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퀴어, 트랜스젠더, 번역

최근 몇 년 전부터 일부 구성원 사이에서 스스로를 젠더퀴어로 설명하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반가웠고 한편으로 당황했는데 젠더퀴어가 한국에서 어떤 맥락으로 들어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범주 용어를 번역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혹은 더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이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자신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범주를 둘러싼 사회구조적 측면을 같이 이야기해야 하는 것 역시 중요하고. 하지만 용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민은, 왜 미국의 중산층 백인 무리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주로 번역되는가였다. 비백인 하위문화, 하층계급에서 사용하는 범주 용어, 펨퀸, 게이퀸 등은 거의 번역되지 않는 경향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이런 고민으로 나 자신을 젠더퀴어로 설명할 때가 있음에도 젠더퀴어란 용어를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젠더퀴어란 용어를 더 적극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미국 (학제) 맥락에서처럼 포괄어가 아니다. 미국에선 트랜스젠더에 크로스드레서를 포함하지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서는 전혀 다른 범주 용어다. 둘이 매우 많이 겹친다고 해도 전혀 다른 범주며 때론 크로스드레서가 더 포괄적인 범주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트랜스젠더는, 항상 그런 것은 의료적 조치와 매우 밀접하게 유통되고 있다. 하리수 씨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트랜스젠더는 성전환수술을 했거나 할 예정인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커뮤니티에서도 대체로 이런 느낌으로 사용하고 있고. 아울러 젠더퀴어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의료적 조치 경험과는 무관하지만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느낌도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지만. 미국 맥락에서라면 한국의 젠더퀴어가 미국의 트랜스젠더고, 한국의 트랜스젠더가 미국의 트랜스섹슈얼에 가깝겠지만, 어차피 언어, 용어, 정체성은 번역되고 그 과정에서 지역적 변형을 겪는다. 그리하여 미국의 범주 용어와 한국의 범주 용어는 한국에서 오독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용어로 등장한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의료적 조치를 원하지 않거나 의료적 조치를 한다고 해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포섭되길 원하지 않는 이들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혹은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에 온전하게 포섭되지는 않지만 한국 사회에서 사용하는 트랜스젠더로 설명할 수 없고 동성애나 양성애/범성애로 설명하기도 힘든 이들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퀴어란 용어를 적극 차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젠더퀴어를 좀 더 적극 사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요즘이다.

동성애규범성, 트랜스규범성, 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기

트랜스젠더퀴어 정치를 진행함에 있어 규범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끊임없인 불편을 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1년 뒤 나의 고민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재까지의 나는 이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런 믿음과 별도로, 규범성을 어떻게 규정하거나 정의하거나 설명할 것인지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다. ‘동성애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트랜스젠더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 ‘양성애자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명령이 규범성인가? 한편으로 그렇다. 하지만 규범성은 단순히 ‘어떻게 살라’라는 명령일 뿐만 아니라 삶의 복잡성을 가시화하거나 은폐하는 편집 작업, 큐레이팅 작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동성결혼 논의를 전개하면서 이성애결혼만을 정상화하는 사회적 규범을 문제삼으면서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것, 혹은 결혼제도 자체를 문제삼는데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모두 규범성에 해당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바이와 결혼, 트랜스젠더와 (합법적)동성결혼 논의를 모두 은폐하거나 결혼을 둘러싼 복잡한 실천을 싸잡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규범성을 설명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아직은 규범성, 특히 동성애규범성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규범성 비판을 무화시키려는 언설은 더 문제가 있다고 고민한다. 그렇다면 동성애규범성을 신랄하게 비판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나의 최근 고민인 트랜스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입장에서 ‘적당한 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매우 단순하게 받아친다면, ‘적당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생긴다면 바로 그때가 적기다. 중요한 건 이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 그리하여 고민하기를, 동성애규범성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트랜스규범성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문득, 이른바 보수기독교로 묶이는 반LGBT/퀴어 집단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며 동성애규범성을 들어 동성애를 비판하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이런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며 규범성을 문제 삼고자 할 때, 규범성을 문제 삼는 태도가 또 다른 규범성이 된다면 어떡할까? 비판적 논의가 역전된 규범성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면? 그리하여 기존의 규범성과 함께 비판적 논의도 규범성이 되기 시작할 때, 이 모두를 다르게 사유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가능성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미리부터 이것을 염두에 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이성애규범성, 동성애규범성, 그리고 트랜스규범성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글을 구성할 수 있을까?

