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여이연 트랜스젠더 강좌

많이 기다렸고 아쉬움이 남는다.

작년 여름 처음으로 여이연 강좌를 들으러 갔을 때, 몇 개의 강좌를 선택하며, 가장 듣고 싶었던 강좌는 “페미니즘이론 2: 젠더gender“였다.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루인의 경험을 언어로 모색하며 당시 한창 관련 논의를 찾고 있던 와중에 이 강좌를 찾았으니 너무도 기뻤다. 하지만 사람 수가 적어 폐강했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며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차라리 잘 된 것일까.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 혼자서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지난 시간이었고 겪지 않은 일이기에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때 혼자서 시작한 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강좌를 들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때 강좌를 듣지 않았고 그래서 언어가 더욱 절실했기에 좀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두 개의 젠더 강좌를 들었다. 지난 6월 말에 있은, “성별 문제, 그 이후”와 이번에 들은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이번 강좌를 들으며 어쩌면 작년이 아니라 이번에 들은 것이 더 좋았음을 느꼈는데 그건 1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 이미 두 편의 논문을 쓴 상태란 점, 그리고 마냥 새로운 이야기만 들은 건 아니란 점이다. (그리고 그 논문들을 두 분 모두에게 드렸고 코멘트를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란 점은 정말 중요한 일!)

강좌를 듣는다는 건 아예 처음 듣는 걸 배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들으며 더욱더 자극 받는 즐거움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미미하나마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배울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두 개의 강좌가 그랬다. 특히 어제로 끝난 트랜스/젠더 강좌는 아쉬움으로 가득했는데 강좌 내용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다른 강좌들이 5일인데 반해 이 강좌는 3일이란 점 때문이다. 3일이란 아쉬움. 더 많이 듣고 싶고 하루라도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강좌를 들으며 도움이 되었다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에 자극을 받았다는 점이랄 수 있겠다. 강좌를 들었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알 수 있다고 하기 보다는 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자극을 받는 것이라고 느낀다. 지금까지 산만하게 알던 내용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앎들 사이에 좀더 수월하게 건널 수 있는 돌을 놓는 것이랄까. 물론 지금까지 모른다고 느꼈던 지점들을 배울 수도 있지만 루인의 경우엔 대체로 이런 편이다. 아예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하기 보다는 흩어진 상태로 몸에 있는 흔적들을 모아서 엮어가는 자극을 받는 것. 이번 강좌는 그런 자극 이상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실,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빨리 말할 수 있는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오랜 시간 몸에 남아 자극으로 변한다는 점,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폭풍우 치는 밤에: 퀴어와 채식이 겹치는 순간

어제 잠깐 [Run To 루인]에 들어와 댓글을 확인하다 수인님께서 [폭풍우 치는 밤에]가 채식과 관련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즐기고 싶은 자극이 온 몸에 돌았다. 사실 예전부터 볼까 갈등했었다. 일본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 그러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귀찮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둠의 경로를 뒤적이니 아슬아슬하게 받을 수 있었다. (비디오가 없는 상황에서 확인하지 않고 디비디타이틀을 살 수는 없으니까.) 처음엔 끝까지 볼 계획은 아니었다. 요즘 자꾸만 늦게 자는 상황으로 피로했고 눈이 조금 아팠기 때문. 여이연 강좌도 있어서 오전을 조금만 어영부영 보내도 혼자 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다 즐겨야지 보다는 그냥 앞부분만 조금 즐겨야지, 정도였다. 물론 다 즐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낄 수 있다란 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즐기며, 채식 혹은 음식의 정치와 이반/퀴어queer를 동시에 느꼈다. [웰컴 투 동막골]이 채식과 민족주의, 군사주의를 동시에 그리고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채식과 퀴어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셈.

루인은 염소인 메이보다 늑대인 가브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꼈는데, 더 많은 갈등 속에 있는 캐릭터고 자신의 권력을 더 많이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메이는 자신의 채식이 식물에 대한 폭력임을 별로 성찰하지 않지만 가브는 자신의 육식이 메이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를 계속해서 고민한다. 염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친구가 염소인 상황. 힘의 논리에서 강자와 약자로 나누자면 가브가 강자일 수 있지만 더 많은 갈등과 성찰은 가브의 몫이다(이 부분이 흥미롭기도 하다). 이런 갈등은 둘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잘 나오는데, 메이가 잠든 사이 가브는 몰래 들쥐 두 마리를 잡아먹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메이는 불쾌함을 표한다. 자신은 어쨌든 싫다고.

이 부분은 사실 가장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염소의 채식이, 늑대의 육식이 타고난 것일 때, 그렇다면 염소와 늑대가 서로 불편하지 않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마주치고 어려운 문제다. 비슷한 채식주의자들이 아니면 같이 밥 먹으러 가길 꺼려하듯, 육식 혹은 음식을 정치학이 아닌 취향으로 간주하는 이들과 겪는 고민 혹은 갈등이 이 장면에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밤에]는 이 이상의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죽을 테니 너라도 살아라는 식의 빤한 부분이 있어서 슬프지만 식상함을 느꼈달까. 흐흐.

