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

뭐랄까… 회복이 안 될 것만 같은 피곤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컨디션이 안 올라온다고 하면 표현이 되려나.

어제는 아침부터 계속 몸살 기운이 있어서 힘들었고 계속 졸리고 졸리고 으스스해서 결국 오늘은 휴가를 냈다. 집에서 고양이들에게 둘러쌓여서는 자고 깼다가 자고 또 자고 또 자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졸린다.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갈 예정이었는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못 갔다. 내일 아침에 들려야지.

누가 컨디션 끌어올리는 방법 좀 알려주신다면 감사… 하지만 이건 개인차가 커서 결국 내가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데 지금 이 잡담을 쓰는 지금도 졸린다.. ㅎㅎ

보리의 10년

나는 묘한 불안이 있었다. 처음 키운 리카는 나와 함께한지 2년을 못 채우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날은 5월 말이었고 서울에서 퀴퍼가 열리던 날이었다. 리카는 여덟 아이를 남겼고 그 중 바람이 나와 함께 했다. 분양 보낸 아이들 중 한 아이에 대해 전해듣기를, 리카와 동일한 증상을 겪었고 어려운 고비를 거쳐 회복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하게 불안했다. 하지만 바람은 오래 오래 괜찮았고 불안은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믿던 그 시기에 바람은 리카와 동일한 증상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 리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 당시 의사는 “원한다면 3차 병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해볼 수 있다”고 했는데 당시 나는 초보 집사의 부주의함, 미숙함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때 의사의 조언을 받아 미리 유전자 검사를 했어야 할까. 하지만 검사를 받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병원에서 검사용으로 끝날 것이라고 했으니, 다시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장례를 치뤄주기로 결정하겠지.

바람이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난 이후 나와 함께 하는 고양이는 8년을 못 넘기는 것일까 불안했다. 나중에 보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그 불안이 더욱 커졌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면 안 되는데 감히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과욕이 이런 사태를 만든 것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보리는 좋은 의사의 치료와 간병 속에서 회복했다. 이후 지금까지도 처방사료만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보리는 건강하고 귀리, 퀴노아와 함께 잘 지내고 있다.

이제 보리는 태어난지 10년이 지났고 나와 함께 한지도 10년이 다 되어 간다. 뭔가 고맙고 다행이다. 보리의 10년은 내가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언제나 미안함과 고마움을 남겨주고 있다.

나의 소중한 아기들, 그리고 안녕, 나의 보리. 함께한 시간만큼 더 오래 함께할 수 있기를.

토론은 어렵다

토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근래 토론을 할 기회가 좀 더 많아지면서 더더욱 토론을 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수업을 하는 첫째 날이면 이런저런 가이드를 하는데 그 중 하나는 텍스트를 읽는 방법이다. 나의 가장 중요한 원칙: 각 텍스트의 한계를 다루지 말 것. 그러니까 이 텍스트에는 저런 논의가 빠져 있고 저 텍스트에는 이런 논의가 빠져 있다는 식으로 읽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런 태도로 쪽글을 쓰고 수업에서 토론할 것을 요청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모든 텍스트는 한계를 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완벽한 텍스트는 없고 빠지는 내용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텍스트는 각자의 목표와 기획이 있고 그래서 그 한계 내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그렇기에 빠진 내용은 무궁무진하고 빠진 부분에 집중하면 텍스트에서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한계 내에서도 배울 수 있은 측면에 초점을 맞춰서 텍스트를 읽어주기를 요청하고 매번 이 지점에 집중한다. 학위 논문을 쓸 때면 한계를 적어야 하지만 그건 그때고 일단은 배울 수 있는 부분을 배우고 한계 내에서도 가능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토론을 준비할 때도 정확하게 이 지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논문이나 발표문에서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의도를 찾고, 해당 논문의 한계나 제약 속에서 어떻게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을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찾는 것. 연구자의 욕망과 기획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논문이 설정한 한계를 초과하지 않고 가급적 그 한계를 존중해줄 것. 이것이 토론의 역할이지 않나 싶은데 사실 나도 잘 하는 편은 아니라, 토론을 할 때마다 걱정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오랜 연구 고민을 살리지는 못할 지라도 망치지는 않는 것. 이것이 토론의 역할이라고 배웠는데 그게 또 쉬운 일은 아니라 매번 부담스럽고 발표자/연구자에게 괜히 미안하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