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버스탐 요약번역

Judith Halberstam – “Transgender Butch – Butch/FTM Border War and the Masculine Continuum”
+파일 링크수정: http://goo.gl/RT0k

어제 있은 세미나를 위한 자료랍니다. 주디스 할버스탐의 Female Masculinity란 책의 5장, “Transgender Butch – Butch/FTM Border War and the Masculine Continuum”(트랜스젠더 부치 – 부치/FTM 경계분쟁과 남성성 연속체)을 요약/발췌 번역한 것이지요.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이 있을까 해서요.

요약 혹은 발췌 번역한 부분의 내용은 부치(특히 스톤부치)와 FTM/트랜스”남성”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고 구분 자체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

처음엔 완역을 목표로 했으나, 으하하, 역시 실력이 부족하여 포기. 발췌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많아요. 또한 기존의 번역어와 다른 해석을 한 지점도 있어요. 일테면 dysphoria는 불일치, 정신 불안, 신체 위화와 같은 뜻으로 “gender dysphoria”(“성별 불일치” 정도?)라 하여 트랜스를 의학에서 병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단어에요. 하지만 루인으로선 트랜스를 정신병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경합”으로 해석했어요. 어차피 모든 번역은 번역자의 해석과정이란 점에서, 번역하는 사람의 입장을 반영하는 언어들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여러 언어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는 점만 유의하시면 될 듯.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오역까지는 아니어도 문장이 안 맞거나 문제가 많은 번역이 있을 거예요. 초고에 가까운 번역문이란 점을 유의해주세요. 루인이 직접 쓴 글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글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이 글은 그냥 혹시나 관심 있는 분이 있을까 해서 링크하는 것이기에 거슬리는 번역이 있어도 조용히 무시해주세요ㅠ_ㅠ 루인도 양심이 있지(정말?) 이렇게 번역하고 논평을 바라진 않는 답니다. 흑흑흑. 어제 세미나에서 이 자료를 사용한 건, 그나마 사람들이 텍스트를 읽고 온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이걸 발제문으로 못 쓰죠. 흑. 그저 이런 글도 있다는 정도, 혹은 관심이 있는데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된 상황이고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도 몇 곳 없다는 점에서, 부족하나마 조금이라도 정보를 나눈다는 의미이니, 딱 그 정도 선에서 받아주면 좋을 것 같아요. 헤헤.

성별/젠더를 뒤섞은 후: 자격지심

오프라인에서 루인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애칭의 하나로 붙여준 것 중에, 유령 혹은 투명인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루인이 있는 줄 아는데 혼자서 아무도 자길 못 볼 거란 착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길에서 루인은 안 보고 다니고 안 듣고 다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건 지지(mp3p)와 놀고 시력이 “나쁨”에도 안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루인은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이런 미덕을 가지기 시작한 건, 어느 공간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는 걸 알고 나서다. 태어날 때 목성이 사자자리에 있어 잘 튀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다른 사람들이 인지한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물론 가능한 꿈이 아님도 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거리에서 혹은 다른 어느 공간에서 어땠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젠더/성별(양성)을 횡단하며 살기 시작한 이후와는 달리 그 이전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물론 몇 월 며칠 몇 시부터 뒤섞기 시작했다고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후의 반응에 몸이 묘한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이 쳐다보곤 한다. 그 사람의 젠더/성별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런 것이 아닐 때, 거리에서 사람들이 쳐다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연애의 맥락에서 그건 호감일까? 매력일까?(루인이? 꾸엑!) 그 쳐다봄의 의미가 복잡하게 다가왔다. 성별을 뒤섞는 행동을 즐거워하기에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그것에 혐오 혹은 공포로 쳐다본 것일까. 그래서 그날 블로그나 싸이에 “오늘 이상한 사람 봤어요”라고 쓸까.