트랜스규범성 transnormativity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트랜스규범성(transnormativity)을 이야기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아직 영어 사용자를 중심으로 한 학제에서도 활발하게 논의를 하고 있진 않다. 이성애규범성이나 동성애규범성에 비추어 더 조금 뻔한 측면이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복잡한 감정으로 머뭇거리는 건지 확실하진 않다. 트랜스젠더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규범적 존재, 기존 질서를 강화하는 존재란 비난과 함께 하기에 트랜스규범성을 말하기는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일전에 <특종 헌터스>에서 보도한 트랜스젠더 관련 영상을 봤다. 내가 잘 몰라서 배울 내용도 있으니 괜찮았다고 평가 하고 싶다. 하지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특종 헌터스>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는 모두 mtf/트랜스여성이며 의료적 조치를 하고 있고 때때로 호적 상 성별 변경도 원하거나 이미 호적 상 성별 정정을 했다. 또한 매우 여성스러워서 ‘여자여자’한 느낌이다. <특종 헌터스>에 등장하는 mtf/트랜스여성의 모습은 여타의 미디어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재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이미지가 한국에서 주로 소비되고 논의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이다. 그럼 미디어를 비평하면 되는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눈팅만 하는 트랜스젠더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모습과 매우 닮은 욕망이 흐른다. 다들 호르몬 등 의료적 조치를 원하고, 의료적 조치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고민하는 사람에게 의료적 조치를 적극 권하며 이것이 중요한 해결책처럼 말하기도 한다. 물론 회원 개개인의 맥락에선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어떤 경향성에선 특정 규범이 존재한다. 흔히 ‘트랜스젠더라면 이렇게 살겠지’라고 여기는 삶과는 다른 방식의 삶은 배제되거나 무시되는 경향 역시 존재한다.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조치를 원하고, mtf/트랜스여성이 여성스럽게 행동하며, ftm/트랜스남성이 남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규범성이라고, 이성애규범적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트랜스젠더를 비난하는 것은 삶의 맥락, 정치적 위치성 등을 조금도 사유하지 않는 태도거나 사유하더라도 어떤 부분에서 실패한 태도다. 이것과는 별개로, 커뮤니티 차원에서, 그리고 삶의 실천에서 트랜스젠더의 트랜스규범성이 형성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트랜스규범성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내부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규범성이 불편한 나는 트랜스규범성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나의 갈등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논의 지형이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는 현저하게 부족하다. 부족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실상 전무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매우 적은 수의 논문이 출판되고 있고 그 중 상당수는 법학 논문(판례 분석 논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삶, 트랜스젠더 이론, 트랜스젠더 정치학과 관련한 글은 너무 적어서 전무에 가까운 수준이다. 지금 트랜스규범성을 논하기엔 그 논의의 토대가 되는 논의 지형이 없다는 뜻이다. 트랜스젠더 정치학의 이론적 논의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트랜스규범성을 비판하는 글을 낸다는 게, 어떻게 보면 매우 뜬금없다.

그럼에도 트랜스규범성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한다. 트랜스규범성을 비판하는 글 역시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개개인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규범성에 불편함을 느끼며 조용히 커뮤니티를 떠나는 사람들, 말을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다양한 매체에서 비판하지만 그것이 충분히 맥락화되지 않고 그냥 개인의 불평으로 취급되는 상황이 존재한다. 동시에 어떤 실천이 주로 이야기되면서 내부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변태적인 삶의 양식이 모두 누락되거나 배제된다. 그러니 트랜스규범성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누가 해주면 더 좋겠다! 히히.