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혜 연출, 색자 구자혜 작의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 공연을 계속 보고 있는데 그러며 뒤늦게 깨닫는 점.
이 공연은 연출의 계획/기획과 배우의 애드립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회차의 공연이 새로운 공연이고 매번 변주하는데 어떤 변주는 약속된 변주고 어떤 변주는 사전 논의를 초과한다. 어떤 애드립은 대본 속에 있는 애드립이고 어떤 애드립은 대본에 없지만 사실상 대본의 일부가 되었고 어떤 애드립은 연출의 의도를 엇나간다. 연출은 배우에게 판소리의 고수처럼 대사의 일부를 불러주고 배우는 그 대사를 매번 변주한다. 이런 점에서 마치 재즈 공연의 즉흥 연주 같다.
그리고 나는 이 공연의 중요한 강점이라면 감정의 낙차라고 고민한다. 감정의 진폭이 매우 크고,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돌연 낙하한다. 매우 슬픈 순간에 웃기고, 웃기다가 돌연 슬프고, 다시 웃기다. 이 진폭은 공연의 흐름을 단순하게 만들지 않고, 색자가 만드는 자유로움이 공연의 의도된 실수처럼 읽히게 한다. 나는 대본을 알고 있고, 연습 장면에 여러 번 참가했기에 색자의 변주가 무엇인지 알지만, 연습 내내 연출은 배우에게 자신[구자혜 연출]을 믿고 편하게 내키는대로 하라고 제안했다. 이런 점에서 변주는 또한 의도다. 그럼에도 예기치 않은 애드립은 감정의 진폭이 큰 이 공연에서 수용 가능한 행동 같고, 그래서 다시 이 공연은 재즈 공연의 즉흥 연주 같다.
아마 관객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연출이 무대 옆에서 대사 일부를 불러주는 것이 판소리의 고수처럼 공연의 일부다. 이것은 몇 가지 가능성으로 읽히는데 하나는 관객의 해석 가능성을 확장한다. 연출은 대사보조의 역할일 수도 있고 그래서 색자 1인극일 수도 있다. 또한 연출은 연극의 중요한 일부고 그리하여 색자와 구자혜의 2인극일 수도 있다. 이 공연에서 연출과 배우의 친밀함이 만든 장면은 중요한 웃음포인트인데 그 중 어떤 것은 즉흥적이고 어떤 것은 사전에 합의한 범위에 있다. 그리고 즉흥적인 것 같은 상황이 연출일 수 있고 사전에 준비된 것 같은 장면이 애드립일 수도 있다(작년 공연을 보며 애드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데, 올해 드라마터그를 하며 작년 대본을 읽을 수 있었는데 애드립은 대본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계속 생성 중이다.
다른 한편으로 연출의 대사보조는 관객만이 아니라 배우에 대한 안전과 접근성을 만들어주고 있다. 내가 관람한 많은 연극은 관객의 접근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와 관련한 많은 부분을 배우고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배우는? 배우는 나이에 따라 혹은 당일 컨디션으로,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대사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연출은 이것을 공연의 일부로 내재시켜 배우가 안심하고 연극을 진행할 수 있게 한다. 이럴 때 암기력이 약한, 기억력이 약해진 배우가 연극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것은 구자혜 작가가 <그로토스트키 트레이닝>에 실린 여러 희곡에서(특히 “오직 관객만을 위한 두산아트 센터 스트리밍서비스공연”), 그리고 북토크 때도 직접 말했던 부분이다. 배우의 접근성, 배우의 안전을 고민하는 것. 그래서 나는 연출의 등장은 2인극의 1인일 수도 있고, 대사보조일 수도 있지만, 또한 연극 배우의 참여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일 수 있다고 독해했다. 이랬을 때 배우는 대사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연극을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연극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지금 이 문장은 다소 비겁하다).
암튼 이제 세 번 남았고, 해마다 색자의 이야기를 갱신하며 새로운 공연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퀴어 배우, 트랜스젠더퀴어 배우가 만드는 역사를 관객도 즐겁게 참여하며 공유하는 감정의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