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카테고리 이름을 바꾸며..

태터툴즈로 블로그를 만들며 카테고리를 “흑백으로 부르는 달의 노래”와 “삶~앎”, 두 가지로 했다. 둘 다 이전의 블로그에서 사용한 카테고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몸에 핀 달의 흔적”과 “몸을 타고 노는 감정들”로 바꿨다.

어느 순간부터 두 개의 카테고리가 있을 필요가 없다 싶었다. “삶~앎”은 삶과 구분할 수 없는 앎/앎과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의미했는데, 그렇다면 “흑백으로 부르는 달의 노래”에 쓴 글은 삶과 동떨어진 글일까? 이렇게 단순하게 제기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쓰다보면 카테고리를 구분하기 애매한 순간들이 많았다. “삶~앎”이라는 카테고리 이름의 문제였다. 이 구분은 무거웠고 불필요하게 “삶~앎”이 아닌 내용을 다른 식으로 구분 하는 폭력적인 잣대가 되었다.

그래서 아예 카테고리를 하나로 만들까도 했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둘로 나누면 그나마 찾기 쉽지 않을까 해서;;;

새로운 카테고리 이름은 결국 몸이다. “몸” 뒤에 붙은 수사들은 불필요한 장식일지도 모른다. [몸에 핀 달의 흔적]은 처음부터 계속 있었고 루인이 좋아하기에 달을 넣었다. [몸을 타고 노는 감정들]은 정말 동어반복이다. 몸이 곧 감정이고 감정이 곧 몸이니까.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면, 감정은 곧 정치다. 감정은 이성에 대립하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체화된 지식/이데올로기의 반응이며, 몸의 언어다.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는 언어와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은 즐거움/아픔(감정들)이다. 코미디를 통한 웃음은 정치적인 문제이지 인류 보편이 아니다. 또한 루인은 존재 자체가 정치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존재 자체가 정치적이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서의 “정치적”은 기존의 지배적인 경계/정상성과 갈등한다는 의미. 불편함, 불쾌함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민감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몸과 갈등하며 폭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카테고리 이름을 바꾸면서, 앞으로 어떻게 구분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기쁘다.

한겨레21의 지난 호 구함-_-;;

며칠 전 애드키드님의 블로그에서 한겨레21 관련 글을 보고 한 편으론 경악하고 한 편으론 뭔가 수긍하며 주억거렸다(한겨레에 뒤통수 맞은 것이 한 두 번이냐).

표지 그림을 본 순간, 루인이 떠올린 이미지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을 죄다 동원해서 말하면) 허름한 3류 극장에나 있을 법한, 직접 그린 영화 간판을 보는 느낌이랄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음침하고 왠지 뒷골목 으슥한 곳에 숨어서 일어날 것만 같은 이미지 혹은 그런 느낌. 동성연애가 무색하다고나 할까. 그 때문에 꽤나 불쾌했다. 비교를 하면, 2003년에 나온 버디 23호 역시 커버스토리가 청소년 동성애인데 버디의 표지와 한겨레의 표지는 극과 극을 달린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다르다. (여기에 링크할까도 했지만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경계를 타는 문제기에, 알아서 찾아보세요. 너무 찾기 쉬워요-_-;;)

그래서 그 표지가 그려져 있고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신음하고 있다”란 커버스토리가 실린 한겨레21 지난 호를 구하고 싶었으나 이미 이번 호로 바뀐 상태라 구하지 못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웹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기사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지면구성도 같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루인이 오프라인으로 아는 분 중에, 한겨레21 지난 호 가지고 계신 분 있나요? 다 보셨으면 빌려주세요, 혹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루인에게 넘기셔도 고맙고요. 밥이라도 살게요;;;

[#M_ 문제의 그림은(출처는 한겨레21 홈피에서) | 닫기.. |

_M#]

남성연대로 읽는 황우석 사태

이 글은 앞서 적은 두 편의 글,
황우석이란 불편함 혹은 황우석이란 성폭력“,
황우석 사태를 성폭력이란 관점으로 보는 이유
와 연결 되어 있어요.

