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

지난 주 금요일, 정희진 선생님 강의 시간에 이 영화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 언급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보다 쇼크를 받았거나 짜부라졌겠지.

영화에서 군대는, 단지 은유일 뿐이다. 권력과 폭력의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따로 더, 리뷰를 쓸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아직은 쓸 용기가 없다. (쓴다 해도 이곳에 공개하지 않을 것 같다.) 직면하지 않고 도망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감당하기가 힘들다.

잊힐 것도 없는데, 그래서 슬퍼

잊는다는 것, 잊힌다는 것, 슬픈일이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언젠가 한 친구가 루인에게, 자기는 고백이 폭력일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짝사랑으로 지내겠다고 말했지.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어. 그 시절 루인은 그렇게 몸앓고 있었거든. 원치 않는 사람에게 혹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사실 루인이 그랬어. 누군가의 갑작스런 말에 잊기 어려운 경험을 했어. 아직도 종종 그 일이 떠오르지만, 친구에겐 미안해. 그래도 고백 한 번 하지 않은 일은, 더구나 그것이 루인의 말 때문일 거란 몸앓이에 더더욱 미안해.

루인도 그 폭력성이 두려워 말 한 마디 못하고 혼자 앓기만 한 날도 많아. 하긴,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과 특권의 문제이긴 해. 어떤 사랑은 정말 고백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니까.

요즘 들어, 고백은 아니라도 한 마디 말이라도 붙여 볼걸, 해. 잊힌다는 것과 잊힐 것조차 없다는 것의 간극이 너무 크잖아. 그래서 잊힐 거라도 있게 한 마디 말이라도 해볼걸 그랬다, 는 안타까움도 남아.

그래서 어려워. 너무 어려워.

죄송합니다 (교직하는 여러 지점들)

무언가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아직 몸으로 충분히 놀지 못한 것도 있고 현재의 여건도 여의치 않아 망설이고 있다.

루인의 삶의 의제 중 하나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이다. 그냥 이렇게 적으면 자본주의사회란 맥락에선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루인이 채식주의자vegan라는 말을 하면 좀 다르게 보려나. (실제 이런 경험이 있다. 채식주의자라고 말을 하자 다르게 반응한. 이런 반응은 그 자체로 할 이야기가 많은 지점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는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란 의미를 지닌다.

글을 쓰는 것은 경계를 만나고 경계가 흔들리는(여러 의미로) 경험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글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환기되어서이기도 하다(비슷한 내용이긴 하지만 조금 구분하자). 이 후자의 경우가 참 어렵다. 비록 직접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글/경험이 촉매제가 되긴 했지만 그 글/경험이 아니라 그로 인해 환기한 다른 여러 경험들, 몸에 숨어 있던 언어들이 말을 걸어 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환기된 ‘다른’ 기억/몸에 대해서이다. 하지만, 쓴 글의 내용이 그다지 유쾌한 내용이 아닐 때는 문제가 된다. 글의 시작은 촉매제가 된 상황에서 시작해서 촉매가 된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촉매 작용을 통해 깨어난 몸을 쓰는 것이지만 이런 “의도”가 무슨 상관이랴. 더구나 글이 여전히 서툴고 때론 많은 가시를 품기까지 하는 루인의 글쓰기에서, 글은 루인의 “의도”완 상관없이 폭력이 된다.

그래서 빨간부리님에게 죄송하고 고맙다고 몸앓는다. 아래에 쓴 궁여지책이란 글이 빨간부리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충분히 그렇게 읽힘을 미처 몸앓지 못했고 그래서 가해가 발생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란 말 밖에 달리 뭐라고 해야 할 런지…. 그러면서도 고맙다고 느끼는 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해 주셨기 때문이다(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일전에 다른 곳에도 쓴 적이 있고 이곳에도 쓴(자주 떠올리는 글, (가시 돋힌) 질문과 (당혹스러운) 반응) 적이 있듯, 루인이 피해 경험자가 되고 그래서 가해 상대에게 문제제기를 했을 때, 상대가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빨간부리님이 루인에게 무슨 가해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해와 피해라는 이분화되고 고정된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욕망하지만 아직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족함으로 이 언어들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가해와 피해란 말은 때로 너무 무서운/무거운 말이기에 사용함에 있어 두렵기도 하다. 다만 지금 말하는 가해/피해의 상황은 루인이 링크를 건 내용으로의 그것이라고 ‘양해’를 구해도 될 런지.) 당연히 가해에 대한 사죄가 있어야겠지만 그렇다고 피해 경험자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피해 경험자의 문제제기 과정에서도 가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피해 경험자의 말에 무조건 동의 하며 가해자가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하는 건, 오히려 피해 경험자를 타자화하는 방식이라고 몸앓는다. 루인이 바라는 건, 이 때, 피해 경험자의 가해 상황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이 소통의 시작점이라고 몸앓는다. (물론 대부분의 상황에선 피해 경험자가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고 해도 그 자체를 폭력으로 간주해서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빨간부리님에게 죄송하면서 고마움도 같이 느낀다. 빨간부리님이 루인의 글로 인해 느낀 감정(감정은 곧 정치다)이 생기지 않는 글쓰기를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로 인해 폭력이 발생했고 그 지점에 대해 지적해주신 것이 고마운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혹시나 해서 적으면, 색이 다른 글씨는 링크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