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느낌: 단순한게 좋아

홈페이지 등 인터넷 사이트는 첫 0.05초에 판단을 한다는 기사를 며칠 전 접했다. (며칠 전 읽은 포털 사이트의 메인 기사라고 기억하는데 열흘도 더 된 기사다. 어떻게 된 거지? ;;;) 기사 내용을 읽으며 두 가지를 떠올렸다. 하나는 루인의 블로그, [Run To 루인]이고 다른 하나는 알바를 하는 곳의 홈페이지.

기본적으로 단순한 걸 선호하고 지향하기에 뭔가 복잡하고 이미지가 많은 디자인은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블로그든 홈페이지든 이미지가 많고 뭔가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으면 다시 가기를 꺼린다. 그곳이 어지간히 괜찮은 내용이지 않은 이상. 그래서 인터넷을 시작한 초기에 만든 아이디 중엔 simple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을 선호한다고 하기 보다는 (루인의 입장에서)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이미지나 메뉴들이 있으면 피곤한 느낌을 받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블로거나 홈피 주인이 생산하는 내용들에 집중할 수 있는 디자인이면 족하지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과도하게 드러내려다 많은 이미지와 카테고리가 들어가 있으면 불편하고 산만하게 느낀다.

이미지가 많은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 중엔, 루인이 이미지(그림이나 사진 등) 난독증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든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알아차리기에 한참이 걸린다. 일테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표지를 보며 처음 느낀 건, 어두운 분위기구나, 정도였다. 그것이 해골에 꽃을 꽂고 있음을 알게 된 건, 한 달 가까이 지나, 우연히 신문기사의 설명을 읽고 나서였다. (여기서 “보다”의 문제가 발생한다.) 어릴 때부터 사진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했는데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봐야 별 감흥도 없고 그냥 루인이 찍혀 있으면 찍혀 있나보다 정도였다. 물론 이후, 한때 잠깐 디카를 사용하며 조금은 훈련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건 아니다. 사진을 볼 일이 있으면 보긴 하지만 느끼기까지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블로그 등 사이트(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의) 디자인은 단순한 걸 선호한다. 지금의 [Run To 루인] 스킨이 너무너무 좋은 것도 그래서이다. 글에 집중할 수 있기도 하지만 단순하면서 예쁘기 때문이다. (태터툴즈 1.0버전이 나왔다고 하는데 바꾸지 않고 있는 건 지금의 스킨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다.)

지금 알바를 하고 있는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가지 않는 이유도 디자인 영향이 크다. 첫 페이지에 너무 많은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는 역효과가 나타난 격이다. 지금에야 익숙하지만 처음엔 상당히 어려웠다. 난무하는 이미지들이라니.

그러고 보면 루인이 즐겨 찾는 블로그의 스킨/디자인은 한결같이 루인이 선호하는 모습이다. 하긴,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들어갔다가 스킨 때문에 글은 읽지도 않고 그냥 창을 닫은 적도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미지 없이 글자만 있어서 별로라는 사람도 있긴 하다만.

“소수자” 혹은 “약자”란 말의 불편함

어쨌거나 나름대로 유행인지, 정치적 약자나 소수자란 말을 자주 접한다. 소수자운동이라든가 성적 소수자에서부터 ‘여성’은 정치적 약자란 말까지. 자주 접하는 말들이지만 접할 때부터 이 말들은 참 불편하기만 하다. 소수자라니. 수적으로 적다는 말이냐!

물론 이렇게 말하면 소수자란 말은 수적으로 적다는 말이 아니라 기존의 권력에서 소수란 의미라는 대답을 듣는다. 아하, 그러하네요, 하고 주억거리지만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다.

소수자가 수적으로 적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하지만 언제나 소수자 운동을 얘기할 때면 빠지지 않는 내용이 ‘동성애’자는 그 사회에서 10~15%정도, ‘장애’인도 한 사회에서 10~15%정도를 차지한다는 말로 수적으로 적음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권력에서 소수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적으로 소수란 내용을 환기한다. 정치적 약자란 말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권력관계에서 약자란 의미이지만 미묘하게 그래서 약한 사람, 보호나 특별한 제도가 필요한 사람이란 뉘앙스를 함의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말 불편한 지점이다.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루인의 입장에서 소수자란 말이나 약자란 말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이다.