어제 인터넷으로 화제만발의 황우석 관련 소식을 접하곤 관련 기사에 초 단위로 리플이 몇 백 개씩 증가하는 걸 봤다. 오호라. 정말 클릭 두 어 번 하는 사이에 리플이 300여개에서 900여개로 바뀌는데, 후훗. 정말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가 안 궁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지점 보다는 일전에 쓴 그런 흥미 때문에 현재의 줄기세포가 있다 없다, 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한 번도 황우석을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여긴 적이 없기에 리플을 보며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접하는 한국 과학계의 위상 추락이니 국가 신인도 추락이니, 국가 망신이니 하는 식의 리플들이다. 황우석을 한국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간주하고 이번 논문에 문제가 있으니 국가적 망신이라고 말하는 것과 일본군 성노예 ‘여성’을 “민족의 수치”라고 말하는 것, 국제 성구매 여행을 떠났다가 뉴스에 나거나 외국의 보호 동물을 정욕에 좋다는 이유로 잡아먹었다가 뉴스에 나는 걸 나라 망신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간극은 좁아도 너무 좁다. 아니, 좁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여성’인권침해/성폭력 문제이고 정욕에 좋다는 이유로 동물을 죽이는 것은 말 그대로 생명권 침해며 근대 합리적 인간상이 만들어낸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이지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몇몇의 행동에 의한 국가적 망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황우석의 이번 사태 또한 국가 망신이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유명” 과학자의 윤리적/도덕적 문제이지 그 한 명이 대한민국의 모든 과학자의 윤리를 대표하며 대한민국의 망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이 또 다른 민족주의로 읽힐까봐 겁난다-_-;;)

하지만 그것이 국가 망신으로 여겨지고 한국의 과학계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문제로 여기는 것, 그것에서 많은 부분을 읽는다.

간단하게는, 한국이 “제 3세계”이기 때문에 한국 과학자 한 명의 문제가 한국 전체의 문제로, “황우석=대한민국 과학계”로 보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국 “유수”의 저널에 논문을 실기가 더 까다롭게 되었다는 인식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테면 미국의 한 과학자가 비슷한 일을 했다고 그것이 미국의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새튼이 황우석 논문에 공동저자로 참여했고 그가 논문 조작에 일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 망신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황우석 한 명의 일로 국가 망신 운운, 국가 신인도 추락 운운하는 인식 자체가 이미 (내면화된) 제국주의/식민주의/오리엔탈리즘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과잉대표화를 불러일으킨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말은 멀리 있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리플을 보며 너무 쉽게 만나고 있다. 황우석을 국가 대표 과학자로 여기고 그래서 황우석의 문제를 국가 망신으로 간주하는 것, 황우석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며 MBC의 보도가 (황우석과 동일시 된) 자신의 명예를 손상한 것 마냥 반응하는 것 모두, 자아의 경계가 없는 과잉대표화이다. ‘남성’들이 회사에 취직해서 일 하는 것은 국가와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여성’들이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개인적 욕망이나 자아실현, 이기주의로 간주하는 것 역시 동일하다(‘여성’에게 “왜 취직을 하려고 하세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를 나타낸다). 이런 과잉대표화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을 민족의 수치 등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일전에도 쓴 적 있지만) 이번 사건의 작동기제는 민족주의나 과도한 애국심이 아니라 ‘남성’연대라고 몸앓는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정치는 민족주의도 맑스주의/사회주의도 아닌 ‘남성’연대이다(선생님 만세!). PD수첩과 MBC가 그렇게 몰매를 맞는 것은 그것이 국익에 배반하는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난자 매매라는 “윤리적인 측면”에 문제를 제기해서 남성연대를 위반했기 때문이다(좀더 정치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고통은 자아의 경계가 흔들릴 때 발생하고 폭력은 “나”와 타인을 분리해서 인식할 때 발생한다. 자아의 경계가 없어 내가 곧 한국(대표)이고 세계(대표)일 때 나의 인식을 공격하는 모든 것은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근대 주체로서의 “나”는 필연적으로 ‘남성’젠더로 재현된다.) 황우석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로 그렇게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라고 몸앓는다. (2002년 월드컵, 이영훈씨 사건 등등 이런 반응은 많다. 솔직히 말해 내년 여름이 두렵다.) 이미 황우석의 “성과”가 황우석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된 상황에서 MBC의 보도는 곧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황우석을 비판하고 PD수첩을 ‘지지’한 사람은 그렇지 않느냐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떤 입장도 똑같지 않듯(황우석을 지지하며 MBC를 맹비난 했다고 해서 그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곤 몸앓지 않는다) 황우석 비판에도 내부에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일부엔 마찬가지의 불편함을 느낀다. 논의의 많은 부분들이 여전히 “그들만의 정치”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여기까지. 하지만 “Coming soon”이란 말은 루인도 안 믿음.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