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계획: 논문

주말이면 학교 연구실은 싸늘하다. 금요일 오후를 끝으로 더 이상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터를 켜지만 그 건조함 때문에 항상 망설이곤 한다. 대신 라지에이터는 건조하지 않다. 특히나 루인이 머무는 공간의 라지에이터는 종종 종이가 눅눅해질 정도로 충분한 증기를 뿜는다.

그런데, 지금, 라지에이터가 나온다!!!!!!!!!!!!!!! 으하하. 따뜻해♡

그나저나, 며칠 전부터 2007년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까지 신년 계획 같은 거 세운 적이 없는데, 왠지 이번엔 예의상 한 번 정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2007년도엔 무얼 할까, 막 궁리를 하지만, 이런 궁리도 1초를 넘기기 힘들고, 단어 하나를 넘기기가 힘들다.

맞다. 논문. 이 한마디면 내년의 모든 계획이 세워진 셈 이다. 내년의 생활은 이 단어 하나로 수렴하고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생활을 논문에 맞출 것이고 논문 쓰는 몸으로 바꾸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쓰고 있는 루인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나오는 석사 논문은 혼자서 다 쓰는 것 같다 -_-;; 석사 2학기 때부터 지도교수와 석사논문을 준비하질 않나, 유난을 떨어도 온갖 유난을 다 떨고 있다. 마치 석사학위논문을 취득하러 대학원에 간 것 마냥.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학위 자체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학위가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그만인 심정. 학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쓴 논문의 내용, 글이 문제이다.

루인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려고 쓰고 싶은 글을 쓰려고 대학원에 왔다. 학위논문은 이런 욕망을 자극하고 이런 욕심을 충족시키면서도 이런 욕심으로 끊임없이 긴장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좋다. 논문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것을 매개로하는 여러 과정들을 겪는 것이 좋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자극을 찾고 어제의 자신을 비판하고.

루인은 루인의 지도교수가 참 대단하다고 느끼고 존경할 만 하다고 느끼는데, 그건 루인의 지도교수여서 하는 아부성 발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루인의 지도교수에게 수업을 듣거나 논문 지도 받길 꺼려한다고 한다. 하지만 루인은 정말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최고의 선택이라고 느낀다. 선생님 방에 가면 항상 새로 주문한 책이 쌓여있고, 언제나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영문학 전공자인 선생님은 안식년이면 새로 대학원에 입학해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하시고(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40대 후반으로 추측 중) 현재의 앎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모습. 그 모습은, 배우는 학생으로 하여금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시에 이건 자신의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렇게 지도교수-논문 쓰는 학생이라는 관계가 맺어졌을 때의 관계윤리라고 느낀다. 루인은 루인대로 계속 공부해서 선생님을 자극하고 더 신경써주도록 도발해야하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학생이 더 하도록 재촉하고 자극하고. 문득 학기 초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 떠오른다. “나는 자꾸만 나아가라고 재촉할 테니 루인은 그 안에서 더 완벽하려고 노력해라.

이 말을 다시 되 세기고 싶다. 지금 루인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안에서 더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 아직 많이 부족한 루인이지만 이것이 핑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재촉하자고.

쌍둥이자리의 연애?

관련 리플은 여기, ㄹ모씨가 쓴 글. 흐흐.

예전에 한창 별자리 관련 글을 찾아 읽다가 어떤 한 문장을 읽고 박장대소를 하면서 “맞아, 맞아”를 연발했던 적이 있다. 그 문장은 대충 이런 내용인데, “쌍둥이자리는 방금 전까지 사랑한다고 얘기하다가도 갑자기 양말 디자인이 맘에 안 들어 헤어지자고 얘기하는 싸이코“라고.

조금 더 자세히 풀면, 눈에 콩깍지가 끼면 다 좋아 보인다는 말이, 쌍둥이자리 혹은 루인에겐 적용이 안 된다는 거. 루인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싫은 지점은 다 분석하는 인간이라는 거. 그리고 그걸 말로 한다는 거;;;;;;;;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싫은 부분은 싫다는 게 쌍둥이자리의 특징(노골적으로, 루인이 아니라 쌍둥이자리의 특징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_’a)이다. 그러니 1분전까지 사랑한다고 얘기했다가 갑자기 사랑이 싸늘하게 식어선 헤어지자고 얘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설령 그전까지 모든 것이 좋다가도 어느 한 순간, 상대방의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얘기할 수도 있다는 거.

근데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싫은 건 다 보이지 않나? 단지 그걸 참을 수 있느냐 더 이상 참을 수 없느냐가 문제인 것 같은데. 콩깍지가 마냥 다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있는 그 기간까지를 얘기한다면 콩깍지가 많은 걸 가능하게 하겠지만…,

연애 상대가 채식주의자였음 하는 이유

키드님의 글, “연애의 조건“을 읽고 루인의 글을 다시 읽다가 글을 참 성글게 썼구나, 했다. 그러니까, 루인은

다만 이상형은 아니고 조건이 있을 따름인데, 주지하다시피 루인과 같은 채식주의자(vegan)여야 한다. 언젠가 장난삼아 쓴 글에서도 밝혔듯,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라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헤어지겠다는 것이 루인의 입장일 정도로 완고하다. 관련해서 별로 안 좋은 기억이 몸에 남아 있기 때문.

