.28.20:00, 아트레온 3관 5층 C-17

영화관에 가고 싶은 날이 있죠. 무슨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기 보다는 그저 영화관에 가는 것, 그 자체를 바라는 것. 어떤 전환 혹은 휴식을 바라는 몸으로 그런 것이기도 해요. [블러드 다이아몬드]와 갈등했지만, 좀 쉬고 싶은 몸이었어요. 그래서 선택했죠.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즈음, 뭔가 심심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연기자들의 연기도 괜찮고 2D로 그린 만화 캐릭터들도 정말 깜찍하고 좋았는데, 허전하다는 느낌.

이 영화는, 성차별과 계급, 신분, 개발과 환경 등을 매개로 여러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었어요.

일정 나이가 지난 “여성”들에겐 무조건 결혼할 것을 강요하죠. 주인공 포터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라면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엄마와 대립해요. 그런데 이러한 “여성”의 결혼이라는 것이 상당히 계급 차별적이라서 유모나 하녀 신분의 “여성”에겐 결혼을 강제하지도 당연시하지도 않아요. 결국 결혼할 수 있고 결혼을 당연시 하는 “여성”은 특정 계급과 계층에 한정할 뿐이죠. 이렇게 결혼이 ‘당연한’ 성역할인 신분의 “여성”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남성”과 결혼해야지 신분이 다르면 언제나 제약이 따라요. 지금의 한국처럼. 하긴 결혼에 있어 신분과 계급, 계층은 영원한 장벽인지도 몰라요. 한국 사회에서 안 그런 시기가 있었나요? 적어도 루인이 살아온 환경에선 그랬어요. 부모님들은, 얼른 결혼하라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계층을 얘기하죠. “너무 잘 사는 집 말고, 우리랑 비슷한 정도의 집이 좋겠다”고. (소위 말하는 계급재생산인가요? 크크.)

영화의 중반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난 후의 우울증을 보여줘요. 루인으로선 너무도 사랑할 법한 장면들. 하지만 금방 지나가네요.

후반부는, 책으로 번 돈으로 많은 땅을 사는 모습이에요. 포터가 어린 시절 놀던 마을의 땅을 사들이죠. 그 마을을 개발하려는 이들과 경매를 통해 포터가 그 땅을 사들이고, 그렇게 하여 포터가 기억하는 혹은 원하는 자연 그대로로 두죠. 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은 계속해서 농사를 짓고요.

예. 이렇게 적으면 이 영화, 상당히 정치적인 영화고 관련해서 많은 논쟁과 고민을 던져준다고 여길 수 있겠죠. 하지만 포터는 동화작가예요.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심심하다고 느낀 건, 이 많은 논쟁점들이 별다른 갈등 ‘없이’ 해소되었다는 점 때문이죠. 그래서 “괜찮긴 한데 심심해”라는 말을 중얼거렸죠. 그러다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어요. 이 영화 역시 동화라고.

헐리우드 식 갈등구조에 익숙하다면, 혹은 소설 구조에 따른 갈등구조에 익숙하다면 이 영화의 갈등과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은 너무도 심심해요. 하지만 이 영화는 헐리우드 식 서사에 따르지 않아요. 오히려 포터가 쓴 동화의 구조에 따라 갈등을 전개하고 그것을 해소하죠. 이 영화는 단순히 미스 포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아니라 포터의 일대기를 그리는 동시에 포터가 갈등과 그것의 해소를 전개하는 방식까지를 따르고 있죠. 단순하게 역사 속의 인물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구조 자체를 그 인물이 사용하는 방식에 맞추는 것. 이걸 깨닫는 순간, 정말 잘 만든 영화구나, 라고 중얼거렸어요.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다 읽고 영화관을 나서며, 포터의 책을 사서 읽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어요. 물론 이 영화, 두 번 읽고 싶을 정도의 매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포터의 책을 여러 권 읽고, 포터가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이 영화를 읽었다면 훨씬 재밌었겠다 싶더라고요. 아, 그렇다고 책을 미리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영화 속에서 포터가 동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물론 끝까지 다 보여주진 않아요. 재미있어 질 즈음, 끝내죠. 영화에서 안 나온 부분은 책을 사서 읽도록 유도하는 건지도 몰라요. 🙂

그나저나, 여전히 남는 불만은, 이 동화는 누구의 동화일까요? 영화를 읽다가, 포터의 계급을 알면, 결코 동일시하기가 쉽지 않아요. 영화를 통해 구성하는 동화는 결국, 그들만의 동화가 아닐까, 라는 불평을 품고 있어요. 혹은 그 당시의 시대에서 (특정 계층에만) 가능한 동화 거나요.

말의 상실, 몸 가는 길

밤에 잠 들 때면, 하고 싶은 말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피어난 말들이 몸을 타고 돌면, ‘그래, 내일은 이런 글을 써야지’라고 다짐한다.

자고 일어나면 잠 속으로 말들은 빠져들고, 하고 싶다고 다짐했던 말 중 남아 있는 말은 없다. 무엇을 말 할 수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든 걸 잊어버린다. “이상한 나라”에라도 갔다 온 걸까? 혹은 몸 어딘가에 말들을 숨긴 걸까.

몇 가지 일들이 있지만, 쓸 수 있는 것도 쓰고 싶은 것도 없다. 왜일까? 이렇게 쌓아두면 언젠가 다시 말들이 넘쳐흘러선, 마구마구 쓰는 날도 올까? 하지만 글 좀 안 쓴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 걸.

하루면 읽을 수 있을 글들을, 이틀이나 걸려서 읽곤 한다. 게으름을 반증한다. 하지만 좀 게으르면 어때. 강박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들. 그런 강박 속에서 실상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몸은 없고 강박만 남은 걸까? 강박이 몸을 잠식한 걸까? 그래, 몸은 없고 강박만 남았다: 강박이 몸을 잠식했다.

서두르지 말기로 해, 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린다. 루인이 무식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타고난 재능도 없으니, 그저 꾸준히 진행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좀 놀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것대로 또 좋은 거다. 몸은 솔직하니까.

즐거운 몸. 즐거운 몸. 몸 가는 데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