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 정하기

루인의 전공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루인의 논문을 지도할 교수를 찾는 일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의 전공은 학과인 여성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문의 주제나 주로 공부하는 영역이란 의미로.)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지도교수를 누구로 할 것인가는 큰 문제의 하나였다. 물론 논문은 교수가 쓰는 것이 아니고 자기 논문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지도교수를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루인의 고민은 지도를 잘 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느냐의 문제였다. 여성학과 내에서도 트랜스나 이반queer에 혐오/공포를 가진 사람이 많고 혐오/공포는 ‘없다’고 해도 공부를 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루인에게 지도교수는 도움을 줄 읽을거리를 짜주거나 방향을 정해주는 사람이 아니라(설마 이런 경우야 없겠지만) 루인의 논의 방향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꼼꼼하게 점검하며 논리적인 문제나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지도 받을 수 있는’ 역할이었다. 이렇게 적으면 지도교수의 역할을 상당히 폄하하는 것 같이 들릴 수 있겠지만 정반대다. 루인도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고 때로 관두고 싶을 정도의 막막함에 부딪힐 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지도교수는 가장 무서운 거울이다.

그래서 입학하기 전에, 입학을 하고서도 내심 예정하고 있던 선생님은 세 분 정도에 머물렀다. 뭐, 현재의 운영위원 선생님들 중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선생님이 네 분이고 그 중 한 분은 “여성학과 운영위원인 것이 의심스러워”라고 말하는 분이니 세 분으로 좁히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줄이자면, 루인의 논문 방향을 사회학으로 분류한다면 한 분 뿐이었다. 운영위원 선생님들의 전공이 상당수 인문학이고 사회학과 소속인 분은 한 분 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인문학과 사회학의 차이가 무언지 구분을 못하는 루인으로선 이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었다. 학술적인 글쓰기와 대중적인 글쓰기가 어떻게 구분이 가능한지 모르겠고 수학과의 상상력과 인문학의 상상력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모르는 루인으로선(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인문학이고 어디까지가 사회학이고 어디까지가 자연과학이야?) 선생님의 소속 학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분들의 개별 전공과 수업을 통한 느낌으로 결정할 문제였다. 그렇게 ㄱ, ㅈ, ㅊ의 세 분이 후보 목록에 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학생이 원하면 교수가 무조건 응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반드시 응해야 하는 건 아니다하더라도 현재 루인의 학과는 특성상 학생이 교수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이 3 대 1이니 그럴 수밖에.

이런 고민 속에서 한 학기가 끝나가는 상황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 달이 지났지만 넉 달도 안 되는 한 학기 일정 상 6월 달은 이미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전혀 의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사실, 학교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을 지도교수로 선정할 수 있다면, 다른 가능성은 있는 편이다. 타 대학에 전공이 일치하진 않는다 해도 어느 정도 근접한 선생님이 있고 기계적인 교수 평가제도가 싫어서 교수 자리를 버리고 떠난 선생님이 한 분 있다. 후자의 경우, 루인이 하고 싶은 방향과 상당히 밀접하기에 논문지도교수로 제격이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말 그대로 의외의 방향이 생겼다.

이 의외의 변수는 수업을 들으면서이다. 현재 듣고 있는 ㅅ선생님은, 사실 그전까진 잘 몰랐다. 페미니즘 관련 책을 쓰신 적이 있고 예전에 친구가 한 번 정도 수업을 들으면 책이든 논문이든 글을 꼼꼼하게 읽으시기 때문에 도움이 될 거라고 추천한 정도, 이상의 정보가 없었다. 이런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그동안 루인이 주로 읽거나 찾은 글의 주제와 선생님이 주로 쓴 글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겹치는 지점이 있긴 했지만 그 지점은 루인이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뒀기 때문에 지금까지 만날 일이 없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ㅅ선생님에게 논문지도를 받으면 좋겠다고 느낀 건, 여러 가지가 있다. 수업 시간에 퀴어 관련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다른 학생들의 혐오증을 달래면서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하신다는 점, 글을 꼼꼼하게 읽으며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를 얘기한다는 점,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함께 해석한다는 점 등등. 이 모든 부분이 선생님과 하고 싶은 요인으로 작동하지만 첫 번째가 사실 가장 크다. ㅅ선생님을 알기 전, ㅈ선생님을 내정하고 있을 당시, 그럼에도 망설인 건, 트랜스나 이반 관련 감수성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혐오/공포 발언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많이 망설였다. 그랬기에 ㅅ선생님은 더 이상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5월이 들어서부터일까, 어떻게 하면 지도교수를 정할 수 있는지 주변에 묻기 시작했다. 주변이라고 해봐야, 같이 수업을 듣는 박사과정에게 였다. 마침 그 분도 ㅅ선생님께 논문지도를 받고 있었기 때문. 루인과 같은 과엔 아직 논문을 쓴 사람이 없기에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내심 정하고도 계속해서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