성적 소수자란 말은 성정체성/성적 지향성에 토대를 둔 “소수”란 의미이지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젠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성애’가 다수거나 어쨌든 규범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소수라고 규정하기 위해선 다수 혹은 어떤 기준/규범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이때의 규범 혹은 다수는 ‘이성애’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말 ‘이성애’가 다수일까. 알 수 없다. 만약 현재의 사회가 강제로 동성애를 정상화하는 사회였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도 전에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그렇다 아니다, 가 아니라 성정체성엔 사회의 강제적인 억압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또한 지금 가정한 어떤 구조에서도 양성애자나 S/M은 억압 받는다.)

그리하여 문제는 소수자 혹은 약자란 명명 속에 가려져 있는 권력, 즉 성적 소수나 ‘장애’란 기준은 누가 정하며 누가 허락 하는가 이다. ‘이성애’가 다수거나 규범이거나 정상이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이성애’를 질문하기 보다는 ‘동성애’자들의 “어려움”, 매트로섹슈얼이나 크로스섹슈얼이 대세라는 말하기로 ‘이성애’나 젠더의 ‘정상’성을 담보하거나 별로 도전하지 않는다. ‘장애’란 명명 역시 마찬가지인데 휠체어를 타야지만 ‘장애’라는 식의 인식을 통해 어디에도 없는 정상적인 몸을 상상하고 자신은 ‘정상’이라고 믿는다.

따지고 보면 정말 ‘소수’인 사람은 이반queer나 트랜스, 비서울지역 출신 사람들이 아니라 “서울대공화국”주의자들, (잠재적인) 예비역 병장들, (서울출신의) 서울지역중심주의자들이다. ‘진짜’ 소수는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소수자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들을 다수인 것처럼 착각하는 이유는 뭘까. 이런 소수 권력자들을 지지하고 이런 지지를 통해 자신에게도 권력이 있거나 자신은 ‘정상’이라는 착각으로 ‘안심’하고 사는 사람과 이런 환상에 도전하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중 약자라면 누가 약자일까. 이른바 “약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실상 협상력을 통해 (침묵하며) 생존하고 있거나 발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약자”일까.

그래서 소수자란 명명도 약자란 명명도 모두 불편하다. 누가 ‘여성’인지 누가 ‘남성’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구를 소수라고, 누구를 약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루인은 루인의 비’이성애’ 정체성 등, 이른바 타자성을 통해 종종 (특정 공간에 한정하지만)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기도 하는데 소수자/약자라니!

~적, ~스러운, ~다운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어느 수업시간엔가 옆에 앉아있던 짝이 뜬금없이 “~적(的)”이란 표현은 한자식 표기이고(일본식인가? 중요한건 아니다) “~스러운”이란 한글표현이 있다는 얘길 듣은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이 남아있는 이유는, 이후 가끔씩 “~적”이란 표현보다는 “~스러운”이란 표현이 더 매끄럽고 의미를 더 잘 나타낸다고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랑세미나를 하며 무슨 얘기를 하다가 “남성적인지 남성다운인지 남성스러운인지..”라는 말을 했었다. 이 말과 함께 한글2002인 HWP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적”이란 표현은 한자식 표기이고 “스러운”은 한국어표현이라는 얘길 하니, “스러운”은 부정적인 의미에 쓰고 “~다운”은 긍정적인 의미로 쓴다고 했다. 아하, 그렇구나, 했는데 갑자기 HWP의 한 장면(위 그림)이 떠올랐다. 예전부터 저 빨간 줄이 거슬렸다. “여성스러운, 여성다운, 남성다운”은 맞춤법에 틀리지 않지만 “남성스러운”은 맞춤법에 틀린다는 빨간 줄이 나온다.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하는 불쾌함, 불편함이 떠올랐다. (더 많은 얘길 덧붙이고 싶은데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순간적으로 “아!”하는 그 느낌보다 정확한 건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