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 hooks읽기

요즘 살짝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늦잠이야 자지 않지만 생활이 다소 나태해진 편이다. 가장 큰 증거로 bell hooks읽기의 느슨함일 테다.

bell hooks읽기는 방학 계획이 아니라 올 한 해의 계획에 속한다. 어쩌면 몇 해에 걸친 다양한 계획의 일부이기도 하고.

처음, bell hooks를 읽겠다고 작정한 것은 작년 여름 즈음이다. 토익,토플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번역된 책만 읽겠다고 잘 버티던 시간은 작년을 기해 벽을 만났다. 읽고 싶은 책, 참고 문헌에서 흥미로운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영서였고 번역이 안 되어 있었다. 처음에야 적당히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무시가 쌓이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영어 ‘따위’ 몇 해째 구경도 안 한 상태였고 끝까지 외면하고 살 작정이었지만 슬슬 영어와 친해져야 겠다는 몸앓이가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 영어 문헌의 일 순위에 bell hooks가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때 부터 외면한 영어가 쉬 친해질리 없었다. 작년 여름 잠깐 문법책을 조금 본 걸 끝으로 간헐적으로 bell hooks의 짧은 눈문이나 읽는 정도였다. 그러다 겨울이 왔고 충동적으로 이번 겨울에는 [Feminism Is For Everybody]를 읽어야지, 라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번역되어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번역이 불만스러웠기도 하지만 ‘쉬울’거란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bell hooks의 영어는 쉬운 편이다. 실제로 Judith Butler 같은 이들과 비교해 봐도 그렇지만 bell hooks 자신이 쉬운 글쓰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각주 없는 글쓰기, 영어만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글쓰기를 지향하기에 영어가 많이 서툴러도 (그로 인해 버벅거리며 고생이야 하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엔 이런 것까진 몰랐고 그저 광고 문안에 의해 쉬울 거란 편견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시작했고 매일 몇 페이지씩, 분량을 정해 읽었다. (그 결과는 이곳) 그러고 나서 잠시 다른 글을 조금 읽다가 마음을 먹고 bell hooks를 순서대로 읽겠다고 계획했다. [Ain’t I A Woman], [Feminist Theory], [Talking Back], [Yearning] 이렇게 초기 네 권을 선택했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일 년이 걸리든 이 년이 걸리든 다 읽은 후에 다른 작가들을 읽겠노라고.

그렇게 지난 3월 부터 읽기 시작했고 지금은 [Talking Back]을 마무리 지을 단계에 있다. ([Ain’t I A Woman] 서평은 여기, [Feminist Theory]은 또 다른 계획이 있어서 서평은 아마 올 연말에나?) 문제는 [Talking Back]을 읽으며 다소 느슨해진 것이다.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언어이기에, 두어 시간 정도만 보고 있어도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머리에서 쥐가 나곤 한다. 한국어라면 몇 시간이고 상관 없겠지만. 머리에서 과부하가 온다는 것은 그 만큼 몸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기에 그렇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 다소 느슨해진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두 번씩 읽기 때문이라는 핑계도 있을 것이다. bell hooks읽기가 즐겁지만 다소 정체된 상태란 느낌. 이 때문에 [Yearning]을 읽기 전에 다른 저자의 책을 읽고 읽을까 하는 몸앓이도 하고 있다.

어쩌려나. 시간은 많기에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할까나…

채식에 얽힌 기억

스노우캣의 일기를 읽다가 깔깔 웃었다. 이 웃음이 항상 재미나 공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선 공감했다.

10년도 넘은, 채식을 처음으로 시작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어느 날 뜬금없이 채식을 하겠다고 말을 하니 부모님께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채식을 하겠다고 말 한 이후, 가장 먼저 나온 반응은 식탁에 고기반찬만 나온 것이다.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지가 무슨…” 그렇다고 먹을 루인도 아니었으니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어머니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채식을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 인식했다기 보다는 그냥 사춘기의 반항 정도로 받아들인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가끔 고기국물로 비빔밥을 주시는 날이 있었다. 그러며 하시는 말씀, “고기는 한 건더기도 없다.” 고기 국물이 싫었지만 그땐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처음 시작하며 단계를 정했고 그래서 육식만 안 먹던 때였기에 여의치 않으면 그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몸앓고 있었다. 더구나 루인 때문에 어머니에게 새로운 반찬 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루인이 직접하기엔 귀찮았고-_-;;). 암튼, 먹다가 루인이 했던 말, “고기 투성이잖아요!!!”

스노우캣의 일기를 보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루인이 저 회덥밥을 본다면 “회가 너무 많아”라고 했겠지.

연고전? 고연전?

별 관심이 없는게 사실이지만 쑥의 블로그에서 읽고 그냥 답글 단다는 것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떠올랐다.

답글 중 일부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죠. 학벌, 지역, 나이주의, 계급, ‘장애’/비’장애’, 섹슈얼리티, 섹스(요샌 젠더란 말이 불편해서 섹스로 대체할까 생각 중이라고 하네요) 등등.”이다.

그런 몸앓이를 한다. 만약 두 대학이 서울이 아닌 비서울지역에 위치했다면 그리고 서울에 위치한 대학 중에서도 사립의 양대산맥이라고 호명되는 대학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문화적인 현상으로 읽히지 못했을 것이다. 특화(specialize/privilege)된 서울이라는 공간과 한국의 학벌주의가 아니라면 “대학가 문화”라던가 “20대의 낭만”이라는 식으로 미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예전엔 고연전/연고전때 술집에 가면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이젠 그런 ‘낭만’이 없다”는 식의 언설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1학년 때 동아리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한 말 중에 하나는 대학생은 얼마든지 객기를 부려도 된다는 것이었다. 대학생이기에 용서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특권의식. 그리고 나이주의. 젊다는 것이 어떻게 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인식 속에 들어있는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된 생애주기이데올로기와 젊음이라는 특권은 결국 타자화와 착취를 발생시킬 수 밖에 없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 ‘장애”여성’의 지적처럼 이 문화는 또한 비’장애’인의 몸을 기준으로 한 ‘놀이’이기도 하다. 집단의식을 고양한다는 그 집단주의/민족주의적인 발상은 사실 특정 소수의 ‘정상성’에 다른 사람들이 맞추길(assimilation)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못한/않는 이들은 배제될 수 밖에 없고 이단자로 배척될 수 밖에 없다. 사실 성별화된 문화로서의 집단주의는 거의 항상 전시성폭력과 연속상에 놓여 있기에 끔찍한 몸앓이를 떨칠 수가 없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주었듯 그런 집단주의, 집단의식을 강화하는 행동들은 그 자체로 폭력성을 내제하며 실제 행사한다.

이런 집단주의가 한국/서울에서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 몸앓아 보면 그것이 고려대와 연세대라는 학벌주의/인종주의/’정상성’이데올로기 등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아름다운 낭만’같은 건 아니다.

(고연전/연고전 문화 내부에서 발생하는 섹스,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문제는 여기선 논외로 하고. 정말 말해보고 싶은 부분이지만.)

한국사회에서 담보하는 가장 특화된 이들, 한국의 ‘정상성’을 획득한 이들만의 권력과시라는 측면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결국 폭력이라고 몸앓는다. 고연전/연고전이 어떤 부분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