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 영어공부,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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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bell hooks의 말 중에서:

성차별은 다른 모든 억압의 바탕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지배 관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Sexist oppression is of primary importance not because it is the basis oh all other oppression, but because it is the practice of domination most people experience, whether their role be that of discriminator or discriminated against, exploiter or exploited. -[Feminist Theory]

가부장제 지배를 종식시키는 페미니스트 투쟁은, 그것(가부장적 지배)이 다른 모든 억압 구조의 토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부딪히는 지배 형태이기 때문에 전 세계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대꾸]에서
Feminist struggle to end patriarchal domination should be of primary importance to women and men globally not because it is the foundation of all other oppressive structures but because it is that form of domination we are most likely to encounter in an ongoing way in everyday life. -[Talking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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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지만, 루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심지어 대학원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한 지금까지도 토플은커녕 토익 한 번 공부한 적이 없다(사실 지금도 토익과 토플이 헷갈린다). 영어 공부라면 치를 떠니 그럴 수밖에.

세대마다 다르고 계층, 지역마다 다르지만 루인이 처음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입학하기 전,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루인의 주변과 비교하면 무난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시작한 편이다. 하지만 학원이라면 너무도 싫어하니(학원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영어는 곧바로 가장 하기 싫은 공부 중 하나가 되었다. 억지로 학원까지 다니면서 배워야 한다는 건, 하고 싶을 때 까지는 아무리 시켜도 하지 않는 루인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을 뿐이었다. 영어 수업은 한 없이 지루한 시간이었고 영어 시험은 항상 틀린 개수 보다는 맞춘 개수를 세는 것이 더 빨랐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6년이 지났다.

그것으로 루인과 영어의 인연은 끝이었다. 아, 물론 대학교에서 교양영어를 듣긴 했지만 수업시간만 대충 때웠기에 공부라고 부르기 조차 민망할 지경.

더 이상 영어와 접할 일이 없어지자, 세상에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크크. 그 정도로 싫었다. 토익과 토플 열풍이 엄청났지만 가볍게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것이 아니라 루인의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여겼다. 새로 나온 컴퓨터 프로그램이니?

영어와 친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 페미니즘과 놀면서였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 확인하면 어김없이 영어였다. 처음엔, 누군가 번역하겠지 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무시에도 한계가 있고 그 정점에, 벨 훅스가 있었다. 벨 훅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쯤 영어랑 친해지고 싶었겠지.

[행복한 페미니즘]을 읽고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뭐, 당연하게도 없었다. 이때부터 영어와 친하게 지내야지 하는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인의 영어 실력은, …할 말 잃음…이 아니라 말 할 수 없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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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에서 단어를 15개 이상 찾으면 그 책은 자신에게 무리일 수도 있으니 좀더 쉬운 책을 찾아야 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억지로 하는 공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읽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면, 다르다. 모르는 단어가 30개가 넘어도 읽는다. 더디더라도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가는 기쁨이 크니까. 더구나 이럴 때의 영어는 취업이나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쾌락을 위한 것이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다짐은 영어와 놀면서 루인이 읽고 싶은 책을 읽겠다는 것이지 토익 점수 몇 점 받아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어라는 부담이 덜 했다. 놀이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당시 쓴 글들을 보면 너무도 부끄러운데, 글 속에 필요 이상의 많은 영어 단어들이 등장했다. “재현re-presentation”, “투사projection”하는 식으로 영어단어들이 글 속에 난무했다. 물론 이런 것이 의미를 정확하게 하거나 확장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점은 있다. 그럼에도 루인에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건 열등감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강제된 영어를 너무 못하다 보니 그것이 일종의 열등감이 되었고(영어에서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 공부 한다”고 알리고 싶어 했다.

이런 열등감은 굳이 영어가 아니어도 발생한다. 루인이 쓴 글 중에 뭔가 배배꼬인 느낌이 들면서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필히 루인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려고 애쓰다 나타난 열등감 때문이다. 물론 어렵다, 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가정은 안식처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경험한 사람에게 가정은 노동 공간이며 때로 폭력을 재생산 하는 공간이라는 말은 어려울 수 있다. 이건 세상을 해석하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이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을 배배꼬아서 아무도 모르게 만들고 그런 지식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글은 쉽게 써야하고 그래서 한글을 읽을 수 있고 문장 이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이때의 쉬움은 후자와 같지 않음이다. 전자에 의한 어려움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다. 루인의 열등감은 너무 자주 후자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글이 꼬여있다면 그건 루인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려고 안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열등감은 또한 루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 할 수 있게 한 ‘용기’도 이 열등감 덕분이다. 극복하려는 유인이 되니까.

[왕의 남자]에서 불편했던 점

조금씩 정리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완전히 정리하진 못하고 있다. 그런 불편한 지점들 중 하나.

종종 궁금한데, 공길이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왕의 남자]를 홍보하며 가장 많이 나온 얘기는 이준기의 “미모”였다. “트랜스젠더가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는 이준기의 말처럼, [왕의 남자]가 ‘동성애’를 담고 있는 영화라는 홍보가 있었을 때, 그 핵심엔 이준기의 “미모”였다. 하지만 루인이 접했던 ‘게이’영화 중에서 이준기처럼 “마르고 예쁜” 배우는 (거의) 없었다. 대체로 근육을 자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 생겼다”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말이 ‘게이’영화에 나오는 배우는 모두 이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외모지상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말하고 싶다.

