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묵공: 나의 말은 나의 권력이 담보한다.

[묵공] 2007.01.24. 18:55, 아트레온 7관 9층 E-19

01
어둠의 파일은 진즉에 받아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왜 극장에 가고 싶었을까? 무협영화나 중국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저 이주일 만에 아트레온에서 내린다는 걸 알아서 일까?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저 묵자와 관련 있다는 정보 하나-하지만 묵자나 묵가사상이 뭔지는 모른다-, 일전에 ps네 갔다가 영화정보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소개했고 심드렁하게 봤던 기억 하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어요.

02
영화를 보며 순간적으로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한 축은 일열(판빙빙 분)과 혁리(유덕화 분)의 관계. 일열이 왜 혁리를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초반의 일열은 항상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 어색했다. ㅠ_ㅠ 아니, 어색했다고 하기 보다는 뭔가 포스가 부족했다. 일테면 왕자로 나온 양적(최시원 분)이 왕자로서의 포스를 갖지 못한 것처럼(심지어 연기도 어색하다!). [사실, 갑옷을 입고 나온 사람 중에서 갑옷의 포스와 어울리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_-;;] 그럼에도 그 모습, 꽤나 멋졌는데, 혁리를 간호하는 장면 이후로, 특히나 혁리와 일열이 같이 조나라를 염탐하고 돌아 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갑옷 입은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이 순간부터 내내 불편하고 불쾌함을 느꼈다.

혁리는 영화 내내 혁리로 존재하지만 일열은 혁리를 좋아하는 순간 더 이상 기마병 장군이 아니라 혁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일열도 군사들을 지휘하지만, 이 장면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다소 ‘진부한’ 방식으로 읽으면 “남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성”-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여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남성을 매개해서만 존재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랄까.

물론 이런 식의 독해 역시 불편하다. 혁리도 일열도, 영화 속 누구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말한 적 없다(“왕자”가 곧 “남성”임을 “딸”이 곧 “여성”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일테면-맥락은 다르지만-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를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일열과 혁리의 사랑은 ‘동성애’일 수도 있고, 둘의 관계를 어떤 특정 성적 지향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고통 받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성찰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읽고 싶었다.

03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몸에 와 닿은 말은, 혁리고 뭐고 가족이 다 죽었는데 내게 무슨 소용이냐는 한 평민의 울부짖음이었다. 묵자나 묵가사상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루인에게 이 영화는 권력이 대표성을 담보해 줌을 말한다고 읽었다.

알다시피 소위 말하는 대의명분이라는 것, 민족이라는 것, ‘우리’라는 것, 국가의 존망이라는 것, 경제적인 손실이라는 것 등은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있는 현대자동차의 파업 사태를 접하며 답답했던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파업한 노동자를 욕한다는 것. 최근의 사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파업은 노동자라는 가해자와 노동파업에 따른 경제적인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자인 경영자라는 구도이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는 노동자 편이라는 식의 구도를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라 항상 회사나 국가, 민족과 같은 어떤 “대의명분”이라는 것 앞에 개인의 욕망은 무시되거나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는 점이 화가 난다는 의미이다.

감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루인은 이 영화를 이 지점에서 읽었다. 소위 대의명분이라고 불리는 민족이나 국가란 이름 아래 개인의 욕망과 생명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런 대의명분이라는 것도 결국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 결국 권력관계가 어떤 개인(일테면 왕)의 욕망은 국가적인 것, 그래서 너무도 중요한 것으로 만들지만, 다른 어떤 개인의 욕망은 하찮거나 무례한 것, 과도한 것으로 만든다.

황장군(안성기 분)이나 왕의 전쟁 욕망은 대의명분이나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이 상대방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황장군이나 왕의 개인적인 욕망은 국가적인 대의명분이고, 한 평민의, 한 병사의 욕망은 국가의 존망을 거스르는 위협이나 부당한 과욕이 된다. 결국, 자신의 언어가 힘을 가지기 위해선 논리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 자신의 말은 자신의 권력 여부가 담보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읽으며 느낀 지점이며 이 영화가 말하고 있다고 느낀 지점이다.

기업의 이득(사실상 기업주의 이득), 국가의 이득(기득권자의 이득)이 다른 그 어떤 이득보다 중요하다고 정규교육을 통해 배우는 사회에서, 이런 지식이 말하지 않는 이들의 요구는 언제나 부당하고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모든 파업은 곧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행동이라고 욕하는 상황.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때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때, 더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다는 건 무얼 의미하나.)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끊임없이 침묵할 것을, 기업주가 주는 월급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의 목소리/주장은 언제나 해서는 안 될 범죄이다. (결국 일열은 성대를 잘린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아부가 아니라 저항이 권력을 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최근 한 매체에서 “economicS”라는 글을 읽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04
물론 영화는 무난했다.