이 애니메이션의 짜릿함은 우정으로 포장한 이 둘의 관계가 퀴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채식 혹은 음식과 겹치면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오직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처럼 여기는 염소와 늑대의 우정이 결국 집단을 떠나 도망을 선택할 때, 이 버디무비는 ‘이성애’ 사회에서 결코 사랑할 수 없기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퀴어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으로 다가왔다. 우정과 애정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는 점에서, 특히 메이와 가브의 관계는 그 경계에서 짜릿함을 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가브와 메이가 눈 덮인 산에 올라 지쳐 죽어가기 직전의 한 장면: 가브는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고 메이는 자신을 잡아먹고 살아 남으라하고 가브는 자신이 늑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가브를 트랜스로 느꼈다. 자신의 몸에 별다른 불편함을 안 느끼지만 주변의 여건이 자신의 느낌을 갈등과 정신병으로 만들 때, 수술을 선택하기도 하는 트랜스들과 늑대라는 이유로 염소와의 우정/애정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육식의 허기로 고통스러워 자신이 늑대로 태어났음을 원망하는 가브가 겹치며 다가왔다.

뭐, 결론은 뻔하다. 예상할 수 있는 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꽤나 흥미롭고 재밌게 다가온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수인님 고마워요^^)

성명서 없음의 섭섭함?

세 권의 주간지를 샀었다. 매주 사고 있는 씨네21. 작년 말부터 정희진 선생님이 글을 쓰고 있어서 3주에 한 번 사다가 날짜 계산하기 귀찮아서 매주 사고 있다. 정희진 선생님 글이 있는 호가 아니면 만화 정도만 열심히 읽는 달까. 그런데 이번 호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란 칼럼에 실린 글의 주제가 대법원의 법적성별정정 관련한 내용이었다. 한겨레21도 샀다. 기사에 이번 성전환자의 법적성별정정과 관련한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간한국도 샀다. 일전에 적었듯 특집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매체마다 대법원의 성별정정 관련 판결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루인 좀 다른 바람이 있었다. 대법원 판결이 나고 여러 날이 지나서일까, 여성단체 혹은 페미니즘운동단체 몇 곳을 돌아다녔지만(한국의 모든 단체를 다 돌아다니기엔 귀찮아서;;;) 이와 관련한 성명서를 안 내고 있다는 점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제목처럼 섭섭함일까? ‘동성애’ 관련 단체를 돌아다녀도 비슷했다. 친구사이 정도만 환영성명서를 냈을 뿐이다. LGBT를 내걸고 있는 단체들 역시 관련 글은 안 보인다.

사실 이건 루인이 이들의 접점에 위치하기에 생기는 감정일 테다. 오직 트랜스에만 관심이 있다면 달랐겠지? 하지만 오직 트랜스로만 위치할 수 있을까?

여성단체 혹은 페미니즘운동단체에서 관련 논평이 없다는 점은, 사실 ‘동성애’단체에서 없는 것보다 더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기대를 했던 것일까? 페미니즘이 전제하는 “여성”이 사실은 생물학적 “여성”(생물학적이란 표현 자체도 문제고 이런 구분도 문제지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건 지금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빈약함으로 이런 이상한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어서다)이지만, 그렇다면 ftm들의 상황은 관련 있는 것 아냐? 사회문화적인 “여성”이라면 mtf들 역시 관련 있는 것 아냐? 어느 쪽으로든 이번 법원 결정은 여성단체나 페미니즘운동단체와 관련 있는 사항임에도 침묵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관심을 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은 복잡하다. “모든 여성”이라고 말하면서도 언제나 특정 “여성”만을 말하는 방식에 불편함을 느낀다. “여성”은, 젠더/성별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면서도 생물학적 결정론을 동시에 주장하는 모순은 “운동전략”일지는 몰라도 그 전략으로 트랜스나 이반/퀴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들은 배제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많은 논쟁거리를 던짐에도 불구하고 이 침묵은 “여성”과는 상관없다는 의미를 함의하는 것일까?

‘동성애’ 혹은 이반단체의 대체적인 침묵도 마찬가지다. 모든 트랜스가 이반이나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크로스드레서/이성복장착용자의 상당수가 ‘이성애’자 이지만, 루인은 LGBT(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만 말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LGBT를 내거는 단체에서도 대체로 침묵하고 있다. 트랜스”여성”‘레즈비언'(혹은 ‘게이’나 ‘양성애’, S/M 등)이나 트랜스”남성”‘레즈비언'(혹은 ‘게이’나 ‘양성애’, S/M 등)은 배제한다는 의미일까.

그러니까, 배제하고 있다고 확언하거나 관심 없다고 단정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왜 침묵하고 있는지 혹은 관련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침묵에 섭섭함이라고 단순히 말할 순 없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