사실, 고민의 가장 큰 부분은 거절하시면 어떻게 하나였다. 흑흑. 소심함이 발동하는 이 찰라. 딱히 다른 선생님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거절이 두려워 뭔가를 못하는 지점이 많은 루인으로선 가장 큰 고민은 이 지점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도 걱정이지만, 사실 거절이 두려워 시작을 못한 셈이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책이랑 노는 일은 거절당할 일은 없잖아. 비록 지금의 루인이 읽기에 버거운 텍스트가 있을지언정 거절을 하진 않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래서 많이 망설이고 있다가, 월요일에 있었던 발제가 끝나면 찾아뵙고 부탁해야지, 했다.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제인 화요일, 다음 학기 대학원 강의 개설 문제로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같이 모인 자리가 생겼다. 그날, 다음 학기부터 개인연구를 하겠다고 그 전부터 선생님들께 말한 상황이었기에, 월요일 저녁부터 학업계획서를 간단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학업계획서를 어디까지 써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대략적인 주제와 다음 학기에 읽고 싶은 논문이나 책 제목까지 순서대로 목록을 짰다. 그 전에 알고 지내는 한 (강사로 있는) 선생님께 물어보니, 희망목록을 짜도 괜찮다는 얘길 들었기에 몇 주간의 사전 준비를 통해 그렇게 했다. 그렇게 어제가 되었다.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내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서 부탁해도 되는지 하는 불안에서 거절하거나 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욱더 그랬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마침내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절묘한 상황이 생기자, 선생님께 간단하게 쓴 학업계획서를 보여 드렸다. 선생님은 놀라셨지만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곤 수락해 주셨다. 아… 기뻤고 그래서 “고맙습니다”란 얘길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 만큼 좋았다. 곧 선생님은 말씀 하셨다. 지도교수는 단지 논리만을 봐주는 것이지 논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논문을 쓰는 자신이라고. 선생님도 학위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에게 그런 얘길 들었다며 그런 얘길 해 주셨다. 그러고 나선, 강의 개설에 개인연구 과목 개설에 신경을 더 써주셨고 그렇게 진행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다. 대학원 학제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주 있었던 여성학과 행사를 준비하며, 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던 중, 루인의 성격으로 봤을 때 선생님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잘 보여서 성공하긴 힘들 테니 성적이라도 잘 받아야지 않겠느냐고 깔깔 웃으며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사실 그대로다. 하지만, 수락 받았다고 마냥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닌가, 하는 걱정. 다음 학기 시작할 때까진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되는지 방학 일정이나 뭐 다른 얘기를 위해 한 번은 찾아뵈어야 하는지, 등등. 아, 우선은 루인이 희망하는 논문과 책이 괜찮다면, 제본해서 드려야 하나? 으아아~ 모르겠다. 당장은 기말 논문만 신경 써야지.

휴식

한 달 만의 휴식이라고 느낀다. 4월 말부터 시작해서 어제까지, 바쁘게 지낸 시간이라고 기억한다. 음력 4월이 바쁜 한 달이었는지, 양력 5월이 바쁜 한 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 주 뭔가가 있었고 토요일도 늦잠 잘 시간이 없던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휴식이 조금 불안하다. 바쁜 일정에 몸이 익숙한 상태로 바뀐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20여일에 걸친 시간을 논문에 투자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겠다고 느꼈으니까.

