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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일 정도로, 10년만에 알게된 보리의 물 취향.

고양이 물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줬는데, 일단 보리를 비롯하여 귀리, 퀴노아 모두 물은 잘 마시고 셋 다 새로 물을 떠다 주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정수기 물을 줬고, 귀리가 모래를 먹어서 그 이후로는 수돗물을 주었다(이후로 모래를 안 먹어서 미네랄 부족이었든 듯). 내가 사는 동네가 수도관 청소를 자주해서 믿을 수 있기도 하고 세면대 필터를 추가로 사용하기도 있기도 하고. 아무려나 그렇게 물을 주다가 또 ㅅㅍㅋ생수를 자주 마셔서 ㅅㅍㅋ 생수를 고양이용 물로 주기도 했다.

매일 새로 떠다주는 물을 좋아하지만 새로 물을 떠다준다고 매번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을 새로 달라고 우왕우왕하고 울어서 물을 갈아주면 킁킁 냄새를 맡다가 획하고 돌아서기가 태반이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물을 마셨다.

그러기를 보리 기준으로 10년. 최근 집에 ㅈㅈ ㅅㄷㅅ가 있어서(생수 기준 가장 비싼 물) 그걸 줬는데… 대충격. 보리는 그 물을 곧바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 이후 ㅅㄷㅅ로 계속 줬더니 과거에 비해 물을 갈아줬을 때 바로 마시는 비율이 증가했다. 심지어 더 최근에는 ㄴㅅ ㅂㅅㅅ를 줬더니(역시나 ㅅㄷㅅ와 비등하게 비싼 물) 그 역시 곧바로 잘 마셨다. … 충격…

사람도 생수 취향이 있듯(유난히 싫어하는 물맛의 브랜드가 있지) 울집 고양이도 생수에, 더 정확하게는 물맛에 정확한 선호가 있으셨다. 허허허… 근데 그 취향이 가장 비싼 물이었다…….

이민휘 2집 [미래의 고향] 진짜 좋다. 전에도 좋다고 적었는데, 일주일에 나흘 정도는 견딜 수 없다는 기분으로 이민휘 앨범을 듣고 있다. 2집을 듣다가 영화 음악 작업한 것도 듣고 예전 앨범도 듣고, 암튼 유튜브 뮤직에 있는 음악을 다 듣고 있는데… 부디 오래오래 음악을 해주면 좋겠다. H도 엄청 좋아해서, 나중에 공연을 보러 갈 수 있기를.

하지 말아야 할 말

나는 [마샤 P. 존슨의 삶과 죽음]이라는 다큐를 좋아하는데 그 중 유독 자주 언급하는 장면은 실비아 리베라가 노숙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이다. 리베라는 미국 트랜스젠더퀴어 정치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고, 그래서 저 다큐에서도 리베라가 청년층과 만날 때면 엄청나게 환호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럼에도 전설적인 인물의 삶, 특히나 라틴계 하층계급 성판매자로 살았던 인물의 현실은 노숙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의 현실적인 생활은 역설적에게도 내게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삶이 낫다거나 괜찮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가난하지만 그럼에도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소중한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 장면을 강의나 다른 자리에서 언급하고는 했는데, 사실 이런 언급을 하면 수강생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뭐랄까, 중산층 욕망은 아니라고 해도 살만한 삶에 대한 전망이 없다면 페미니스트로, 퀴어 활동가로 사는 것, 퀴어 연구를 하는 공부노동자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저변에 있다고. 이 불안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이나, 규범적으로 저항하는 삶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위태로워서, 계속해서 계약직으로 살아가고, 당장 오늘이라도 잘릴 수 있고, 전세사기에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리베라의 노년은 위로라기보다 더 큰 불안이고 위험에 가까웠던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그동안 리베라의 삶을 말하더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못 말했구나 싶어 부끄럽고 미안했다.

규범은 구조인가

수업이 끝난 날 공유한 이야기인데 여기도 메모.

수업을 준비하고 이런 저런 글을 읽고 하다가 문득 그런 고민이 떠올랐다. 규범을 말하는 것은 구조를 말하는 것일까? 규범, 그러니까 퀴어에 대한 구조적 차별의 작동 양상을 이성애규범성이라고 명명한다. 그리하여 이성애규범성을 말한다면 이는 이성애를 사회의 자연 질서로 삼고 있는 구조적 문제, 정치적 문제 그리고 이 구조가 조장하는 폭력과 차별에 문제 제기하는 의도를 내재한다. 이원 젠더 체제, 강제적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명명은 모두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등장했고 그것이 설득력을 획득하고 설명력을 갖추면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럼 이제 규범성을 말하는 것은 곧바로 구조를 말하는 것일까? 개인의 경험이나 개별적 피해 경험이나 불편함을 논하며 여기에 이성애규범성과 같은 언급을 한다면 이는 곧 구조적 문제를 말한 것일까? 아님 구조적 문제를 말했다는 간편한 면피를 획득한 것일까? 규범성을 논하는 과정은 구조적 논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규범을 언급하는 것으로 구조를 분석하지 않기 시작할 때, 규범성을 언급하는 것은 구조를 논하기보다 개인적 사건으로 치환하는 것이지 않을까? 개인적 사건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 논의에서 개인의 고통과 어려움, 곤란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개인이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배경이 같이 논의되어야 하는데 규범성 언급이 그 모든 필요와 노력을 간단하게 면피시키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은 내가 지금까지 쓴 글 모두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못한 것이거나 내가 쉽게 면피하려고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더욱 구조를 말하는 것의 의미, 규범성을 명명하는 것의 위미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오늘 인미공에서 진행한, “스퀴시! 숲 속에서” 전시와 조윤희 선생의 무성애 강의를 듣고 왔다. 전시도 좋았지만 무성애 논의를 전시와 강연으로 엮어서 들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더 많은 논의가 나오며, 규범성과 규범성을 충돌시켜 발생한 균열에서 더 많은 논쟁이 나오기를!

… 그러고보면 규범성 언급이 곧 구조를 언급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규범성은 빈번하게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누락된 상태에서 규범성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와 연결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