종종 자격지심이란 말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이후 오프라인으로 알던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만 달라져도(살갑지 않아도, 침묵이 흘러도) 커밍아웃해서 그럴 거란 식으로 반응했다.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모든 순간에 이런 느낌을 가진다. 지나치게 친한 척 해도 무뚝뚝한 반응 혹은 침묵해도 커밍아웃해서 그럴 거라고 느끼곤 한다. 실제의 이유와는 상관없이(하지만 정말 상관없을 수 있을까?). 최근 한 신문은 한 광고가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고 그 댓글엔 “흑인의 피해주의가 저런 개소리를 낳지”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ㅉㅉㅉㅉㅉㅉ”로 채웠다.(기사는 여기, 리플은 여기) 자격지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격지심은 자신의 몸이 어떤 습관과 사회적인 관습 속에서 위치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행동을 금기시 하는 문화/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느낌이다. 그것을 느낀 적 없는 이들은 그런 금기가 없다고 여기겠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젠더/성별을 뒤섞은 후 사람들이 루인을 쳐다보곤 하는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호감? 공포? 혐오? 친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쳐다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복잡함. 이 복잡한 감정은 낮엔 덜하지만 밤엔 공포로 작용하는데, 그래서 한 트랜스”남성”의 얘기를 읽으며 엄청 공감했다: 흔히 “여성”들은 늦은 밤 골목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면 서둘러 밝은 곳으로 뛰어가지만 트랜스”남성”인 자신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면 더 어두운 곳으로 숨는다고 했다. 트랜스임이 들킬까봐, 그 혐오/공포 범죄에 해를 입을까봐. [헨리 루빈, “(성전환자)남성처럼 글 읽기”]

사람들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고 그것에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단골가게 주인은 루인이 젠더/성별을 뒤섞는 행동이 좀더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후 “괴물”이라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어떤 주인과는 서먹함을 느끼고 있다. 그전까진 그런대로 밝은 표정으로 맞아 주다가 이후론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편이다. 그러며 몸 아래위를 훑어본다. 루인의 “잘못된” 느낌일까? 튀는 행동도 정도껏이라서 일정 선을 넘어서면 그건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다. 물론 이런 “튀는 행동” 때문에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행동과는 달리 성별을 뒤섞는 행동은 아주 쉽게 비난이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커밍아웃의 정치학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분명, 커밍아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이후의 경험들까지 마냥 즐겁지는 않다(물론 루인에겐 이런 경험들이 쾌락이긴 하다). 이 복잡한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글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내용에 포함하기엔 애매해서..
[#M_ 논문의 일부엔 각주를 통해 |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
그래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한 “여성”은 언제나 “남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간주한다. 그 사람이 ‘레즈비언’인지 트랜스“여성”인지 연애에 무관심한 사람인지 무성애자인지 알 수 없지만 젠더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땐 언제나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냈고 “여성”이 불쾌함을 느꼈을 때, 기존의 해석은 “남성”시선의 권력, 폭력과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환원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남성”이 부치라면? ‘레즈비언’이라면? ftm이라면? 드랙킹이라면? 기존의 설명은 ‘이성애’-젠더구조를 당연시하며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고 젠더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여성”의 불쾌함이 자신의 트랜스“남성” ‘정체성’이 들킨 것으로 생각하고 불쾌가 아니라 혐오범죄를 두려워한 것일 가능성 역시 배제한다. 이 말은 시스-‘이성애’“여성”의 불쾌/성폭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단순화하며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예외적인 특수로 가정한다는 점(퀴어나 ‘동성애’자나 트랜스는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 멀리에 있다”는 인식)이 문제란 의미다._M#]

사건이 아니라 기사가 더 화난다

문제의 기사는 “보호기관까지 찾아가서 추행… 인면수심에 망가진 ‘가출 소녀’

우연히 거슬리는 제목이 들어왔다. “망가진”? 무엇이 “망가”졌다는 의미일까?

이 기사를 읽으며 화가 나기 시작한 건, 그 L의 폭력보다도 기사를 쓰는 기자의 언어와 해석 때문이었다.

* 그러나 K양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출을 했으며 지난 수개월간 서울과 인천, 부천 등 경기지역 PC방과 여관을 전전하며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것은 물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만 것으로 드러났다.

“씻을 수 없는 상처”에서 기자가 말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는 무엇일까? “망가진” 것과 “씻을 수 없는 상처”란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너무도 자명하다. 성. “여성”의 “정조”? “순결”? 결국 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폭력이 발생한 성별/젠더, 계급, 나이주의 등의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모두 지우고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동시에 그것은 “순결” 혹은 “정조”가 “망가”졌기에 생긴 “씻을 수 없는 상처”란 의미다.