휴식이라고 대단한 건 아니다. 루인이 믿는 가장 좋은 휴식은 세수도 안 한 맨 얼굴로 玄牝에서 뒹구는 것. 매트리스에서 떠나지 않는 것. 어제, 아니 오늘은 새벽 늦게 잠들었다. 그리고 늦게 일어났다. 영화라도 한 편 볼까 했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개봉작 정도는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일정이라 그날의 마지막 상영작을 즐기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기쁘게도 이 시간도 서서히 끝나간다. 역설적이겠지만 기쁘다. 다시 시작이다. 후후.

선거..

오랫동안 MBC FM4U를 듣다가 요즘은 MBC 표준FM을 듣고 있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할 시간이 별로 없기에 주로 뉴스가 나오는 표준FM을 듣고 있다. 그러다보니 별로 안 좋아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듣는다. 지난 주 월요일도 아침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선거 중간점검으로 서울시장 후보들이 차례로 나와서 인터뷰를 했다.

첫 날인 월요일은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인 강금실이었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사건을 당한지 이틀이 지난날이었다. 손석희는 강금실에게 이 사건을 별로 안 물으려고 했다. 그냥 관례상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강금실은 “여성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서울시 후보로 나온 사람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뉴스를 통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기에 더욱 그랬다. 지금까지 매일 라디오 뉴스를 듣지만 누구도 이 사건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 번째 대답은 연합뉴스를 통해 인터넷 기사로 나왔고 악플만 몇 개 달렸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며 손석희는, 한나라당에서 제기하고 있는 정치적 테러나 배후설 등은 묻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강금실은 받아서 대답했다. 어떻게, 사람이 다치고 폭력 피해를 당한 상황에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정치적 배후설이니 음모니 하는 식의 선거 전략으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너무도 화가 난다고. 이 말을 듣고, 감동 받았다. (MBC라디오에서 손석희의 시선집중, 다시듣기 5월 22일 3,4부를 통해 다시 들을 수 있다.)

그동안 별다른 지지자가 없었고 강금실이 비록 법무부 장관을 하며 호주제 폐지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열렬히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한 마디, 어떻게 폭력 피해 상황을 표를 집결하는 선거 전략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은, 감동 이상이었고 반성을 요구했다.

솔직히 말하면, 루인도 처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사건 소식을 접했을 때, 끔찍함과 함께 선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빌어서 사과하고 싶다.

루인은 강금실의 이 발언이 상당한 이슈가 될 거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통해 루인이 얼마나 “순진”한지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강금실 인터뷰 내용은, 열린우리당을 비판한 부분에 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는 “박근혜 대표님, 고맙습니다”란 만세를 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서울시장 후보들의 인터뷰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강금실 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문득 서울시민이 아님이 아쉬웠다. 부족하겠지만 한 표를 보태고 싶은 바람을 처음 가졌다.

오늘, 수업 마치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잠깐 지지(MP3P)를 꺼둘 일이 생겼고 그로인해 한나라당 구청장 후보의 연설을 잠깐 들었다. 대충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이 만큼 발전시켰는데 민주세력들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다느니, 평택에서 시위대가 전경들을 죽창으로 공격하고 있다느니 하는 식의 연설을 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절망을 느꼈다. 이런 말을 공개 연설에서 할 수 있다는 것에, 이런 사람들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정당의 후보란 사실에, 이런 사람들이 시장이든 구청장이든 의원이든 뭐가 된다는 사실에.

슬프다. 내일은 종일 쉴 예정이지만,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프고 반성하고 있다. 그냥 작은 바람이라면 박근혜가 강금실에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했으면 하는 것. 루인이라면, 아무리 원수 관계라 해도 강금실씨 같은 말을 한다면, 고맙다고 말할 것 같다. 그래서 박근혜씨가 강금실씨의 말을 들었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너무 큰 바람은 아니겠지? 소박한 바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