홍석천이 커밍아웃(아웃팅과의 경계가 애매했다)했을 때의 반응과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페미니스트라도 예쁘면 OK”라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위협적인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보기 좋은가”의 여부이다. 트랜스젠더라는 “구역질 나는” 존재가 별 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리수의 외모가 “여자 보다 더 여자답게 예쁜 외모”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길 역에 이준기가 아니라 (요즘 반말로 욕을 먹고 있는) 최민수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지상렬(지상렬이 못생겼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있는 라디오에 나오고 있어서)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호의적인 반응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을까. [청연]을 두고 친일이라고 반응하며 불매운동이라도 펼치려는 마당에 [왕의 남자]에 “비윤리”적이고 청소년의 정서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동성애’가 등장하는데도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의 남자]에서 주목하려는 지점은 ‘동성애’가 아니라 “여자로 오해 받을 만큼 예쁜” 외모를 가진 공길을 욕망하는 연산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접한 몇 가지 반응 중에는 “표현 수위가 약해”서 뭔가 부족하다는 글과 “입맞춤 장면에서 토할 뻔 했다”고 표현한 글들이 있다. 둘 다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읽었다. 루인에겐 공길과 장생의 관계는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연산과 공길의 관계를 ‘동성애’관계로 부르는데 꺼리고 있다. 어떤 분은 “사랑했는데 남자”라는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들어 퀴어가 아니라 야오이라고도 했는데, 야오이를 접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럴 듯하기도 하다. 루인은 좀 다른 이유로 꺼리고 있다. 다만 그 지점을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표현 수위가 약하다는 것이 누구와의 관계에서 그렇다는 건지는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아마 연산과 공길의 관계가 그렇다고 여겨지는데 “패륜아” 연산 정도면 더 높은 수위의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는 걸까. 아니면 감정선을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아쉬웠다는 걸까. 하지만 “입맞춤 장면에 역겨웠다”는 반응처럼 더 ‘높은’ 수위로 18세 관람가였다면 그런 이유로 상당히 욕먹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감독이 참 영악(靈惡)하다고 느끼고 있다. ‘동성애’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욕먹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정도를 알고 딱 그 만큼만 표현하고 있으니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권력에 관한 영화라고 했는데, 그 말처럼 감독이 원하는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라는 “상품성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더 몸앓아야 할 부분들이다.

“본다”는 것의 다른 의미: 비정상을 통한 정상

루인이 흥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책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들이다. 여기서 ‘다른’은 ‘병리적인’과 동의어이며, 어떤 병에 걸린 사람들에 관한 과학과 인류학, 인문학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책들을 의미한다.

이런 삶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리적인 삶이 문제적이란 기술 보다는 그런 다른 생활이 창조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내용을 좋아한다. 뭐, 당연한 얘기;;;

루인의 삶이 병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닌데, 이는 종종 자신의 삶이 병리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특별함을 위한 훈장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루인의 삶은 병리적인 편이다.

예전에 스티비 원더가 10분 정도 밖에 “볼 수” 없어도 “개안”수술을 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이유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단 10분이나마 딸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언어는 비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구성된 경험이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 의하면 태어났을 때부터이든 사고를 통해서든, 시각’장애’인이 “개안” 수술을 했을 때, 시력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데는 최소한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리며, 경우에 따라선 우울증 등의 이유로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수술을 하고 붕대를 풀면, 금방 “볼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시력은 경험이 아닌 타고난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아기들에게 모빌 같은 것을 통해 시력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동공이 고정되거나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처럼 시력은 철저하게 훈련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력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시력경험을 잊은 사람이 붕대를 풀자 금방 상대를 알아본다는 설정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환상, 즉 거짓이다. 시각’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경험에 익숙한 사람들과는 다른 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시각을 사용하는 사람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지금의 세상이 시각에 기반 해서 구성되어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시각을 사용한다는 것도 문제적인 말인데 시력 차이, 색맹이나 색약이냐에 따라 다른 식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그것은 현재 사회가 설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식으로 색깔을 인식하기에 경험하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 루인은 아무 고민 없이 빨간 색 보다는 파란 색의 명도가 더 진하겠거니 했는데, 색맹의 입장에선 빨간색은 검은색의 명도와 별 차이가 없으며 파란색은 상당히 밝게 다가오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거의 흰색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루인은 루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명명했는데,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장애’라고 느끼지 않았거나 그렇게 명명해야겠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장애’를 “나”와는 상관없는 멀고 먼 남의 얘기로 여기며 타자화/특수화하는 폭력이다. 동시에 ‘장애’란 것이 얼마나 임의적인 것인가를 의미한다.)

정상/비정상이란 구분은 임의적인데 그것은 정상을 통해 비정상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을 발명함으로써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정상”이니까 “네가 비정상”이 아니라 “넌, 비정상이야”란 인식을 통해 “나의 정상성”을 획득한다. 누군가의 말에 대해 “그건 인종차별이야(동성애 혐오야)”란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보이게” 하거나, 적어도 그런 비판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상/비정상 담론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비록 올리버 색스의 책 속엔 때로 정상/비정상 담론의 틀로 기술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비정상을 발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폐증이 문제인지 자폐증을 문제로 여기는 세상이 문제인지, 책을 읽으면서 혼란을 느꼈다. (흔히 자폐증이란 말보단 자폐아란 말을 더 많이 쓰는데, 그럼 자폐증을 가진 성인은 어디로 갔다는 걸까?)

뭐, 이 책을 읽으며 대충 이런 얘기들을 중얼거린다. 사실,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들을 더 읽고 제대로 서평을 쓰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지금껏 쓰지 않고 있는, 항상 몸속에 가두고만 있던 언어들을, 이 책을 매개로 풀어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