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젠더를 뒤섞은 후: 자격지심

오프라인에서 루인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애칭의 하나로 붙여준 것 중에, 유령 혹은 투명인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루인이 있는 줄 아는데 혼자서 아무도 자길 못 볼 거란 착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길에서 루인은 안 보고 다니고 안 듣고 다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건 지지(mp3p)와 놀고 시력이 “나쁨”에도 안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루인은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이런 미덕을 가지기 시작한 건, 어느 공간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는 걸 알고 나서다. 태어날 때 목성이 사자자리에 있어 잘 튀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다른 사람들이 인지한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물론 가능한 꿈이 아님도 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거리에서 혹은 다른 어느 공간에서 어땠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젠더/성별(양성)을 횡단하며 살기 시작한 이후와는 달리 그 이전엔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물론 몇 월 며칠 몇 시부터 뒤섞기 시작했다고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후의 반응에 몸이 묘한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이 쳐다보곤 한다. 그 사람의 젠더/성별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런 것이 아닐 때, 거리에서 사람들이 쳐다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연애의 맥락에서 그건 호감일까? 매력일까?(루인이? 꾸엑!) 그 쳐다봄의 의미가 복잡하게 다가왔다. 성별을 뒤섞는 행동을 즐거워하기에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그것에 혐오 혹은 공포로 쳐다본 것일까. 그래서 그날 블로그나 싸이에 “오늘 이상한 사람 봤어요”라고 쓸까.

종종 자격지심이란 말을 떠올린다.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이후 오프라인으로 알던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만 달라져도(살갑지 않아도, 침묵이 흘러도) 커밍아웃해서 그럴 거란 식으로 반응했다.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모든 순간에 이런 느낌을 가진다. 지나치게 친한 척 해도 무뚝뚝한 반응 혹은 침묵해도 커밍아웃해서 그럴 거라고 느끼곤 한다. 실제의 이유와는 상관없이(하지만 정말 상관없을 수 있을까?). 최근 한 신문은 한 광고가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고 그 댓글엔 “흑인의 피해주의가 저런 개소리를 낳지”란 제목으로 그 내용을 “ㅉㅉㅉㅉㅉㅉ”로 채웠다.(기사는 여기, 리플은 여기) 자격지심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격지심은 자신의 몸이 어떤 습관과 사회적인 관습 속에서 위치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행동을 금기시 하는 문화/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느낌이다. 그것을 느낀 적 없는 이들은 그런 금기가 없다고 여기겠지만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전혀 다른 공간이다. 젠더/성별을 뒤섞은 후 사람들이 루인을 쳐다보곤 하는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호감? 공포? 혐오? 친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쳐다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복잡함. 이 복잡한 감정은 낮엔 덜하지만 밤엔 공포로 작용하는데, 그래서 한 트랜스”남성”의 얘기를 읽으며 엄청 공감했다: 흔히 “여성”들은 늦은 밤 골목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면 서둘러 밝은 곳으로 뛰어가지만 트랜스”남성”인 자신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면 더 어두운 곳으로 숨는다고 했다. 트랜스임이 들킬까봐, 그 혐오/공포 범죄에 해를 입을까봐. [헨리 루빈, “(성전환자)남성처럼 글 읽기”]

사람들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고 그것에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단골가게 주인은 루인이 젠더/성별을 뒤섞는 행동이 좀더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후 “괴물”이라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고 어떤 주인과는 서먹함을 느끼고 있다. 그전까진 그런대로 밝은 표정으로 맞아 주다가 이후론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는 편이다. 그러며 몸 아래위를 훑어본다. 루인의 “잘못된” 느낌일까? 튀는 행동도 정도껏이라서 일정 선을 넘어서면 그건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다. 물론 이런 “튀는 행동” 때문에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행동과는 달리 성별을 뒤섞는 행동은 아주 쉽게 비난이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커밍아웃의 정치학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분명, 커밍아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이후의 경험들까지 마냥 즐겁지는 않다(물론 루인에겐 이런 경험들이 쾌락이긴 하다). 이 복잡한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글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내용에 포함하기엔 애매해서..
[#M_ 논문의 일부엔 각주를 통해 |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
그래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화장을 한 “여성”은 언제나 “남성”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라고 간주한다. 그 사람이 ‘레즈비언’인지 트랜스“여성”인지 연애에 무관심한 사람인지 무성애자인지 알 수 없지만 젠더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땐 언제나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해석한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끈적한 시선”을 보냈고 “여성”이 불쾌함을 느꼈을 때, 기존의 해석은 “남성”시선의 권력, 폭력과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환원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남성”이 부치라면? ‘레즈비언’이라면? ftm이라면? 드랙킹이라면? 기존의 설명은 ‘이성애’-젠더구조를 당연시하며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고 젠더와 아무런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여성”의 불쾌함이 자신의 트랜스“남성” ‘정체성’이 들킨 것으로 생각하고 불쾌가 아니라 혐오범죄를 두려워한 것일 가능성 역시 배제한다. 이 말은 시스-‘이성애’“여성”의 불쾌/성폭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정치학이 작동하고 있음에도 단순화하며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예외적인 특수로 가정한다는 점(퀴어나 ‘동성애’자나 트랜스는 “여기가 아닌 저기 어딘가 멀리에 있다”는 인식)이 문제란 의미다.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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