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나]: 기득권자와 저항자의 ‘폭력’, 그 간극

2006.04.05. 20시 25분. 아트레온. [시리아나]
※스포일러 없을 듯.

새 학기를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등록금인상과 관련한 총학의 대자보와 현수막을 접했다. 대학원에 입학하며 등록금 및 입학금 때문에 포기할까를 고민했던 루인이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몇 명이 단식을 시작했다는 자보를 접하고 아픔을 느꼈다. 결국 이렇게 투쟁으로 가는가. 이제 남은 방식은 이 뿐인가.

단식을 한다는 대자보를 접한 며칠 후, 이른바 “대학생들을 위한” 매체에서 관련 기사를 실었다(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학기 초만 해도 ‘평화’롭고 즐겁게 가더니 결국 단식이나 삭발 등으로 “과격”하게 투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를 접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과격”하다고? 이 신문은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학생을 위한” 매체란 표제아래 총장으로 상징하는 교직원들을 위한 신문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과격”하다니, 누구의 입장에서 “과격”하다는 걸까. 모든 저항은 기득권자와 그 기득권이 다수의 권력/권리이며 사회를 안정화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과격”하다. 모든 저항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일전에 상대방의 ‘폭력’에 기분이 나빠 며칠이 지나서야 불쾌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되었냐고? 루인이 사과해야 했다. 상대방은 기분 나쁘면 진즉에 자신에게만 조용히 말하지 왜 블로그와 같은 “공론”의 장에서 떠드느냐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기분 더러웠지만 결국 루인이 사과했다.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와 함께 누구에게 문제제기를 할 것이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피해경험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가해자는 명예훼손이니 인권침해니, 역고소니 하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호들갑을 떤다. 분명 발화해야할 문제이지만 때론 이렇게 피해경험자를 가해자로 취급하는 일이 발생한다. 권력의 불균형 상황, 기득권자에게 도전하는 저항자의 모든 행위는 “과격”하기 마련이며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에게 항의/저항하는 건 언제든 피해경험자, 저항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된다. (“넌 왜 그렇게 과격하니?”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지.”)

하지만 기존의 언어 내에서 기득권자와 주류 이데올로기를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하기는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쿨하지 못하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라”와 같은 언설들 속에서, 기존의 언어로 저항하기란 결국 기득권자의 “배려”와 “관용”을 ‘구걸’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저항자, 피해경험자들이 가지는 죄책감은 (“좀더 ‘평화’롭게 할 수는 없는 걸까”, “왜 이렇게 과격한 걸까”) 기득권자, 가해자들의 권력/위치와 동일시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왜 그렇게 과격하냐”란 말은 권력과시/자랑일 뿐 반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시리아나]를 즐기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4마일”, “2마일”이라고 말하고 나서 나오는 장면에선 순간적으로 쇼크를 받았고 의자에서 뛰어올랐다. 누군가는 잔해도 없이 죽고 누군가는 악수를 하며 축하한다. 작은 보트를 타고 유조선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에선 눈을 감았다. 다행히 곧바로 장면이 전환했지만, 너무 아팠다. 누가 ‘더’ 폭력적인가. 영화를 통해선 미국이 ‘더’ 폭력적이라고 말하기 쉽지만 살아가는 일상에선 어떨까.

기득권자, 가해자는 치고 점령하지만 저항자, 피해 경험자는 치고 빠진다는 리영희씨의 말이 떠올랐다. 치고 빠지는 전략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 상태에서 각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저항자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이렇게 “과격”할 수밖에 없다.

올 초였던가, 한 신부가 농민투쟁이 “과격”해지는 건 언론 탓이 크다는 발언을 해서 각종 언론에서 보도했던 적이 있다. 루인은 이 신부의 지적에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기득권자(대다수의 언론을 포함)들이 정해준 선에서 투쟁/저항을 하면 무시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면 “과격한 농민투쟁”이란 식의 제목으로 언론에 실린다. “무력투쟁”이니 “과격하다”느니 하면서 온갖 소란과 호들갑은 다 떤다. 어떤 과정이든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묵살되지만 적어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그냥 앉아 고분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낼 수는 있다는 점에서 “과격”할 수밖에 없다.

농민 투쟁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다. 어느 집단인지 밝히면 탈맥락적으로 인용하면서 왜곡할 가능성이 크기에 밝히진 않지만 루인이 지지하는 집단에선, 한 ‘이성애’자가 이반queer 관련 얘기를 꺼내자 다른 한 ‘이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듯이 들렸다며 불편함을 토로하고 이반/트랜스 관련 얘기를 하기 싫다는 감정이 일정 사람들에게 공명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하리수와 같은 트랜스의 출현은 단 한 명이라도, 언론에선 성정체성의 위기니 어쩌니 하며 호들갑이다. 말세라느니, 곧 신의 천벌이 있을 거라느니 하는 식의 언설은 코미디가 아니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이다. 10대 이반 관련해서 그나마 조금은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부분은 (‘이성애’) 성정체성 확립에 혼란을 주니 위험하다며 자퇴를 종용하는 분위기다. 저항자의 발화는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기득권자들에게 다가간다.