미련-헤어짐의 당연함

몇 해 전만해도, 다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얘기하면, 언제나 루인만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느꼈다. INFP의 잔다르크 형 인간인 루인에게 현재는 회피의 대상이고 미래는 과대망상으로 가득해서,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저 ‘무얼 하고 싶어’의 문제이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고민하지 않는 편이었다. (고민한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정당화하면서…)

이런 루인이기에 십 년이 지나도 루인은 언제나 여기, 이곳에 있기 마련이었다. 이에 반해 상대방은 어딘가로 떠난다는 얘기를 했다. 그것이 유학이건 뭐건 상관없이 어딘가로 떠날 거라는 얘기. 그것이 아쉬웠다. 평생 친구로 함께 하고 싶은 바람이 있을 때, 이렇게 떠난다는 말은 아쉬움을 넘어 결국 또 다들 떠나는구나 하는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루인에게 떠남은 영원한 이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기에 이별을 준비해야겠구나,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전에 연락이 끊겼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루인이었는데, 최근, 문득, 다른 누군가에게 루인이 어딘가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얘길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고 정말 떠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외국으로 몇 년간 떠날지도 모른다는 얘길 하는 루인을 깨달았다. 물론 그런 말들의 끝엔 “하지만 돈도 없고 영어를 못 해서 안 갈 거 같아요.”라고 덧붙이며 웃고 말지만.

어느 새 떠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아쉬워하는 루인이 아니라 떠날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정이, 그나마도 적었는데, 사라지고 있는 걸까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그저 떠남과 헤어짐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사실 루인은 루인이 마냥 어딘가에 머물 줄 알았다. 어떤 공간의 풍경화가 되는 루인을 얘기한 적도 있듯, 그저 머물면서 여전한 모습으로 지낼 거라고 믿었다. 10년이 지나도 후줄근한 모습 그대로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어떤 사람들은 이주일에 한 번, 뭔가 느낌이 변했다고, 뭔가 달라졌다고 루인에게 얘기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오랜 만에 만나며, 여전한 모습이라고 얘기한다. 매 순간 변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선 변하지 않는 모습이란 의미일까.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는 의미일까.

헤어짐, 이별, 이런 말들을 이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걸까? 하긴, 그러고 보면 이제 9년에 접어드는 친구와도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하며 이별을 준비하는 몸으로 만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겐 떠나길 독촉하고(헤어짐 혹은 이별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람과는 여행 중에 만나는 인연 정도의 의미로 만나고. 그렇게 스치고 지나치고 만나고 이별하고 떠나고 붙잡지 않고…. 그러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고.

예매하고 몸 상하다

지난 날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며, 오늘 모든 일정을 12시에 맞춘 상황이었다. 12시 땡~ 하자마자 예매에 들어갔고 스탠딩이 얼추 200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좌석을 선택하려고 할 때마다 이미 예매했다고 떳고 표는 꽤나 남았음에도 예매 가능한 좌석은 표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보니, 어느 순간 10장이 남은 상황. 계속해서 예매의 좌석 사이트는 제대로 표시가 안 되다가 간신히 스탠딩 표를 선택하고 결제까지 간 상황에서… 이미 다른 누군가가 결제했다는 공지.

[#M_ …………………………………………………………… | …………………………………………………………… |
_M#]

좌절.

화가 날 상황이지만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예매를 처음 하는 이의 비애겠지.) 다시 차분하게, 그냥 A석ㅠ_ㅠ을 예매했다. 일단은 공연장에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음에 우연히 누군가의 취소로 스탠딩을 재구매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공연장에 가는 것이 중요하잖아. 그치? 그치? ㅠ_ㅠ 뮤즈공연인데 가까이서는 못 보더라도 어쨌거나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잖아… 흑흑흑.

하긴, 만약에 다른 상황으로 18일에 예매를 못 했다면 슬쩍 화가 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은 활동가대회였고 그 시간이 루인에겐 의미있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걸 위로 삼아야지. 언젠간 영국에 가서 뮤즈 공연을 보리라 다짐하면서. 아님 섬머소닉페스티발에 뮤즈가 참가 한다면 갈까?

아무튼 가기는 가는데, 신나려고 하기엔 슬쩍 아쉽다.

자, 자,
뮤즈 스탠딩 표 구합니다~~~
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