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개가 된 사나히, 메모

벼개가 된 사나히에는 80대 여성국극 배우 이미자, 90대 여성국극 배우 이소자가 나온다. 두 배우의 출연은 계속해서 감사하고 또 감동적인데, 단순히 역사적 두 배우의 출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공연은 기존 여성국극의 관습과 규범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데, 두 배우는 기존 여성국극의 규범성을 체현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만든 역사의 부정적 측면을 직접 재현한다. 동시에 이 공연에서 그 부정적 측면을 문제삼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작업에 후배 배우들과 함께 한다. 역사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역사와 관습, 규범성을 새로운 흐름과 함께 하는 것으로 여성국극의 새로운 약속을 만든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대만 참가하는 공연이었다면 자칫 세대 갈등처럼 오해되었을 장면을, 두 배우의 참여로 인해 이런 반성과 도전이 여성국극의 관습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소년과 왕자 사이의 욕망이 재현되는 장면 등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두 배우의 출연이 감동적이고 또 계속 곱씹으며 배우고 싶은 태도이기도 하다.

이 공연, 안 본 사람 없기를!

벼개가 된 사나히(2번째)

오늘, “벼개가 된 사나히”를 보며 불현듯 구자혜 연출의 공연이 전반적으로 그렇듯 이번 작품 또한 완벽하게 구축한 한 편의 시와 같다고 느꼈다. 뺄 것 없고 괜히 나온 장면이나 대사가 없으며 그냥 쓰는 무대가 없다. 모든 것이 한 편의 시처럼 어울린다. 아, 그래 이게 그동안 내가 구자혜 연출의 작품에서 느낀 공통된 느낌이었구나.

소년은 계속해서 남성성, 남성되기의 의미를 탐색한다. 삼마이, 니마이, 가다끼, 그리고 왕에 이르기 다양한 형태의 남성성을 탐색하고 그것에 내재하고 외재해는 모순과 의존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그리하여 꿈에서, 왕과 벼개 사이의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한 고민과 괴로움을 계속 밀고 나간다. 그 모든 곳에 여역배우가 있고 그들은 남성성, 혹은 남역이 구성되는 방식을 명확히 지적한다. 남성성은 여성과의 관계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완성되지만 여성이 죽어 사라져야 그 성질이 완결된다. 여기에 2막 아랑애사가 중요하다. 피를 흘리며 죽은 시체, 여성을 존재로 다시 사유하는 태도. 그리하여 아랑애사는 어떤 의미에서 소년이 여성국극단에 들어가 모색하고 변형하려는 남성성의 한 형태이자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무엇보다 남역배우라는 말은 남성성이 본질이기보다 계속해서 배우고 수행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압축한다.

무엇보다 이 극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비투비다. 남역배우되기와 비투비의 실천이 만드는 퀴어함이 또 다른 매력이며 모든 곳에서 모든 규범을 흔드는 꼬마의 역은 작품의 주제를 재현하는 핵심이다.

한 번 더 볼 예정인데 또 한 번 더 볼까 싶다. 진짜 정말 재밌다.

벼개가 된 사나히(고연옥/구자혜)

일요일에 ‘벼개가 된 사나히’를 관람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는데, 이 공연만이 아니라 내란 사태라 공연계의 타격이 크다는 말을 들었다… 얼른 내란 우두머리와 동조자들 모두를 잡아들여야 하는데 뭐하나 싶네.

암튼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공연 <벼개가 된 사나히>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국극의 전통에 가장 충실했다. 여성국극과 관련한 논의가 나오던 초기에 읽었던 논의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기존의 전통과 규범, 통상적인 문법 등을 깨는 파격이 중요했다는 점이었다. 사회적, 기술적 변화가 있으면 그것을 적극 반영하며 여성국극을 계속해서 갱신했다는 논의는 여성국극을 누가 어떤 포인트에서 구성할 것인가에 따라 전혀 다른 형식과 입장으로 전개되겠구나 싶었다. 또한 사회적 고민과 질문을 어떤 식으로 여성국극에 담아내며 새로운 경로와 사회적 맥락에 닿을 것인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정확하게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번 작품이 여성국극의 자기갱신을 치열하게 고민한 작업이라고 느꼈다.

일단 추가 2회를 더 예매했다. 언제나 그렇듯 구자혜 연출의 작업은 두세 번은 더 관람하고 싶은 매력이 있고 이번에도 그렇다. 무엇보다 국극 배우들의 소리가 좋아서 그냥 감상하고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