이라고 썼다. 그러며 키드님이 든 [폭풍우 치는 밤에]란 비유에 깔깔 웃었는데,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_-;;; 흐흐.

개인은 누구나 자기 트라우마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는 ㄹㅇ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참이라고 가정하면[웬 뜬금없는 수학과의 논제 증명 방식? ;;;], “관련해서 별로 안 좋은 기억”이라는 문장은 너무도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 그 기억 혹은 경험이 연애의 조건을 채식주의자로 한정하도록 했다. 다만 그 기억 혹은 경험을 다시 쓰기가 꺼려지는 건, 마치 그 상대방을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기 때문. (그리고 왠지 관련해서 한 번은 쓴 것 같은데 못 찾겠다. 지금 쓰는 방식과 과거에 쓴 방식을 비교하면 재미있을 텐데.)

연애는 아니지만 사귀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밥 먹자고 자주 루인을 불렀지만 그렇게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은 루인과 같이 있으면 맛있는 것을 못 먹는다고 끊임없이 뭐라고 했었다. 그 맛있는 것이란 고기나 유제품 등을 이용한 음식들을 의미. 당연히 루인처럼 성격이 나쁜(!, 성격 나쁜 건 인정하지만 고칠 의향이 전혀 없어 문제인;;; 크크크) 아해는 한동안은 그냥 루인 잘못이려니 참았지만 한계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사람은 루인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며 언제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바뀐 것.

사실 그 사람은 루인이 그런 말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관계를 엮어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했다. (물론 루인이라고 그 사람에게 마냥 착했던 건 아니다. 착하다니! 루인처럼 까칠한 인간이 착할 리가!)

며칠 전 한 술자리(루인에게 이상형을 물어본 그 자리)에서 채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사람(ㅈ)이 “연애를 하면 힘들겠다”는 의미의 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ㅇ)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각자 시켜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답(ㅈ)이 “음식을 먹으러 간다는 건 단지 같은 식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지적이 꽤나 정확하다고 느꼈는데(루인에게 “같이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의 의미 역시 이 지점이기도 한데), 같이 식사를 한다는 건 단순히 하나의 식탁에서 같이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 어떤 음식을 공유하고 그것과 관련한 혹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vegan인 루인은 루인과 식성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음식문화는 극히 제한적이다.

일테면 루인은 순대 삶는 냄새를 너무도 싫어하는데, 루인이 채식을 갈등하던 시기에 가장 견디기 힘든 냄새가 순대 삶는 냄새였고 그 냄새가 채식을 결심하게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여전히 순대 삶는 냄새를 싫어해서 순대집이 근처에 있으면 길을 돌아갈 정도. 그런데 어느 날, 사귀는 사람이 순대나 순대국을 먹고 싶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굳이 루인과 순대국밥집에 가고 싶다고 느낀 것 자체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느낀다. 그건 정말 순대나 순대국이 먹고 싶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와 관련한 다른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기에 그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과 관련해선 이런 지점들이 너무도 많은데, 사람들과 만나면서 루인이 가장 스트레스 받는 건 사람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고깃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루인을 매개해서 너무 많은 고민을 하고 얘기를 한다는 점이다. 같이 있는 자리의 사람들만 좋으면 고깃집에 가는 것도 그다지 망설이지 않는데(스트레스야 꽤나 받아도), 사람들의 과도한 고민/관심은 오히려 루인이 뭔가 굉장히 잘못한 것 같아지고 동시에 루인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채식을 하지만 채식 식당과 같은 관련 정보는 전혀 모르고 별로 신경도 안 쓰는데(루인의 주식이 괜히 김밥이겠느냐고, 흐흐) 루인을 생각해서 누군가 채식식당을 알아오고 그러면 고마움과 미안함과 편치 않음이 동시에 몸을 타고 돈다. 루인을 만나며 상대방이 채식 혹은 음식과 관련한 고민을 새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상대방이 루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_-;;;(이토록 뻔뻔한!) 동시에 자꾸만 루인이 뭔가 잘못한 것만 같은 느낌. 괜히 루인 때문에 안 해도 되는 고민을 시켰다는 미안함.

더구나 루인의 채식은 무엇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데, 식당이나 음식을 선택할 때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무엇은 먹고 무엇은 안 먹는 지로 환원하면, 그때의 감정은 좀 더 복잡하다.

그래서 연애의 조건으로 루인과 같은 “채식주의자”였음 한다고 적었다(사실이기도 하고). 물론 그 사람은 정말로 채식주의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어도 어떤 소통이나 관련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지만, 그 관계 맺음이라는 것이 엄청난 대화를 요구하고 그 과정이 애인이라는 관계에서 요구하는 것(혹은 그런 관계에 가지는 환상)이라기보다는 동지나 친구 관계에서 가능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장 절친한 친구와도 밥 먹으러 가길 꺼려하겠느냐고. 루인이 지나치게 정치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관계 맺기가 상당한 긴장과 논쟁을 요구하는데, 비록 애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긴장과 논쟁에서 루인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 걸 느꼈고, 애인이 채식주의자라면 이런 스트레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엮어갈 수 있겠구나 했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떠오른 느낌. 루인 저 인간 연애에 환상이 있는 거 아냐? 흑흑.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는 거.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