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어려운 걸까.

트랜스베스타잇transvestite이란 언어를 듣고 곧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트랜스베스타잇과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트랜스에게 성전환 수술은 기준이 아니며, 트랜스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수술 할 의사가 없는 경우도 많다. 트랜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그전까지 ‘이성애’자였다가 성전환 이후에도 ‘이성애’자인 경우도 있다. 일테면 ‘남성’일 땐 ‘여성’을 좋아하다가 트랜스’여성’일 땐 ‘남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성전환 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성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다. 레즈비언 ‘남성’도 있고 게이 ‘여성’도 있다.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모두가 ‘여성’인 것은 아니며 게이라고 해서 모두가 ‘남성’인 것은 아니다. (아, 물론 게이란 말이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선 ‘동성애’자 모두를 지칭하기도 한다만 이건 여전히 ‘남성’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혐의를 피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렵다고 좀 쉽게 말하라는 반응을 접하곤 한다.

일전에도 적었듯이 한국어를 익혀서 동화책 정도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욕망한다. 떡 하나 안 줘서 잡아먹고, 빨간 모자 보다 일찍 가서 할머니를 산채로 삼키고, 푸른 수염 몰래 방문을 여니 해골이 가득하고. 동화가 이른바 “청소년 권장도서”보다 더 잔혹하기도 하고, 숨기고 싶은 삶의 측면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동화를 읽고 자랐는데, “청소년 권장도서”니 “세계 명작”이니 하는 소설들엔 이른바 “삶의 추악한 면”이라고 불리는 일을 겪고 충격 받았다는 식의 장면이 나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동화에서 “세계명작”을 읽을 나이가 되는 순간 동화에서 읽은 내용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얘기야? 그러니 동화를 읽을 수 있는 정도란 건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이 불가능한 꿈이란 것도 안다. 루인이 쓰는 어떤 언어들은 동화책에서부터 배제되어 때로 죽을 때까지 접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언어이기 때문이다. 혹은 희화화해서 나타나는, 조롱거리로 잊혀지는 장면이거나. 하지만 이런 언어를 알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용이 배배꼬여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언어 혹은 단어만 낯설 뿐이라면 그때부터는 발화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태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트랜스젠더니 크로스드레서니 하는 언어들을 현학적인 용어 남발로 느끼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절실한 언어이다. 트랜스라는 언어를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니 “형이상학”이니 하는 언어와 비슷하게 간주하며 왜 그렇게 어려운 말을 남발하느냐고 말하는 건, 트랜스들의 삶은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개념놀이란 의미이다. (일전에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관계와 관련한 한 강좌에서 강사는 한참을 설명하고선 말을 마치며, 결국은 머리 속에서 가지고 노는 개념놀이죠, 라고 말해서 당황했었다. 강사에겐 이 언어들의 관계가 개념놀이에 불과하겠지만 루인에겐 루인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절실함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좀더 쉬운 말로 쉽게 설명하라는 요구는, 귀에 거슬리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성찰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아부하는 언어로 말하라는 태도로 다가온다.

[#M_ +.. | -.. | 트랜스베스타잇과 크로스드레서는 둘 다 이성복장착용자로 번역할 수 있다. 트랜스베스타잇은 이성의 복장을 통해 강한 성적 흥분과 성적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하는 사람이라면 크로스드레서는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보다는 트랜스베스타잇이 용어의 태생부터 의료담론에서 병리화하기 위해 만든 언어라면 크로스드레서는 이런 “정신병”/“신경증” 취급하는 의료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언어라는 점이 더 정확한 구분일 것이다._M#]

“성 선호 장애자”…?

책을 읽다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읽었다. “성 선호 장애자”라는. 얼핏 무슨 내용인가 갸웃거리다가, “동성애자 등”이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아하,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성 선호 장애자”란 말은 국방부에서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에 대한 예방책이랍시고 내놓은, ‘남성’ ‘동성애’자의 군 입대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의 가해자든 피해 경험자든 어느 쪽이든 자신을 동성애자로 칭하기는 죽기만큼이나 싫어한다지만 국방부에선 동성애 때문에 이런 일이 터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계급에 의한 권력 관계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가 원인이라는 동성애혐오증이다.

이런 짜증과는 별개로 “성 선호 장애자”란 말을 읽고는 국방부가 ‘장애’라는 명명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느꼈다. 모른다고 잡아떼도 상관없다. 영악하게 알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누군가의 글을 비판하면서 “이 글에선 동성애에 관해 다루지 않았으니 동성애혐오야”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은 그렇지 않다거나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를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글을 둘러싼 이반queer/트랜스와 관련한 토론의 가능성도 차단한다.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불리는 “정상성”의 기준은 “나”에게 있지 않고 타자에게 있다. “내가 정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는 도착증 환자야”라던가, “쟤는 장애인이야”라는 말을 통해 그렇지 않은 자신은 “정상”이라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만들어 낸, “성 선호 장애자”란 표현을 읽으며 국방부의 이런 불안을 느꼈다. 어떻게든 기존의 군대제도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이성애/젠더) 성적 지향성을 정상화하기 이해선 타인을 비정상화해야 한다.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을 군대 제도의 위계권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기존의 계급에 의한 군대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을 계급제도에 의한 것이라고 지명한다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산다”는 군대제도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동성애’, 트랜스 등에 의한 문제로, 이들만 통제하면 군대 내 남성 간 성폭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반, 트랜스들을 “장애자”로 명명함으로써 문제의 초점을 돌리면서 동시에 자신들은 “정상”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하긴,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줘서 아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