하지만 “순결”이나 “정조”의 의미는 누가 요구하는 것일까. 그것을 그렇게까지 중요시 하고 강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성애’-젠더구조에서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야 한다는, “여성”은 “남성”을 “거치지 않은 순결한 존재”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의미들 아냐? (그렇기에 아래 인용한 내용에서처럼 “죄의식”을 요구한다. 도대체 K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그리하여 “씻을 수 없는”이란 말은 마치 성폭력 사건은 (피)해경험자에게 영원한 낙인을 찍는 그래서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그 어떤 행동보다도 가출과 성폭력(피)해경험이 우선함을 의미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웃어선 안 되고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야 하는 “투명한 피해자”로 본다는 의미다. K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상관없이 이미 K의 일생은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 특히 더 큰 문제는 K양이 아무런 능력이 없고 판단력도 미흡한 상태에서 아무런 죄의식이나 거부감 없이 험난한 세파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내용은 더 짜증나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면 아무 것도 판단할 수 없는 나이야? 사실 이런 인식이 아동성폭력을 더욱더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게 하는데, 그건 아동을 순진하고 순수한 존재로, 무기력한 피해자로만 그리기 때문이다. 아동성폭력 사건마다 차이는 있지만, 상당수가 아동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존재”라는 이유로 발생한다. (세대 간의 사랑과는 구분할 것.)

아동을 이렇게 그리고 싶은 기자의 환상은 알겠지만 7살의 어린이도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한다. 어린이는 “잘 모르고 판단력이 없다”는 말은 아동기의 발명했기에 성립 가능한 언어들이다. 나이주의가 강력한 통제수단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일테면 20대 후반엔 결혼을 해서 30대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40대엔 안정적인 생활과 … 등등의 환상들로 인해 받는 각종 스트레스와 강박들) 10대들 역시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25살의 성인 “남성”과 동일한 권력과 위치를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협상하고 그런 협상을 통해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어린 조카나 동생 혹은 과외 하는 학생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모르는 것 아니다. 누구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설마 이 말을 “그러니 K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겠지?).

또한, 이런 인식은 “순진무구한” 어린이가 아닌 성인 성폭력(피)해경험자에겐 손쉽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게 한다.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너도 즐긴 것 아니냐”란 말이 쉽게 나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인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기에, 성폭력(피)해경험자일 수 없다는 인식,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경험자가 사건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몬다.

*이혼한 아빠와 병든 할머니, 언니와 함께 생활해 온 K양이 밝힌 가출 배경은 단지 ‘집이 싫어서’다.

하지만 한창 사랑받고 행복해야 할 나이에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궁핍한 생활이 소녀를 밖으로 내몰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더 많은 부아가 치밀었는데, 철저하게 ‘이성애'”정상”가족의 강박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결국 “정상”가족이 아니었기에 문제라는 인식, 문제의 책임을 사회적 맥락이 아닌 한 가족에게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가족이 아니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상”가족이 아니면 문제가 있을 거라는 주변의 인식, 의심, 혐의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엄마” 혹은 “아빠”가 없어서, 이혼가정이라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은 문제가 있을 거라고 끊임없이 말하고 그렇게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따지고 보면 “정상”가족이라고 문제가 없느냐고. 아동폭력, 아내폭력, 가정폭력 등등 상당수가 “정상”가족에서 일어나는 일 아냐? 이런 말을 통해 “정상”가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환상과 허구를 만든다는 점에서 이런 인식은 더 위험하다. 그래서 이런 리플
을 가능하게 하고 폭력피해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가정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아빠”가 아무리 폭력을 휘둘러도 ‘이성애'”정상”가족은 화목하고 단란하다는 환상이 가장 빠를 수 있는 해결방법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미 심신이 쇠약해진 그의 망가진 삶을 되살리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몫으로 남게 됐다.

가장 무책임하게 내뱉는 마무리인 이 구절은 앞서 한 비판을 종합하고 있는데, 사회엔 아무런 책임이 없어? 가출했다고 하면 무조건 나쁘게만 바라보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들-루인을 비롯해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이 기사를 읽은 사람, 이 소식을 들은 사람 혹은 접하지 못한 사람들까지)의 태도, 이혼가정은 “문제”(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는 태도들이 뒤섞여 있고, 성별, 나이주의, 계급 등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데, 마치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사건이 발생하고 지속하고 방치할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핵심이다. 루인에게 이 기사는 가해자 L 만큼이나 폭력적이고 “인면수심”이다.

“인면수심”이란 말도 문제가 많은데 “인면수심”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인면수심”이란 표현은 L에게만 문제가 있다는 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가해자의 폭력동기를 권력관계가 아닌 알코올중독이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 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L의 폭력은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가능한, 인간이라서 가능한 폭력이지 “인면수심”이라서가 아니다. (“인면수심”이라니. 이건 순전히 인간이기주의, 인간우월주의의 표현일 뿐이다. 사실 그래서 더 화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