기득권자의 폭력과 저항자의 ‘폭력’은 그 내용과 의미가 다르다. 이를 동일시하는 행위는 위험할 뿐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루인에겐) 늦은 밤, [시리아나]를 접하며 이런 흔적들이 떠올랐다.

※사람 얼굴과 이름 기억을 잘 못하는 루인이기에 영화 초반엔 좀 헤맸다. 하지만 다시 접하기엔 힘들 것 같다.

사랑을 빙자한 폭력: 욕설을 하지 않는 이유

사랑이란 이름을 빙자한 폭력들이 있다. 일테면 (초, 중, 고등) 학교 선생들이 행사하는 “사랑의 매”라고 불리는 폭력과 가족이 그렇다. 중학생 이후, 루인에게 가족은 언제나 폭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기에 “가족주의를 지향 한다”는 말은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삼성의 광고 문구 중에 “또 하나의 가족”이란 말이 있는데, 꽤나 끔찍하게 다가온다. 적어도 루인에게 이 말은 역효과다.) 물론 루인의 이성애혈연가족이라고 24시간 내내 폭력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요즘은 영악해서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어제, 사무실에 있다가 루인은 왜 욕설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했던 대답이 욕설에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도 부끄러운(수줍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들은 욕설들에의 트라우마, 그것이 루인이 욕설을 하지 않게 했다. 작은 욕설이라도 들으면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는 경우에도 욕설은 효과적인 대응이 아니라고 몸앓는데, 그건 루인이 “쿨”하거나 성숙해서가 아니라 이런 경험 때문이다. 결국 이런 경험이 한편으론 자원이 된 셈이랄까. 화가 났을 때 욕설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언어를 찾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그건 폭력이에요”라는 말은 루인이 하는 가장 심한 ‘욕설’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 폭력이란 말은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이럴 땐 참 애매하다. 뼈가 부러질 때까지 구타가 있어야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과 공포 분위기 혹은 참을 수 없이 숨 막히는 분위기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권력을 이용해서 강제를 행사하는 것, 상처가 될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이라고 명명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그래서 루인도 늘 폭력적이다.

다른 해석들: 지식 독점의 위험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무지’가 공포/권력을 만든다. 알지 못할 때, 앎에의 접근이 제한되어서 누군가 말해주는 내용만을 믿어야 하는 무지의 상황에서 권력이 발생한다.

번역과 권력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제 그토록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작가/철학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 작가는 ‘유명’해서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하면 한 번은 듣고 지나가지만, 루인도 수업 시간을 통해 몇 번은 들었지만 글을 직접 읽은 적은 없었다. 오늘있는 수업 텍스트였기에 며칠 전부터 읽었을 따름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이 글 주제와 별로 상관없기도 하지만, “○○ 읽어봤다~!”하는 식의 무식을 떠벌리는 자랑이 될까봐. 그렇잖아도 무식한데 이런 식으로 무식을 과시하면, 흑;;;, 비참해진다.) 글을 읽으면서, 중얼거린 건, 자국어인 한국어 외에 다른 외국어를 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번역본만이 아니라 다른 번역본도 같이 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실감했다.

물론 작가는 프랑스 사람이고 프랑스어로 글을 썼기에 루인이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영역본 또한 번역자에 의한 번역/해석일 뿐이다. 프랑스어로 쓴 글을 영어로 번역했고 그 번역본을 읽으니 결국 중역하는 격. 하지만 프랑스어로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역시 한국어 번역을 다시 해석/번역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해석은 중역이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 안도했다. 지금의 시대가 오직 한국어 번역문만 접근할 수 있고, 그래서 번역자의 번역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식을 가진 자, 지식에의 접근권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가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고, 한국어로 번역한 텍스트를 읽다가 아무리 읽어도 비문 혹은 오역 같아도 문제제기가 불가능했겠지.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독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얘기하고 싶다. 일전에 이차텍스트에 대한 불신을 적은 적이 있는데 딱 이런 경우였다. 물론 한국어 번역자의 번역이 잘 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영어와 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루인의 수준에서도 영어로 읽는 게 편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닐까.

번역 자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래서 저자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번역은 반역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번역자의 입장/위치에 의해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이다)의 문제이며 이는 다른 자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글을 어떤 내용으로 알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약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한 명씩만 있다면 그 나라에서 생산하는 텍스트의 내용은 그 사람의 해석에 의해서만 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사람은 사실 상 절대적인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실제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이건 단순히 그 사람이 권력과 권위를 획득한다는 것 이상인데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차단하며 다른 해석을 애시 당초 발화할 수 없게 하고 다른 상상력을 통제하는 끔찍함이다. 의심할 수 없고 번역자의 해석을 믿을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끔찍함. (이런 끔찍함이 학제에선 너무도 비일비재하다는 거, 너무 끔찍하지 않아?)

너무도 매력적인 텍스트를 두 가지 번역본(영어와 한국어)으로 대조해서 읽으며 이런 몸앓이를 했다. 물론 그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다른 텍스트와 연결해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즐거움도 느꼈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